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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묵상글 들 (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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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 독서는 즈카르야 예언서인데
여기서 하느님은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그러니까 엠마누엘 하느님이요 육화의 하느님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때 이미 육화의 하느님 곧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은 계속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분이라고,
그러니 예수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을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느끼며 살아갑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제 생각에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중 하나는 다른 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어디 특별한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찾는 것을 실패할 때
우리는 여기서 찾는 노력을 더 하기보다
하느님은 다른 어디 특별한 곳에 계신다고 눈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지금 스쳐가는 바람결에도 계시고,
꽃에도 계시며 돌멩이에도 계시고 심지어 길바닥에 뒹구는
종이쪼가리에도 계신다고 프란치스칸들은 얘기하지 않습니까?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표가 못 되고 은총이 아닙니까?
매일 해가 떠오르니 우리는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고
해가 십자가 모양을 할 때만 기적이라고, 하느님의 표징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해가 뜨는 데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인간이 한 것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하셨다는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진정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몰라 보기 때문인데
이 또한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엠마누엘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그러니까 관계 안에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형제를 밀어내어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 관계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런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할 때만 보이고,
나와 같이 있는 형제가 나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할 때만 보이는데
나와 같지 않다고 나와 같이 있는 것을 거부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 안에 계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제 기억이 정확하지 모르지만 <사막의 교부들>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수도원에 형제들 간에 사이가 너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유명한 수도승이 찾아 와서 이 수도원 형제들 중에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얘기를 하고 떠났고 그때부터 수도자들은 서로를 주님처럼
생각하고 사랑케 됐고 그래서 형제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았다지요.
우리도 지금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현재적으로 만나고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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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며,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사막의 마카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 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곧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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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귀담아들어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가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미룰 수 없는 사람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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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9,45)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국에 파견하셨고, 이로 인해 쫓겨난 마귀들과 치유된 병자들로 인하여 예수님의 명성이 전국에 퍼져서, 헤로데 영주까지 놀라워하는 가운데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게 빵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선포 활동의 성공은 그 성과 때문에 십자가 수난을 가져올 것이었습니다.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에 다가오는 십자가 수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일이 지닌 역설적인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수난을 예감하시고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박해를 받게 되어 예기치 못하게 수난을 겪게 된 조선 천주교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조선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성직제도가 운영되면서 활발하게 교세를 키워나가던 참에 갑자기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창립의 주역이던 이벽은 문중박해를 받아 곡기를 끊어 세상을 떠났고, 첫 세례자 이승훈은 배교와 자수를 거듭하다가 치명했으며, 정씨 삼형제 가운데 약종은 치명했고 약전과 약용은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첫 사제 김대건은 입국한지 여섯 달만에 체포되어 치명했고, 4년 후 들어온 최양업은 김대건의 뒤를 이어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교리를 가르치기를 12년 만에 길에서 선종했습니다.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은 아들을 사제로 키웠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치명했고, 그 어머니 이성례는 옥중생활 중에 젖먹이가 굶어죽은 참담한 지경을 당하자 잠시 치명을 미루었다가 자수하여 치명하기도 했습니다. 서양 선박을 불러 들여서라도 이 끔찍한 박해를 멈추어 보려던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 아내인 정난주는 제주로 유배를 당하여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다가 선종하여 제주도 주민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우리 신앙 선조들은 제각기 다른 양상으로 수난을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미리 알았던 사람은 없었고, 더욱이 박해가 백 년씩 지속될 줄은 다 몰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감할 수 있었던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셨던 예수님처럼, 우리 선조들도 수난을 당해 죽기 전에 이미 복음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죽기 전에 미리 살아간 부활신앙입니다. 이것이 그 선조들이 우리 후손들의 삶과 신앙과 기억 안에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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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어떤 사람에게 한 물체를 보여주면서 평면적으로 보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이라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물체를 보여주면서 역시 평면적으로 보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각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원’이고, 다르게 보면 ‘사각형’으로 보이는 것이 어디 있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이 물체를 본 사람에게 잘못 본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원통’이었습니다. 이 원통을 위에서 보면 ‘원’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으로 보이지요. 원도 제대로 본 것이고, 사각형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다양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 사각형, 마름모, 별…. 그 모든 모습을 가진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삶도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나의 삶도 또 다른 이의 삶도 모두 인정받아야 하는 삶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 생각과 시각으로만 다른 이의 삶을 또 나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좌절과 절망의 삶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삶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양성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가장 멋진 삶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당시 사람이 쓰던 아람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뛰어난 학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단어를 썼기 때문일까요? 당연히 모두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자기 생각과 시각으로만 주님의 삶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지요. 더군다나 제자들이 본 기적만 봐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수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짓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 분명한데, 정말로 그러겠냐는 의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살기 시작합니다. 즉,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용기 있게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합니다.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주님이심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님의 뜻에 순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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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람을 치료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칼 메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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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안 돼요.
언젠가 새벽 묵상 글에 썼었던 기억이 나지만 다시 한번 적어 봅니다. 이런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본당 교우들이 환자 방문을 하러 갔습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찾아간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 환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교우들을 이끄는 대표 격인 반장님이 자유 기도를 바치는데 자꾸 말을 더듬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입니다. 아무튼 어렵게 기도를 마쳤고, 기도 후 이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기도가 안 돼요.”
기도 안 되는 것이 그 집 탓일까요? 자신이 버벅거리고 횡설수설한 것을 왜 남 탓으로 돌릴까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뜨거운 물에 손을 넣으면 얼른 빼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들의 잘못된 생각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자기들의 이기심과 위선을 숨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자기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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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코로나가 심각하게 번져나갈 때입니다. 병원마다 중환자가 가득했습니다. 사망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도 중단되었고, 식당도 문을 닫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캄캄한 동굴을 불 없이 걸어가는 것 같은 공포였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두려움과 공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백신이 나왔고, 치료제도 개발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퀸즈 성당의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코로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앞으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두렵다고 운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안전운전하면 자동차는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누워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의 소리에 눈을 뜨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당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더러는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함께 있을 겁니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세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사실 저도 걱정과 두려움은 있습니다. 본당과 교구청에 있으면서 재정적인 걱정은 없었습니다. 본당에서는 교무금과 헌금이 있었고, 교구청에서는 예산이 책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나 교구청에서나 주어진 일을 기쁘게 하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몇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기 때문에 구독자의 수가 점차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간 신문이기에 배송이 늦어지면 몇 주씩 신문을 받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홍보를 나가서 구독자 수를 늘려야 하는데 코로나로 2년 가까이 홍보를 못나갔습니다. 미국에서 함께 했던 가톨릭신문이 작년에 신문사 운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믿으며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습니다. 1달 전에 퀸즈 한인 성당에 홍보도 시작하였고,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의 화답송도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작은 볼 꽃이 있으면 어둠은 걷히기 마련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두려움과 걱정의 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또 다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리라는 희망으로 힘차게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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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삶의 여정
-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
가을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열매 향기는 더 좋습니다. 한없이 깊고 그윽하며 푸근합니다. 찬란한 일출日出도 좋지만 평화롭게 빛나는 일몰日沒은 더욱 깊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일몰같은 노년에 죽음이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일출 사진도 좋았지만 일몰시의 장면도 좋아 사진에 담아 나눴습니다.
“노년의 일몰도 이렇게 멋지길 소망합니다!”
“아멘! 잘 살아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신부님을 보면서
곱고 맑은 삶, 조용하고 아름다운 삶을 배웁니다.“
어제 미사신청한 분의 메시지 일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남의 일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년을 생각하게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빠 내외분과 어머니를 위해 미사봉헌합니다. 오빠가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힘들다고 요양원으로 보낸다고 하네요. 그러지 않고 다른 길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본인은 원치 않고 있습니다.”
어제 마침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 교사였던 분으로부터 함께 따르던 선배 교사가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도 충격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일몰같은 노년을 맞이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젊음보다도 아름다운 노년과 죽음입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개신교 목사님의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즉각적인 대답에 흡족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제 서원 50주년을 맞이하는 70대 중반의 수녀님으로부터 책과 더불어 선물로 받은 글 서두가 생각납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주님, 찬미받으소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영원에서 지음 받아 영원 향해 달겨가니, 남는 것은 감사뿐! 수도서원 50주년, 주님 기쁜 일 베푸시니 함께 살아 준 모든 이들 천번 만번 감사해요!”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맺는,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로 하느님 창공을 날다가 끝맺는 인생이면 참 보람있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어제 23년만에 피정온 자매님이 보관해온 말씀 처방전을 보니 감개무량했습니다. 30대 초반이었던 분이 50대 중반의 중년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1998,2,21-부활대축일까지
마르타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13,7)
아마도 어려움에 대한 처방으로 사랑의 약을 제시했던 것 같습니다. 즉시 23년 동안 자매님이 살아온 삶을 격찬激讚하면서 즉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처방전으로 써드렸습니다.
“2021.9.24-10.30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마르타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어제 끝기도후 잠시 주방에 들렸다가 식단 메뉴 메모지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70대 중반의 주방장 수사님이 일주일간 짜놓은 식단 메뉴지에 글짜가 빼곡했습니다. 끝까지 자기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노년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 했습니다. 요즘 푸른 하늘과 산을 배경한 성전 사진은 거의 매일 찍다 싶이 합니다. 산 배경이 되고자 싶은 소망에 어제 쓴 글입니다.
“단 하나의 소망,
이건 하늘님도 아신다
바로 산 배경이 되고 싶은 거다
조용히 뒤로 물러나, 높이 앉아
모두를 품에 안고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산 배경이, 사랑이 되고 싶은 거다.”
산 배경과 같은 아름다운 노년인생을 사는 것이 단 하나의 소망입니다. 가을철입니다. 철이 나라 봄-여름-가을-겨울의 사철입니다. 가을철이면 생각나는 인생여정중 가을인생입니다. 참 자주 묵상자료로 나눴던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입니다. 제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니 오후 4시, 일년사계로 압축하니 초겨울로 드러나는 현재의 시점時點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인생여정중 어느 시점에 위치하고 있는지요? 이런 묵상이 삶의 환상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깨어 단순소박한 아름다운 본질적 삶을 살게 합니다. 이래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도 있고, 베네딕도 성인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합니다.
어떻게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본질적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희망과 죽음에 대한 묵상이 답입니다. 희망이 최고의 명약名藥입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참 힘은 희망의 힘, 기쁨의 힘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약의 처방도 희망뿐입니다. 살아갈수록 색깔 바래지는 희망이 아니라. 색깔 짙어지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이래야 우울증이나 치매에 걸리지 않습니다. 생생한 희망이 깨어 있게 하며 더불어 찬미와 감사, 기쁨의 삶을 살게 합니다. 희망이, 꿈이 사라지면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과 더불어 불안과 두려움, 우울증과 치매입니다.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성규4,74)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수록 더욱 깊어지고 빛나는 희망입니다. 이래야 아름다운 일몰같은 노년 인생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의미는 한없이 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하신 일에 놀라는데 예수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태양처럼 자리하고 있는 예수님이심이 너무 분명합니다. 날마다 죽음을 예견하면서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면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사셨을 예수님이십니다. 아직 무지에 눈먼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했고, 그 말씀에 대해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얼마전 산상에서 변모체험후의 예수님이기에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이 내면에서 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희망의 태양이신 하느님과 늘 함께 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명약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부활의 희망, 파스카의 희망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하늘 나라의 꿈과 희망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일하는 여민관與民館을 아십니까? 예전의 위민관爲民館과의 대조가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에 뿌리를 둔, 민초들과 ‘함께(with)’ 한다는 뜻의 여민관은 민초들을 ‘위한(for)’ 위민관보다는 예수님 생각에 가깝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보다는 우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예언자 즈카르야입니다. 바오로의 옥중서간이 희망과 기쁨으로 빛났듯이 유배후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과 기쁨으로 빛나는 즈카르야의 예언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삶의 자리를, ‘딸 시온’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 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이 그날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름답고 희망에 넘치는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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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반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43-44)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마, 치유의 기적들에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열광합니다. 의료적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은 물론 민족적 자유와 해방에 목마른 이들이 그분의 존재와 행위에 희망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스승에게 쏟아지는 이런 호평으로 으쓱할 새도 없이 엄청난 반전을 직면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들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충격에 가까울 터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이 말씀이 두 번째 수난 예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들의 귀와 마음은 막혀 있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들었다 해도 쉽게 망각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니, 뭔가 불길한 예감마저 전혀 없었던 건 아닌 듯 보이지요.
사람들의 경탄과 사람들의 배척,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사실 지척입니다. 그 사이가 아주 멀기를 바라는 건 그 명예와 영광에 기대어 한 자리 차지하고픈 욕망에 들썩이는 제자들 사정일 뿐이지요. 오히려 당시자 예수님에게서는 그 둘 사이에 경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을 떠받드는 영광에도 무심하고, 당신을 사정없이 내치는 공격에도 초연하시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모습이 열립니다.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어 주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13)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그들의 민족적 정통성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장소였지요. 그런데 유배 후 돌아와 다시 재건되는 예루살렘이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는다고 하니 이 또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반전은 하느님께서 이 도성이 혈연과 할례, 율법으로 구분하는 경계를 넘어서는 만민의 성소가 되길 바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불 벽"
물리적 돌로 이루어진 성벽을 없애고 활활 타오르는 불로 도성을 둘러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적 생각으로야 불이 둘러싸면 더 접근이 어렵지 않나 오해할 수 있지만, 이 불은 영의 불길, 곧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은 구분하고 선 긋고 갈라내는 힘이 아니라, 잇고 일치하고 포용하는 기운이십니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예루살렘은 누구나 서로 넘나들며 너나 할 것 없이 소통하고 연결되고 하나 되게 하는 영으로 둘러싸일 것이고,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 머무르실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반전의 연속일 겁니다. 기쁨과 슬픔, 행운과 사고, 만남과 이별, 희망와 실패 등등 늘 좋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늘 힘들기만 하지도 않은 게 우리네 삶이겠지요. 그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는 무너지기도 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일어나 성장하며 단단해져가는 중입니다.
자신이 구분해 놓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성벽처럼 경계를 만들고 묶이게 되면, 어차피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그 파도에 시달려 일희일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심에 주님께서 계시고 구분의 성벽이 영의 불길로 바뀌면 많은 게 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규정해 놓는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건강과 질병 등의 결과론적 구분이 성령 안에서 새로이 질서잡힐 테니까요.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수난을 함께 사랑하고 껴안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행복과 고통을 함께 받아안을 힘 또한 얻으시길 바랍니다. 성령께서 구분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태워 없애 주시고, 주님 안에서 하나로 아우를 내공을 주실 겁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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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어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전했는데, 오늘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사화에 이어지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전합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앞에 있는 고통이 감추어져 있고,
고통 뒤에 있는 부활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이며, 또한 '수난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메시지입니다.
한마디로 '고통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고, 부활 없는 고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 앞에서도 무너지지 말아야 하며, 기쁨 속에서도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즈카르야 예언자가 전하는 오늘 독서는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된 후 새로 건설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2,9.14)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머무시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이며, '내 마음 한 가운데'라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를 잘 마련해 놓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합시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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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주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고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기에 듣고는 있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주님의 부재는 물론이요 그분의 수고와 수난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시어,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이행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표현을,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 방식만을 고집하고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그가 한 말의 뜻을 알아 가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전한 사랑의 방법, 인류 구원의 방법을 끊임없이 들려주십니다. 내 방식과 판단을 잠깐 접고, 상대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면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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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주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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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길지 않는
삶의
시간 동안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들 삶이다.
고통과
아픔 없이
삶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삶의 완성은
분명
십자가이다.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충돌한다.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화해하고
만나게된다.
날마다
사람의 아들을
사람들의 손에
넘기는 이는
바로 교만한
나 자신이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자신을
보게된다.
복음은
예수님의
눈에 비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삶은 구원을
간절히 원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우리가 넘기는
말도 안되는
모순이다.
건너뛸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사랑은
넘겨져도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는
주님이시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참된
희망이 된다.
끊임없이
내려놓고
배우는
삶의 시간이다.
끝내 드러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 여정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빼 놓고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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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자본의 힘이 점점 막강한 위력을 떨치게 되면서 사람들은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는 자본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온갖 편의주의와 쾌락주의가 일상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성생활에서도 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단시간에 기도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며, 일시적인 기부나 봉사로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땀 흘리고 공을 들이지 않고 고귀한 것, 거룩한 것을 얻겠다는 발생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이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준비하도록 또다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모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온갖 일에 탄복하고 있었습니다(9,43). 이로써 예수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뚜렷한 구별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탄복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9,44)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수난 예고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 관해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9,45). 이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고난을 겪으셔야 한다는 사실은 제자들조차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신비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동행하면서 보고 체험한 그분은 결코 실패하거나 고통을 받으실 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실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지금껏 병자를 고쳐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권위 있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처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메시아의 실패를 원하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을 좇거나 더 큰 기적들을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넘겨주시는 분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 처형이라는 방법을 통해 구원을 계획하신 분도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9,44)라는 말씀에서 ‘넘겨질 것’이라는 수동형의 표현은 인류 구원 계획을 주관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 모두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온갖 편리함 속에서 신속성과 간편함, 효율성을 추구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젖어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지 않고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과 일치에 이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시련의 터널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어둠 속에서 부활의 빛을 볼 수 있도록 늘 마음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떼서는 수난 예고를 통해 일상에서 체험하는 고통과 시련, 좌절과 실패, 아픔과 슬픔을 수난하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견디어냄으로써’ 부활의 기쁨, 인생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일이나 대인관계, 사회문제를 통해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과 고통 모두가 나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내 인생의 터널임을 새기는 복된 날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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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은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2019년 9월 28일
하까이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루 귀환해서 성전재건 운동을 벌일 때 즈카르야 예언자도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까이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 주었다면 즈카르야 예언자는 성전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성전파괴와 바빌론 유배를 이스라엘의 죄악과 연결시키며 회개를 촉구하며 성전재건을 독려합니다.
종말론적인 문학적 표현인 환상을 통하여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약속의 실현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측량줄을 쥔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을 그 너비와 길이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저자와 이야기 하는 천사가 앞으로 나가자 마주하는 다른 천사가 말합니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8-9)
미래의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르고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많은 민족이 하느님과 결합하여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분께서 그들 한 가운데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사람은 개인차는 있겠지만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고 하지요?
많은 것이 주위에 펼쳐지지만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 식대로 알아듣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객관적인 같으면서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그것이 마치 전부인 양 말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때 그때의 조건에 따라 주관적인 것이 강하게 우리를 지배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신중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루카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설령 제자들이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해도 스승께서 사람들 손에 넘어 가신다는 말씀에는 풍기는 고통이 있기에 그들이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 감히 질문조차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아픈 것만큼 성장한다.’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누가 고통을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겪는 수모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큰 고통을 겪으셔야 하는데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며 당신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미사 전례에서 성찬 제정과 축성문 시작은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께서는 차근차근 당신의 길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용기를 내어 주님의 그 모범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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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쩔 수 없이 슬픈 운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스승,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슬픈 운명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메시아로 이 땅에 강림하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참혹한 십자가형 죽음에 처해질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예수님이셨습니다.
씁쓸하게도 한때 사랑했던 제자의 배반에 의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 그것도 무지막지한 악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프고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슬픈 운명이 그저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하셔야 할 분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닥을 친 다음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가십니다.
죽음을 물리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을 통해 원래 계셨던 가장 높은 곳으로 다시 올라가십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인류에게 손을 뻗으십니다.
영원히 사시면서 영원히 이 세상을 다스리실 운명을 지니신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운명은 파노라믹 운명의 끝판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장 해피엔딩 끝판왕의 운명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요 이정표로 삼고 이 땅위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슬픈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셨기에 이 땅위에서 우리의 운명 역시 슬픈 운명입니다.
그분께서 쓸쓸히 홀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은 그분의 그 큰 슬픔, 그 끔찍했던 고통이 오래가지 않아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듯이 오늘은 비록 우리가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지만 이 슬픔과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내하고 희망하다보면 언젠가 마치도 기적처럼 이 슬픔과 고통이 영광의 축제로 바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힘겨워하고 있을지라도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엄청난 박해와 손해를 보고 있다 할지라도 마냥 슬퍼해서만은 안되겠습니다.
때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할지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인생에도 밀물이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내 인생에도 반가운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삶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이 지상에서의 축복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치 전쟁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만 그 소나기 같은 총알 사이를 뚫고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려야겠습니다.
불완전함으로 가득 찬 이 육체와 영혼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슬픔을 친구처럼 옆에 끼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나약합니다. 고통과 십자가는 인생의 기본이요 양념입니다.
고통 없는 인생,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이 세상에서 기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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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을 사랑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반전매력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항상 그들의 생각을 뒤집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하고 돌아가셔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사람들'은 명확히 규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반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나요? 나를 믿나요? 나를 위해서 사나요? 부모가 없는 아이는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를 믿는 사람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조금 벗어납니다. 하지만 부모를 믿고 부모의 말을 따르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까요? 인간은 부모조차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인간이 인간을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넘겨져야 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세속-육신-마귀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더라도 이 욕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이상 이 욕구는 끊임없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돈과 쾌락과 교만으로 살아서, 세상 사람을 믿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살아도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우리나라 드라마 중 ‘오징어 게임’이란 것이 있습니다. 참가자 한 명당 1억씩 해서 456억의 상금을 걸고 생사를 오가는 게임을 자율적으로 선택해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렸습니다.
여기에서 이정재는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뒤부터 꼬일 대로 꼬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당뇨로 고생하면서도 월세를 위해 일을 하는 노모와 함께 삽니다. 아내는 이정재의 무능으로 이혼을 하여 다른 남자와 살고 있고 아이의 양육권도 아내가 가져갔습니다. 이정재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경마를 하며 어머니 돈까지 탕진합니다.
경마에서 간신히 딴 돈은 소매치기당하고 사채업자에게 쫓겨 신체 포기각서까지 씁니다. 아이 생일이라 치킨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땡전 한 푼 없어 간신히 떡볶이나 사주는 자신의 처지가 딱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유가 나타납니다. 공유는 돈이 잔뜩 든 가방을 열어 보이며 딱지치기를 해서 이기면 10만 원을 주고 지면 뺨을 한 대 맞는 게임을 제안합니다. 뺨을 맞으면서도 수십만 원을 벌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용돈도 몇만 원 드립니다.
공유는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명함을 줍니다. 처음엔 그저 뺨이나 맞는 게임인 줄 압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지면 무참하게 죽여버립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을 하며 반수 이상이 죽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투표로 이 게임을 더는 진행하지 않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모두가 돈이 없어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에 그들은 다시 게임장으로 갑니다. 이정재도 돈이 없어서 언제 장기가 적출될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당뇨 때문에 발을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월세라도 벌려고 일을 다닙니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한다고 남과 경쟁하여 남을 죽이면서 더 큰 이익을 얻게 되면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녀 때문에 더 돈 욕심을 내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웃을 위해 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생존본능에만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는 이기적인 성향을 벗어나기 위해 부모를 위해 삽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살 때 나의 이기심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결국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공부를 잘하고 성공한 자녀이기 때문에 계속 부모를 위해 살다가는 또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고에 다니던 어떤 공부 잘하던 학생이 공부를 잘할 때 엄마가 칭찬을 해주니 결국엔 전교 1등을 합니다. 하지만 성적표를 두고 ‘엄마 됐지?’라는 글을 남기고는 아파트에서 투신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는 것만이 나를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돈도 필요 없으시고, 쾌락도 원하지 않으시며, 겸손하신 분이라 우리가 세상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 사랑하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에서 자유롭게 되기에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주제는 그 게임을 만든 사람의 이 대사에 다 들어있습니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사람은 어차피 모두 돈에 집착하는 존재란 뜻입니다.
사람을 위해 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믿을만한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 때문에 하는 사랑이 아니고 단순한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모두 오염되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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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제자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면서도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면서도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도 듣고 싶은 말만 담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받을 것이란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에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당신의 말을 귀담아들으라 말씀하십니다.
귀에 담아두라는 말씀.
이 말씀은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언제가 자신이 가진 선입관이 무너질 때,
자신의 고정관념이 사라질 때,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아도 익히는 자세
깨닫지 못해도 자주 접하고 담아두려는 자세
그런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느님의 손길이 다가올 때 온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용없다고,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에
우리는 일상에서 꾸준히 하느님 말씀을 접하고 배워야 합니다.
태양이 떠있을 때에는 빛의 소중함을 모르지만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 빛에 대한 간절함을 깨달을 수 있듯,
오늘 하루를 보내며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매일 하느님을 알아가고 함께 하는 자세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큰 희망이 됨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과 함께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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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김대군 형제님.
독서, 복음서 주해
제1독서<정녕 내가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5-9,14-15ㄷ
5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손에 측량줄을 쥔 사람이 하나 있었다.
6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자, 그가 나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나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때에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앞으로 나가자, 다른 천사가 그에게 마주 나와
8 말하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9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사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리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내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즈카르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시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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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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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 양 모)
43절
43ㄱ절은 구마이적사화 끝에 으레 나오는 목격자들의 경탄이다. 명사 “위대함”은 신약성서에 두 번 나오는데, 사도 19.27에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위대함을, 2베드 1,16에서는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가리킨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9.43ㄴ-45는 마르 9,30-32를 옮겨쓰면서 더러 고친 것이다.
마르 9.30에서는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떠나 갈릴래아를 지나갔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라 한다. 루카는 이를 고쳐 “모두 예수께서 하신 온갖 일에 탄복하고 있을 때”라 한다.
44절
마르 9.31에는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입니다. 그는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는 예고를 덧붙였는데 루카는 그것을 삭제했다.
45절
“이 말씀(의 뜻이)그들에게는 가려져 있어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는 루카의 가필.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
가을이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면 추석이 지난 가을엔 하느님 말씀도 살이 쪄야 하는데 여짓껏 며칠간 매일미사책에 짧은 복음이 기록된 것을 보자면 ‘어허 그것참’한다. ‘그런데 나는 그날 복음서 주해를 올리는 자이고 다른 이들은 묵상글을 올리니 그렇잖아.’ 하면서 이럴때면 누가 누룩이라도 넣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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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제1독서(즈카2,5-9.14-15)
즈카르야는 하까이보다 성전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강조한다. 성전을 통하여 유다는 좋은 방향으로 완전히 변형되고, 세상은 이상향으로 바뀔 것이다.
제1즈카르야서의 저자는 이 변형을 여덟 개의 환시를 이용하여 묘사한다. 즈카르야서의 환시들은 성경 묵시 문학의 기초를 놓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오늘 독서는 세번째 환시(2,5-9)의 내용이 들어있다. 예언자가 직접 환시의 장면으로 들어간다.
예언자는 측량줄을 잡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데, 곁에 있던 천사가 다른 천사를 시켜 그 사람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준다.
그곳에 주민과 짐승이 너무 불어나서, 경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불벽이 되어 이 도성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있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2,7-9.14-15)
'내가 에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의 '불 벽'이 무엇일까? 불의 의미가 무엇일까?
창세기 3장 24절에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내쫓으시면서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히브리서 12장 29절에는 "우리의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십니다" (탈출24,17참조)라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외경과 두려움의 대상이며,초월적인 대상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접근하면 태워버리고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튼튼한 방어벽과 보호벽이 되어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예루살렘을 측량줄로 재는 세번째 환시는 에제키엘의 성전을 재는 환시(에제40-48장)와 아모스의 다림줄 환시(아모7,7-10)와 흡사하다.
세번째 환시가 끝나고 신탁(2,10-17)이 하나 끼어드는데, 주님께서 온 천하 사방에 흩어진 당신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시온과 백성 가운데에 머무르시어 이스라엘을 온전히 회복하실 것임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4)
즈카르야서 2장 14절은 이미 즈카르야서 2장 10절에 나온 말씀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즈카르야서 2장 10절 이하 13절에서는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할 것과 선민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의 회복 및 주님께서 임재할 것이 예언된다.
그 가운데 서두에 나오는 즈카르야서 2장 10절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가 다 끝나고, 그들과 하느님이 원래 처음 맺었던 계약의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시온의 딸'로 번역된 '치욘 빠트'(tsiyon bath; O Daughter of Zion)는 구약의 관점에서는 예루살렘 성읍의 거주민들을 지칭하고, 신약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해 준 메시지 안에(루카 1,28.30.31~33.49.54~55)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환한 후에 예언자 즈카리야(즈카 2,14-15; 9,9-10), 스바니아(스바 3,14-17), 요엘(요엘 2,21-27)이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신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도시('시온의 딸'이라 불리우는 도시)는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기뻐하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토록 기뻐해야 하는 동기는 유배의 어두운 시기 가 지난 후, 하느님께서 재건된 성전 안, 성도 한 가운데에 거처하러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있다.
두려움에 떨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들의 왕이고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실제로 마리아를 '시온의 딸'로 묘사하려 하였다.
복음사가의 눈에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의 인격안에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종합한다.
온 이스라엘이 동정녀 마리아안에 총괄된다. 동정녀 마리아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훌륭하게 나타낸다. 나자렛의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앞서 실현하셨다(루카1,49ㄱ.54-55참조).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이유 접속사 '키'(ki; for)로 시작하는 본문은 왜 시온의 딸이 노래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새 성경에 단순히 '정녕 내가'로 번역된 '힌니'(hinni)는 문자적으로 '보라 내가'라는 의미이며, 이 예언을 읽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장차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에 머무를 것이다.
'머무르리라'에 해당하는 '웨샤카느티'(weshakanthi; I will dwell)의 원형 '샤칸'(shakan)은 어원상 여행자가 장막을 쳐서 머무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창세9,27; 탈출25,8; 여호18,1).
본문에서 이 단어는 단지 얼마 동안 임시적으로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장막을 치시고, 그들과 함께 거처할 것임을 나타낸다.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카타스케노소'(kataskenoso)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장차 종말의 날에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 하느님께서 친히 장막을 치시고, 그의 구원받은 백성들과 거처하실 것을 예언하는 묵시록 21장 3절의 내용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묵시21,3)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는 표현은 애초에 히브리 민족을 계약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베푸셨던 계약의 본질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계약의 기본 내용이었다(탈출6,7; 레위 26,12).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의 효력을 결코 중단하거나 계약을 폐기하시는 법이 없다.
비록 바빌론에 의한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해 그 계약이 중단되는 듯이 보였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다시 고향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성전 역시 재건하게 하셨다.
그리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근거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계약의 백성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게 하셨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의 백성들 가운데에 친히 임재하셔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그들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3ㄴ-45)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추어진 진실?
(판관2,12-14)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는 풍요의 신이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 하느님은 죄를 지은 그들을 죽음(시련)에 넘기신 것, 아니!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어?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원칙이며 정의, 규정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그 죄의 존재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판관기는 이집트(세상)의 노예생활에서 구출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았던, 곧 세상으로부터 구출되어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말씀)을 받은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시련에 빠진 그들이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 판관을 세우시어 원수들에게서 건져, 평온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또 죄를 지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곤 하였다.
(판관6,1) 1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곱 해 동안 미디안족의 손에 넘겨 버리셨다.
= 그들이 또 부르짖으면 또 판관을 세워 원수를 물리쳐 주셨다. 그렇게 그들은 12판관이 다 있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우상을 섬겼다.
판관기는 계속 인간들의 죄와 하느님의 용서, 그 이야기인 것이다. 인간들이 하느님 당신만을 바라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당신 (사랑)만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찾으시기 위한 것이다.
(판관21,25) 25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
= 판관기 마지막 장,절이다. 끝까지 임금, 곧 왕이신 주님의 뜻, 그분의 길이 아닌 자신들의 뜻인 사람의 길로 살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똑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로마1,20-32참조)
그렇게 끝까지 고집부리는 그 인간들에게 구원자는 필요했다. 그래서 판관기 다음 룻기에서 보아즈(구원자)가 나오고 그가 아들 오벳을 낳는다.
(룻기4,22) 22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
= 오늘 예수님께서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간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려고 그 인간들의 죄로 팔아 넘겨지시는 것이다.
(로마4,25) 2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다.
(루가10,22)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 하느님을, 그분의 뜻을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감추어져 있기에~~~
그래서 성령을 찾고,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그리스도교란 나의 환경을 바꾸어 평안을 얻어내는, 곧 나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만사형통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예수님(말씀)이 자꾸 확인됨으로 내가 변하는 것, 곧 내 생각이 바뀌는 것, 버리는 것이다.(마태16,23-27참조)
그래서 하늘을 담아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이다.
(코헬1,3. 14-15)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14 나는 태양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았는데 보라,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 15 구부러진 것은 똑바로 될 수 없고 없는 것은 헤아려질 수 없다.
*하늘아래 땅, 그 세상의 모든 것은 없음이다. 아멘~!!!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9,43ㄴ-45)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4)
루카 복음 9장 44절의 '이 말'에 해당하는 '투스 로구스 투투스'(tus logus tutus; these sayings)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말'에 해당하는 원문은 복수형이고, 희랍어 지시 대명사는 바로 앞의 내용을 받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루카 복음 9장 43절에서 찾아야 한다.
한글 새 성경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라고 전한다. 말하자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사람들의 놀란 말들'을 뜻한다.
풀이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인해 놀라서 떠들어대는 이 사람들의 소리를 잘 기억해라. 왜냐하면(gar; '가르') 내가 바로 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넘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한탄하고 계심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단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게 될 것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신의 말씀과 영적을 보고 '하느님의 위엄'이라고 할 정도로 따랐던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들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몸을 내놓으셔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더 예수님을 상심케 했을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9장 43절과 44절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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