< 신심을 깨치는 글 >
[현안 스님의 아메리칸 육바라밀] - 제 6 편
글 | 현안賢安 (XianAn)
보살도의 육바라밀 중 마지막으로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즉 출세간지(出世間智)입니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지혜를 뜻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속적 지적 능력을 지혜로 여깁니다. 사실 과학, 철학과 같은 연구에서 나온 지적 능력은 세속적 지식입니다. 불교에서 “지혜”란 불성을 깨닫는(Realize Buddhahood) 출세간적 지혜(World transcending wisdom)를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반야입니다. 그래서 반야는 번역할 수 없습니다. 반야는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 중국 당나라 시대의 삼장 법사 현장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용어는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1. 비밀용어 2. 많은 의미를 가진 용어 3. 번역자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칭 4. 전통적으로 번역해오지 않은 것 5. 경의를 표하기 위한 용어.
반야지 즉 반야의 지혜는 삼매에서 일어납니다. 자동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냥 앉아서 '내 반야지는 얼마나 걸릴까?'라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대신 해야할 일은 삼매의 힘을 증진하는 것입니다. 충분한 삼매력이 있을 때, 이 반야의 지혜가 발아할 수 있도록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씨앗은 어떻게 심을 수 있나요? 그것을 바로 문자반야라 부릅니다. 바른 이치 즉 정법(正法)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걸 듣고 읽어서 그 씨앗을 내면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팔식(八識, The eighth conciousness 또는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매의 힘이 충분해지면 그때 그 씨앗이 발아합니다. 이 씨앗은 반야지 즉 반야의 지혜에 중요합니다.
삼매의 힘을 얻어 씨앗이 발아하면 예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지혜가 펼쳐집니다. 그런 이유로 여섯번째 바라밀 즉 반야바라밀은 명확히 설명되어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외도 수행자를 찾아가서 배운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들의 신통력을 친구들에게 자랑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몇 가지 생각을 읽을 수 있다든지, 여러분에게 오늘 일어난 일도 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외도 수행자를 보고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런 사람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야지혜란 괴로움을 끝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통력이 생겨도 여전히 괴롭기 때문에 지혜가 없다고 봅니다. 돈에 대한 탐심처럼 신통력에 대한 탐심도 괴로움을 자아냅니다. 괴로움에 끝을 내고, 영원한 안락을 얻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외도라고 부릅니다.
그다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소승 수행자입니다. 이들에게도 출세간지가 있습니다. 신통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승의 관점에서는 아직 궁극적인 출세간지가 아닙니다. 소승 수행자는 생사에 대한 자신의 몫은 끝을 냈지만, 마음의 괴로움을 모두 끝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있는데, 마음이 여전히 달립니다.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 생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영화 스님은 참된 반야지를 얻어야만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 모두를 끝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씨앗을 심어야만 합니다. 그 씨앗은 무엇일까요? 정법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승법만 들으면 끝낼 수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보통 사람들에게 있는 무수한 생각을 의지에 따라 멈출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의식의 움직임을 끝낼 수 없습니다. 아라한은 매우 정제되긴 했지만 여전히 정신적인 활동이 있습니다. 오로지 보살만 그걸 끝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을 깨달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보살은 더이상 혼란이 없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단 하나 뿐입니다. 바로 반야지입니다. 나는 아라한이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런데 틀린 말을 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화 상인은 참된 지혜를 얻은 후에야 설법할 수 있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건 책에서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반야지가 펼쳐지길 바라면서 책만 많이 읽는다면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불교에 대한 책을 읽는다면 그건 반야의 첫 단계인 문자반야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이제 씨앗만 심었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쓸모가 없습니다. 물도 주고, 햇빛도 나와야 씨앗이 발아합니다. 수확하려면 아직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단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자반야도 중요합니다. 문자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명상할 즉 관을 해야 합니다. 관조 반야를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선(禪)은 관하는 명상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러분에게 진언 수행을 가르칩니다. 그건 관조반야입니다. 문자반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걸 수행하면서 이해합니다. 여러분이 드디어 자기 스스로를 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진언을 외우는데 갑자기 '냉면!'이란 생각이 불쑥 올라옵니다. 또는 다른 생각이 불쑥 일어납니다. 이런걸 관(觀)한다고 부릅니다. 영어로 contempl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명상하거나 진언을 외웁니다. 그러다 '아~ 너무 피곤해', '배고파', '이런 짓을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탐진치로 가득하면서 어떻게 깨닫기를 기대하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여전히 그런 생각이 있다면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 잘라버리십시오. 그걸 관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자신의 탐욕을 보고, 우치를 관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자신의 탐심, 진심, 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하! 이래서구나' 왜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지, 탐욕스러운지, 쉬고 싶은지, 무엇이 불쾌한지 보십시오. 이건 매우 하기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도 자기 자신의 결함을 직면할 용기가 있나요? 그래서 수행은 평화롭고 기분 좋은 게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야하는 힘든 과정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무엇이 두려운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잠시 접어두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반야 지혜를 향해서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자 소개: 현안(賢安, XianAn)
출가 전 2012년부터 영화 스님(永化 禪師, Master YongHua)을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매년 선칠에 참여하였다. 2015년부터 명상 모임을 이끌며 명상을 지도했으며, 2019년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했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2020년부터 한국 내 위앙종 도량 불사를 도우며 정진 중이다.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 Jeweled Conch Seon Center)에서 상주하며, 문화일보, 불광미디어, 미주현대불교 등에서 활발히 집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2021, 어의운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