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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부르짖음도
22: 21-24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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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7 ~ 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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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권주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기리는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신 모든 인간은 똑 같은 권리가 있고, 함께 존경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인권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개인 또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라고 합니다. 이 권리를 누리고 빼앗기지 말고 빼앗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권문제는 18세기에 시민계급이 봉건세력인 귀족을 견제하여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인권의 전형적인 사건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목표를 천명하였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탄생되게 되었습니다. 시민혁명 사상은 근세 자연법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인권의 대표적 내용은 자유권, 참정권, 평등권, 인간으로서의 존엄권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기본 권리를 의미합니다.
왜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유린하고 삽니까?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학대합니다. 이런 인간의 욕심은 인간 사회를 동물적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동물 세계의 생태를 보세요. 흔히 말하는 “약육강식”, “생존경쟁”,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강한 자가 잡아먹고, 약한 자는 잡아먹힙니다. 서로가 생존하려고 피를 튀기며 싸웁니다. 아침이 되면 어떤 동물은 잡아먹으려고 뛰고, 어떤 동물은 안 잡아먹히려고 뛰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는 정글처럼 징그러운 삶을 삽니다. 이것이 정글법칙입니다.
인간의 기본 권리는 이미 죄로 점철되었고, 악으로 오염되었고,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권이란 인문주의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계선을 넘어선 상황입니다. 인권이란 성경에 비추어볼 때, 성경대로 살 때 이해할 수 있고 인권을 지키고 실천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인권의 기본구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7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합니다. 창세기 5:1-2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남녀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예시합니다. 남녀가 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남자에게만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사람에게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이나 옛 생활들이 너무 여과되지 않고 인터넷에 마구 유포됩니다. 심지어는 영상물이 돌아 인권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흥미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초상권을 침범하는 사례가 심각한 수준에 까지 와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인간의 기본 권리조차도 누리지 못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나 다름없이 장애인이 언제나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남성에 비하여 항상 상대적인 성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로부터 억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가 인간의 기본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권입니다. 인권주일에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하여 인권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8:2에는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면 교만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악랄한 재판장은 돈을 탐하고 약자를 무시하였습니다. 돈을 받고 재판을 부당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인권의 적입니다. 공공의 적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왔을 때 혼자서 백성들의 재판을 맡아서 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백성들의 재판을 담당해야 하는 모세로서는 탈진상태가 되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청을 받아들여 모세는 중간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 때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자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출 18:21)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불의한 이익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사람도 두려워하게 되고 존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윌리엄 워드는 “나는 아첨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비판하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무시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격려해주는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2:21에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1987년 이래로 꾸준히 늘어서 30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3D 업종이라고 하는 온갖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필요로 해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경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인권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여권을 압류 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임금과 퇴직금의 체불과 삭감이 예사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일하지만 잔업수당, 야간수당, 휴일수당 등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온 ‘새터민’들도 인권유린 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새터민의 돈을 떼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와서 경제 개념이 없을 때에 접근하여 돈을 떼먹는답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우리와 함께 살 자격이 없습니다. 화성에나 가서 혼자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경기도 화성이 아니고 저기 태양계의 화성 말입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을 많이 보셨지요? 외국인 신부도 지난 15년간 50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지난해 농어촌 결혼 3건 중 1건이 국제결혼입니다. 2005년 한 해 동안 국제결혼은 전체의 13.6%이었습니다. 올해 3월 현재로 이들 가정에서 태어난 혼혈인은 초등학생은 6,310명, 중학생은 847명, 고등학생은 249명입니다. 국제결혼은 계속 증가하여 2012년에는 혼혈 학생이 16만5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단일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다민족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선교사님은 필리핀에서 선교하시다가 한국에 오시면서 필리핀 아이를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서울에서 사는데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어른들이 만나면 “야, 너 어디 사람이냐?”, “야, 너 아버지 한국 사람이야?” 등 아이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요. 아이가 집에 와서 그러더랍니다. “엄마, 나 한국사람 맞지?”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필리핀에 돌아갔습니다.
출애굽기 22:22에 보세요. “너는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아와 과부”는 구약 시대에 가장 약자였습니다.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가만히 살게 둬도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외된 사람들을 압제하고 빼앗고 억울하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은 남편이 사업을 잘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 동안 형제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외상값도 안주더랍니다. 그래서 수억 원의 손해를 보고 지금은 기도하면서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서러운 사람들을 얕보고, 사기치고, 눈앞에서 빼앗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출애굽기 22:23에 무어라고 하십니까?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면 하나님이 그들 대신 손 봐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자 편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약자편인지 아세요? 강자는 가만히 둬도 혼자서도 잘해요. 그러나 약자는 보호해줘야 생존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싸우면 어머니는 동생 편을 듭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형은 내버려둬도 안 얻어맞지만 동생은 내버려두면 얻어맞아요. 형은 항상 엄마는 동생편이라고 불평이 심해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들고, 주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찾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은 약한 고아와 과부의 편을 드십니다.
야고보서 1:27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하니 하는 그 것이니라”고 합니다.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경건은 생동적인 것이고, 인권적인 것이고, 복지적인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이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오, 옆에 아무도 없는 소외감이 아닐는지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것입니다.
한 때는 ‘한강 투신’이 마치 유행인양 번졌습니다. 강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은 사회에 대한 항변입니다. 생활고로, 취업난으로, 성적 하락으로 한강에 뛰어듭니다.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 현대화되면서 사회계층 간, 세대 간의 사회 통합이 해체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자살이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작년에 인권위원회에서 “양심적 병역기피”를 인정하였습니다. 참으로 애매하고 우스운 결정이라고 봅니다. 그 때 어느 전방 병사가 그랬답니다. “그럼 우리는 양심불량이냐?” 어느 한 부류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다른 부류의 인권을 해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인권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의 시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조합은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시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시위하기 때문에 도로를 점거하여 많은 시민들의 아까운 시간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시위할 권리가 있다면 시민들은 도로를 달릴 권리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시위문화가 향상되어 발전적이고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유엔에서의 북한 인권결의안에 우리나라는 올해 찬성하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계속 기권하였습니다. 모든 민족의 인권이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도록 세계가 협력하고 모든 인류의 인권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인권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인권을 잘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억울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5에는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비로소 제 정신이 든 겁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한이 맺히게 하고 억울하게 하는 것은 재판관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한(恨)은 없고 원(怨)만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도 있고 원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한(怨恨)이라고 합니다. 한이란 권력에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하층계급이 가지는 것입니다. 지배층이나 부유층은 한은 없고 원만 있습니다. 한은 우리나라만 가진 문화적 증후군입니다. “욕구나 의지의 좌절과 그에 따르는 삶의 파국, 또는 삶 그 자체의 파국 등과 그에 처하는 편집적이고 강박적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얽힌 복합체”라고 합니다. 우선 한의 정의가 복잡하잖아요? 이거 이해하려다가 또 한 맺히겠습니다. 한국인의 한이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심리입니다. 그래서 세계 심리학회에서는 아무리 한국인의 한을 표현할 수 있는 영어 단어를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든 것이 ‘Han’입니다. 화병(火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앓이란 우리에게만 있는 병입니다. 문자 그대로 불이 나는 병입니다. 마음에 불이 나니 어떻게 끄겠습니까? 이런 우리 민족의 문화적 질병은 유일하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우리의 전통 속담이나, 설화나, 민요나, 판소리를 보세요. 마음 깊이 맺힌 한 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여한(女恨)이란 말이 있습니다. 속담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 주로 한 맺힌 여인이 한을 풀고 나면 귀신이 사라지고 영화도 끝납니다.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한 결과입니다. 가난도 한이 되었습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피죽도 쑤어 줄 것 없고, 새앙쥐 볼가심할 것 없다’. 그 외에도 흥부전, 장화홍련전, 홍길동 등을 보세요. 전부 한 맺힌 이야기들입니다.
남도 지방의 민요에도 보면 시집살이의 고달픔과 시누이에 대한 증오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잠아 잠아 오지 마라, 시어머니 눈에 난다, 시어머니 눈에 나면, 임의 눈에 절로 난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논에 가면 갈이 원수, 밭에 가면 바래기 원수, 집에 가면 시누 원수, 세 원수를 잡아다가, 참 실로 목을 매어, 범든 골에 옇고지나”. 참 슬프지요? 이런 민요가 있다는 자체가 민족의 한이요 설움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 마디로 ‘해한(解恨)문화’라고 합니다. 민요나 속담이나 탈춤이나 판소리 등을 보면 문화를 통하여 한을 푸는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풀어야 할 한이 많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말다툼도 하지 않습니다. 싸우지도 않습니다. 소란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원한을 쌓고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지으셨습니다. 누구도 소외되고, 차별되고, 무시되고, 한을 품고 살고, 인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2004년 12월 1일에 인디언의 보스턴 출입금지 법률을 폐기하였습니다. 이미 사문화된 규정을 정식으로 폐기한 것입니다. 실로 329년만의 일입니다. 1675년에 보스턴 시장이 인디언의 수감 법에 서명하였습니다. 1675년 매사추세츠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 족과 인근 플리마우스시의 백인 정착민 사이에 전쟁이 절정이었습니다. 이 때 시장은 인디언이 시내에 나타나 시민을 괴롭히는 것을 방지하는 법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폐기하므로 법적으로 인디언이 보스턴 시내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기회가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짐 크로우 법이라는 흑백 분리정책의 인종분리정책 법이 있어서 인권이 무시되고 인종이 차별을 받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무저항으로 흑인의 인간권리를 주장하였고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입니다. 아침 기도회 시간에 기도 제목을 서로 나누는데 어떤 미국인 학생이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기도 시간이니까 가만있다가 공부 시간에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네 미국인들이 어떻게 인종분리정책을 위해 기도합니까? 미국은 2차 대전 때 일본인들을 모조리 수용소에 감금했습니다. 지금도 말이 좋아 ‘인디언 보호구역’이지 인디언을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격이 없고 이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 한국 사람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 가운데 한번도 외국을 침범한 적도 없고, 지배한 적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미국인 학생들이 놀라서 묻습디다. “정말 한번도 침범한 적이 없나?” 저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한번도 침범한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침범할 힘도 없고 못했지요. 그러나 이런 우리의 약함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은 44세 때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72세에 석방되었습니다. 케이프타운 로번섬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그의 인권 운동에 의하여 남아프리카는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제도를 철폐하였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억압한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한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일스 플레처는 말합니다. “길 잃은 자에게 그 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이며, 굶주린 자에게 음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이며, 약한 자에게 강함입니다. 죽은 자에게 삶이고 병든 자에게 강건이며, 눈먼 자에게 광명이고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한을 풀어주는 분입니다.
군중의 심리란 때로는 자기 이익과 관계 될 때에 강자 편입니다. 군중의 심리란 자기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 약자 편입니다. 이것이 군중의 무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은 자의 편이시고, 약한 자의 편이십니다.
결론
제가 형님처럼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모님이 간 이식 수술을 받고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나오시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말 저는 가까이 지내던 분이 세상을 떠나서 얼마나 서운한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목사님만 봐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 목사님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도 만났었는데 얘기만 해도 그렇게 우셔요. 지금도 옷장을 열 수가 없답니다. 사진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애처가이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정말 너무 슬퍼하십니다. 일전에도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통곡하며 우셨답니다. 요즘에는 부인이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고 하는데, 운다는 것이 잘못 웃어서 촛불이 꺼진다는데, 그렇게 슬퍼하며 우시는 모습을 보니 한층 존경이 갔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가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정이 어디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한 생명에 대하여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게 사랑일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한 생명, 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아끼십니다. 소중히 여기십니다. 한 인간의 인격과 인간 그 자체를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권리가 박탈되고 훼손되면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28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합니다. 인권의 최고의 결정적 증언입니다.
모두의 인권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