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 국보 제217호

미술은 형상으로써 내적 정신세계를 드러낸다. 주자학이 문화의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조 초기의 그림들은 한국인의 손을 빌린 중국정신의 표현이었다. 중국의 화본(畵本)을 따서 중국의 이상을 그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민족적 주체성에 눈뜨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에 입각해서 진리를 구하려는 실학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우리의 실세계(實世界)를 보게 되었다. 중국의 미가 아니라 우리의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리게 된 것이다.
중국문화에서 벗어난 주체적 예술활동의 시작이었다. 이를 개척한 이는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이다. 그는 우리의 산천을 답사하고 사생한 우리의 산수화를 그렸다. 상상이 아닌 참 경치, 곧 진경(眞景)을 그린 것이다.
‘진경’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하나는 사실 경치 곧 실경(實景)이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대상의 참 모습 곧 본질을 묘사했다는 뜻이다.
겸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금강전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일만 이천 봉을 다 그렸다는 뜻의 전도(全圖)가 아니다. 금강산의 본질적인 참 모습을 그린 진경이라는 뜻에서의 전도이다. 그가 그림 위쪽에 적어 넣은 화제에 있듯이 “산에서 나는 뭇 향기는 동해 밖에 떠오르고, 그 쌓인 기운은 온 누리에 서렸다.” 곧 금강산의 향기를 그린 것이다.
그림 위쪽에는 비로봉이 높이 솟아 있고, 오른쪽에는 기암절벽들이 만물상을 이루고, 왼쪽에는 온화한 산세가 숲을 등에 업고 있다. 중심부에는 만푹동이 있고, 내려오면서 표훈사와 장안사가 있다. 아래 끝 부분에는 장안사로 들어가는 비흥교가 있어 속세와의 다리 노릇을 하고 있다.
금강산이란 <화엄경>에 모사된 보살들의 한 거처이다. 동쪽바다에 있는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있어 일만 이천 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다. 그는 우주를 두루 비추어 불국토를 이루게 하는 법신불이다. 그의 안에서는 불국토와 구별되는 속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비흥교는 실로 聖과 속을 하나로 연결 짓는 다리이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하나가 곧 일체요, 다양한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이것이 금강산의 진경이다.
겸재는 금강산을 답사하여 사생했다. 그리고 이것을 재구성하여 <금강전도>를 그렸다.금강산이 내포하고 있는 화엄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관념적인 중국화의 연장이 아니라 한국화를 그린 것이며, 우리나라에 토착화된 불국토를 그린 것이다.
세상은 실경과 진경으로 나뉜다. 실경은 현실의 풍경이고 진경은 마음, 꿈, 이상의 풍경이다. 산수화는 산이나 강, 바위, 나무 따위를 그렸지만 반드시 자연풍경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집이나 인간이 만든 도구, 교량, 마차 따위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대부분의 산수화는 진경이다. 아니 모든 미술작품은 진경을 표현한다. 그림은 언제나 현실을 바탕으로 이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경과 진경을 구분하는 것은 현실과 이상의 관계 때문이다. 현실에 만족하면 실경이 힘을 얻는다. 반대로 꿈이 절실하면 진경을 선호한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가까운 표현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상당히 정치적인 그림인데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이다. 조선을 건국한 후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국가체계가 완성되고 국정운영의 자신감이 투영된 이상적인 그림인 것이다. 사람으로 친다면 20대의 자신감이 넘치는 장밋빛 미래상이다.
조선 중기의 미술은 대략 실경과 진경이 혼합된 상태였을 것이다. 어떤 때는 실경을 중심으로 한 진경이, 어떤 때는 진경을 중심으로 한 실경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나타났을 것이다. 이 시기 미술의 흐름에서 진경은 산수화를 중심으로, 실경은 새와 나비, 대나무와 포도, 화초와 같은 세부적인 사물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18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이 전성기이다. 모든 미술작품이 진경이지만 실경과 진경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그림이 정선의 진경산수화이다. 현실성이 부족한 청년의 진경과 달리 중,장년의 무게 있는 현실과 손에 잡히는 꿈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 것이다.
1850년대 이후 조선은 쇠락해 간다. 유학의 가치는 무너지고 정치는 혼란하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든다. 선비들도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시기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추사 김정희 훈구학파가 득세를 하고 작은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탐미적인 남종산수화,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진경이 판을 친다. 늙은이의 전형적인 모습과 닮았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실경과 진경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 걸맞은 미학과 소재, 화면구도, 표현기법 따위의 독창적인 화법이 드러나야 한다. 바위나 나무를 그리는 방법, 산이나 강물 따위를 표현하는 독특한 형식의 붓질과 기법, 채색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조선의 풍경이 곧 이상세계가 될 수 있다는 미학이 있었다. 이는 개인 화가가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외교관계와 정치지형이나 역학과 관련이 있다. 또한 조선의 풍경은 중국의 풍경과 다르기 때문에 표현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바위와 나무가 다르고 강과 산이 달랐다. 중국풍 그림에서 표현하는 모호한 안개나 구름은 사라졌고 그 공간을 촘촘한 붓질로 채웠다. 암산(巖山) 중심의 [몽유도원도]와 달리 암산(巖山)과 숲으로 채워진 토산(土山)이 어우러진 조선의 지형을 조화시켜야 했다. 먼 산을 표현하는 구도와 가까운 산을 표현하는 구도는 전혀 다르다. 금강산은 아무리 높은 곳에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풍경이기에 낱낱을 결합하는 새로운 구도법이 필요했다. 가로로 길거나 세로로 높은 그림이 아니라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구도를 잡은 것은 금강산 전체를 하나의 화면에 구현하기 위한 탁월한 구도인 것이다.
겸재 정선은 풍부한 이론을 공부하고 정치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선비 출신이었으며 동시에 영조의 총애와 후원을 받았던 왕의 화가였다. 또한 80세의 나이에도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수많은 창작을 통해 기법이나 표현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동서양의 화가들은 타고난 재능, 재력, 권력의 후원, 엄청난 양의 작품, 화단세력의 형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무엇보다 세상의 흐름을 읽고 예견할 수 있는 지적능력과 탁월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숱한 화가들이 실경과 진경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이런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완성되었고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조선 산수화’란 이름으로 부르며 수용하기도 했다.
이 땅의 현실과 꿈을 조화시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남북으로 분단된 가혹한 현실은 미래의 꿈을 가로막는다. 정치세력에 따른 미학도 엇갈리고 꿈도 제각각이다. 늙은 화가들은 탐미주의에 빠지고, 중장년의 화가들은 자본과 결합해 먹고 살기 급급하다. 이것이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소중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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