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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1) 성령의 선물과 참된 행복(I-II, qq.68-70)
진복팔단, 성령의 열매로 미리 맛보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
현대 사회는 정치, 이념, 세대, 젠더 등 다양한 층위에서 극심한 양극화와 분열을 겪고 있다. 특히 온라인의 정치적 공간에서는 상대를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특정 진영의 대표나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며 분노와 혐오를 쏟아낸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라고 주장하는 세상은 성공, 쾌락, 안락을 행복의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며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주신다.(마태 5,3 이하 참조)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자비로운 사람들’ 또는 ‘온유한 사람들’, 더 나아가 ‘슬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진복팔단(眞福八段)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적인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2부 제1권 제68-70문을 통해 이러한 진정한 행복들이 인간의 단순한 노력을 넘어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통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실재하는 행복임을 역설한다. 오늘의 불안과 분열 속에서 신자들이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맛보는 길을 살펴보자.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우리 안에 어떻게 싹트는지 설명하는 열쇠로 본다. 따라서 그는 각 진복을 특정 선물과 연결 짓는다. 예수님이 산 위에서 진복팔단을 가르치신 모습을 표현한 칼 블로흐의 <산상 설교>. 위키미디어
본성의 한계를 넘어 성령의 이끄심으로
인간은 이성의 판단과 주입된 덕(대신덕)을 통해 본성적인 목적에 도달하려 노력하지만, 자연본성을 넘어서는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비록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신학적 덕, 즉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 주입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이라는 초자연적 목적을 향한 질서를 확립하는 데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대신덕은 우리 영혼을 직접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향해 정위시키는 시작일 뿐이다”라고 강조하며, 인간적인 이성의 숙고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함을 지적한다.(I-II,63,3,ad2)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의 선물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활동과 격려에 잘 따르도록 만드는 내적 준비이다.(I-II,68,2) 이는 우리가 단순히 자신의 의지로 고통을 견디거나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신비로운 충동(instinctus)을 온순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초자연적인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성령의 선물은 이성의 결함을 보완하고 우리를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으로 완성시킨다.
영혼을 완성하는 성령칠은과 참된 사랑의 질서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인간의 인식 능력과 욕구 능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준비시킨다. 토마스는 이사야서 11장(2-3)에 따라, 사변 이성을 위해서는 통찰(깨달음, intellectus)과 지혜(슬기, sapientia)를, 실천 이성을 위해서는 의견(깨우침, consilium)과 지식(앎, scientia)을, 그리고 욕구 능력을 위해서는 용기(굳셈, fortitudo), 효경(공경, pietas), 경외(두려워함, timor)를 배치한다.(I-II,68,4)
특히 지혜의 선물에 대해 그는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키며, 마치 맛보는 것처럼 하느님을 아는 일종의 인식을 준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단순한 지식을 넘어선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임을 밝힌다.(II-II,45,2) 통찰은 신앙의 진리를 깊이 꿰뚫고, 의견은 실천적 분별을 돕는다. 굳셈은 두려움 속에서도 선을 지속하게 하고, 효경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공경을 불러일으키며, 주님을 경외함은 피조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을 떨쳐 버린다.
이러한 선물들은 모두 참된 사랑(caritas)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지식과 통찰의 선물은 고통을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바라보게 하며, 용기의 선물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게 한다. 오랜 병간호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평화를 유지하며 ‘참된 사랑을 배우는 학교’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힘은 바로 이러한 성령의 선물들이 영혼 안에서 작용한 결과이다. 이처럼 성령의 은혜는 인간이 수행하면서도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하느님 나라의 열매와 행복
성령의 선물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토마스는 이를 “성령에 따라 행하는 행위들 가운데 특히 달콤한 기쁨을 동반하는 것들”로 정의한다.(I-II,70,1) 토마스는 성경(갈라 5,22-23; 묵시 22,2)을 토대로 (참)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온유, 성실, 신의, 절제(절도), 자제, 정결의 열두 열매를 열거한다.
열매는 단순히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덕행을 통해 얻게 되는 완성된 기쁨이며,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맛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I-II,70,2) 비록 궁극적인 완성은 내세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열매들은 신자가 여정 중에 경험하는 목적지의 안식과도 같다.
진복팔단 역시 미래에 대한 약속일뿐만 아니라 성령의 선물에 의해 형성된 행위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모습이다.(I-II,69,1) 토마스는 은총으로 시작되는 행복은 “완전한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참행복의 시초일 수도” 있다고 말하며, 현세의 삶 안에서도 지복직관의 시작 단계가 존재함을 분명히 한다.(I-II,69,2)
토마스는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우리 안에 어떻게 싹트는지 설명하는 열쇠로 본다. 따라서 그는 각 진복을 특정 선물과 연결 짓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함의 선물로,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의지하는 태도이다. ‘온유한 사람들’은 굳셈의 선물로, 분노를 이기고 부드러운 강인함을 드러낸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효경의 선물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돕는다.
가령 온라인 논쟁에서 상대를 적으로 보지 않고 형제자매로 대하며 온유함을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은 당장의 승리보다 더 깊은 내면의 자유와 평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이 바로 ‘공격보다는 자비를, 지배보다는 온유를 선택했을 때 맛보는 행복’이며,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구체적인 복음의 초대이다.
토마스의 성찰은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성령의 어느 선물을 통해 어떤 진복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일상을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수 있는 장소로 바꾼다. “성령님,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8) 행복을 위해 피해야 할 사랑의 왜곡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은 변질되기 쉬워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행복을 꿈꾼다. 그렇지만 사랑의 시작이 반드시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불행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 3년간 대한민국에서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범죄 신고와 검거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를 잡았다. 많은 여성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로에게 호감으로 시작되었던 만남이 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사랑의 다양한 단계를 이해함으로써 그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사랑의 단계와 내포된 위험
사랑의 첫 단계는 상대를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능숙하게 자신의 욕구(특히 성적 욕망)를 충족시켜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처럼 상대를 단순한 도구로 여기고 피상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다음 단계는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단계다. 사랑에 빠졌다는 감정, 상대에게 사로잡혔다는 느낌, 상대에게 의존하는 경향 등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외적 매력에만 의존하다 보니 상대방의 매력이 사라지거나 더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 역시 금세 식어버린다. 사람의 취향 또한 변하기 마련이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언제 식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내재한다.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의 단계에 이르면 상대의 외적 조건을 넘어서 내면과 본질적인 면모, 즉 인격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바로 당신이기에 사랑한다”는 단계이며, 여기서부터 진정한 결합과 존중의 관계가 형성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원인으로 선, 인식, 유사함에 대해 설명한 이후에, 곧바로 이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결과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것 사이의 합일”이라면서 사랑하는 이들은 공동생활, 대화, 상호작용 등 다양한 방식의 ‘감정적 합일(unio affectus)’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금슬 좋은 부부였던 성 요아킴과 성 안나의 모습을 그린 지오토 본도네의 <황금문 앞에서의 만남>. 위키미디어
참된 사랑의 결과: 합일, 내속, 무아지경
토마스는 “사랑의 결과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것 사이의 합일”(I-II,28,1)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구절로 사랑의 합일을 강조한다. 다만 토마스는 사랑하는 이들은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가 소멸될” 실체적 합일이 아니라 즉 공동생활, 대화, 상호작용 등 다양한 방식의 ‘감정적 합일(Unio Affectus)’을 추구한다고 본다.
사랑이 발전하면 ‘내속(Inhaesio)’의 경지에 이르는데, 이는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 속에 있고, 반대로 사랑받는 자도 사랑하는 자의 ‘삶의 중심’에 깊이 들어오는 단계다.(I-II,28,2) 우리의 정신과 기억 속에 사랑하는 대상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그 대상이 삶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황폐함을 겪는다.
더 나아가 ‘무아지경(Extasis)’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모든 정신이 상대에게 몰입되어, 완전히 자기 외의 존재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I-II,28,3) 사랑하는 친구의 슬픔이나 행복이 곧 나의 것이 되고, 우정의 사랑에서는 상대를 위한 선이 곧 자신의 선이 된다. 이처럼 사랑의 깊은 단계에서는 자기 존재와 타인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것이 심화되면, 상대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고통이 된다고 해도 곧 자기의 행복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왜곡과 불행의 원인
그러나 이런 깊은 합일과 자기초월이라는 결과만이 사랑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때로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사랑의 처음 두 단계에서 보이는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사랑은 치명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랑은 나눔이나 공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폭압적이고 소유욕에 의해 움직인다. ‘질투’(Invidia)는 강렬한 사랑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인데, 사랑의 강도에 비례해 사랑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한다.(I-II,28,4) 이런 태도는 결국 폭력과 불행을 낳는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성의 상품화’, ‘성적 사랑에 대한 탐닉’, ‘관계의 도구화’ 등이 더해져 사랑이 오히려 혐오와 파괴, 자기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욕구, 자기를 희생한다는 이기주의적 열망 등이 문제를 심화시킨다. 스토커나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은 자신의 집착, 독점욕, 폭압적 감정마저 사랑으로 오해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상대의 인격과 고유성을 존중하지 못한다. 더욱이 부적합한 대상(마약, 음주, 도박 등)에 대한 집착은 내적 해체와 영적 붕괴, 심지어 신체적 파괴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토마스는 “사랑받는 대상이 위험한 만큼 사랑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사랑과 미움의 역동 - 정념의 변증법
토마스에 따르면, 미움은 사랑에 반대되고 사랑의 대상이 선이라면 미움의 대상은 악이다.(I-II,29,1) 미움은 나쁜 것, 해악이나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념이다. 그러나 모든 미움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즉 사랑받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사라지거나, 그 선에 반하는 대상이 등장할 때 미움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I-II,29,2)
미움은 때로 사랑보다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사랑이 먼저다. 사랑의 결핍이나 변질이 미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악에 대한 미움만 남는다. 심지어 미움이 성장하면 악에 대한 집착이나 왜곡된 쾌감으로 굳어진다. 자기증오, 진리에 대한 증오, 도덕적 혼란과 자아상실 등도 사랑의 결핍 또는 왜곡에서 설명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은 단순한 욕구, 소유, 집착을 넘어 상대방의 인격과 자율성, 독립성, 성장에 대한 존중과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타인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거나, 대화와 나눔 없는 결합은 오히려 지배와 종속만 남긴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존경과 책임의 균형, 나와 상대 모두의 성장, 인격적·상호적 나눔이 실현되는 사랑이어야만, 우리는 불행과 파괴를 막고 인간적 성취와 만족, 성숙을 얻을 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3)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오직 인간의 ‘의지’만이 자유로운 특권 향유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내지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와 어느 폭군의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은 1715년 옥스퍼드에서 출간된 에픽테투스의 「엥케이리디온」 라틴어판에 실린 삽화. 위키미디어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 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善)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 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 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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