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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11 야곱이
세속 역사이든지 교회 역사이든지 대부분은 인물로 그 시대 그 역사를 꿰뚫어 나갑니다.
본문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를 요셉에까지 잇대어서 설명하는 모세의 기록입니다.
본문에서는 요셉과 그 형들의 사이가 멀어져 가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과 비례하는 듯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도 요셉에게 뜻을 두시고 그에게 꿈으로 계시하시는데 그 일로 형들의 미움을 더욱 더 사게 됩니다.
야곱은 노년에 이른 족장답게 요셉의 꿈 이야기를 한편으로는 꾸짖으면서도 마음에 두는 것으로 모세는 기록합니다.
1. 본문 1절은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 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자기가 이전에 선언했던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즉 에서가 떠나감으로써 그 땅은 거룩한 야곱의 소유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땅을 혼자 소유하였습니다. 외견상으로는 한 줌의 흙도 얻지 못했지만 그는 그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면서 자기 신앙을 다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분명히 그를 그의 아비 이삭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비는 평생토록 그 땅의 나그네로 지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형이 타처로 이거함으로써 적지 않은 이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득이 그의 눈에서 숨기운 것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약속에 의존하게 하려는 여호와의 뜻이었습니다.
2. 본문 2-4절은
"②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③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④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입니다.
우리는 (틀레도트)라는 말을 족보로 이해할 게 아니라 차라리 사건의 기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맥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말로 시작한 모세가 야곱의 아들 손자를 열거하지 않고 요셉에게 대한 형제들의 시기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처치하려고 음모를 꾸며서 그를 노예로 팔아 넘겼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모세는 마치 '에서의 족보를 종합해서 약술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본래의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 야곱의 가족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기술하겠다' 고 말하는 듯합니다.
모세는 이제 야곱의 아들들의 가증스런 악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요셉이 다른 형제들보다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끄집어냅니다.
요셉은 야곱이 노경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나이 많은 아버지의 총애를 크게 입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됩니다.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기할 만한 정당히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청장년에 속했으므로 자연의 명령에 의해 그런 것쯤은 양보할 만하였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야곱의 마음이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에게 더 기울어졌다는 것을 수치스러운 시기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야곱의 노년에 태어나 그 아비에게 더 사랑 받는 것을 보고 그에게 적의를 품습니다. 설사 그들이 동생에게 대한 이 사랑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더라도 어째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로써 우리는 악하고 패역한 그들의 기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채색옷과 이에 유사한 자질구레한 일로 노기가 충천하여 살육의 음모를 꾸밉니다. 이것은 그들의 혐오스러운 잔인성을 증명합니다.
모세는 또한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그 아비에게 고자질했으므로 그들의 미움이 더 늘어갔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과실(원뜻: 악)이란 말이 모종의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보다 정확하게 그것이 요셉의 불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요셉은 자기 형들이 욕설로 자기를 괴롭힌다고 아버지에게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나중 말을 취하여 설명을 보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이 요셉에게 그토록 적대감을 품고 학대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나중에는 레아의 아들들을 같은 추궁에서 면제해 주지 않으면서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만 나무라는지 의문을 금하지 못합니다.
레아의 아들 중 하나인 르우벤은 나머지 형제보다 더 온화했고, 그 다음으로 온화한 이는 역시 레아의 소생인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나이가 더 많았으므로 아마 그 일의 주동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의문은 간단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정처 소생이 아니라 첩의 아들들이었으므로 보다 쉽사리 시기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계의 혈통이 종이어서 멸시 당하는 듯한 자격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3. 본문 5-7절은
"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⑥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⑦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입니다.
모세는 반목의 화근이 무엇이었는지를 제일 처음에 언급하였는데, 이제는 한 단계를 높여 요셉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의도를 따라 큰 일에 선택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이 일은 꿈속에서 그에게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그의 형들의 증오심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할 일을 꿈으로 제시하셨는데 이는 나중에 우연히 발생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명령으로 정해진 것은 결국 때가되면 우여곡절 끝에 성취된다는 것도 그가 알리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유리하여 방랑하리라는 것이 예고되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을 애굽으로 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즉 요셉은 기근시에 애굽을 다스리는 자였으므로 야곱과 그의 온 가족을 그리로 데려와서 양식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제일 처음에 언급된 사실로부터 결과를 추측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그 누구도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수호자가 될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실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할 사자로 선임된 자를 구덩이에 던지고 죽음의 입에서 근근히 구출하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불운에 쫓기면서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완전히 사라진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후에 그는 또 다른 무덤 같은 감옥에 투옥되어 거기서 오랫동안 고달프게 지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손으로 야곱의 가족이 살아 남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그때 그는 야곱의 집과 단절되었고 멀리 끌려갔으며 그곳에서는 산 자로 간주되지도 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될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때부터는 특히 그러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정죄된 채 거기서 죽을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복잡한 방법을 통해 자신이 목적하시던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사에서 극히 아름다운 섭리의 사례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특히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점을 덤으로 알게 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놀랍고 비상한 방법으로 자기 역사를 이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훌륭하고 광채 나는 데서가 아닌 죽음과 무덤에서 자기 교회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게다가 문맥 속에서 더욱 완전히 나타날테지만 요셉이란 인물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다시 반복될 것이므로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열두 형제 중 막내 다음으로 끝이었던 그 소년에게 우선권을 주심으로써 순전히 그의 은혜에 의해 독특한 명예를 부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공로나 미덕으로 자기 형제들보다 우월한 주권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그가 자기 큰 자비심에 의해 이런 존귀를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꿈으로부터 그것이 결코 요셉의 자비로운 마음에 좌우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었으니 이는 그로 하여금 자기 동포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비밀을 계시하실 때에는 항상 두 가지 방법에 의존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상과 꿈입니다. 그 중 한가지가 여기에서 주목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틀림없이 종종 보통의 꿈도 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 꿈이 하나님께 의해 요셉에게 보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 꿈에는 말씀의 힘과 무게가 실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낮 동안의 생각 때문에 꿈이 생긴다는 것을 압니다.
때로 그것은 신체 건강의 적신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자기 계획을 알리시려고 하실 때마다 그 꿈에 어떤 표시를 새겨 넣으셔서 지나가는 쓸데없는 몽상과 구별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 꿈의 신빙성과 권위를 확립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도 자기가 공허한 환영에 미혹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두려움 없이 자기 꿈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징물에 의해 통치권을 약속 받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야곱의 아들들을 교훈하기에 부적합한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농부가 아니라 목축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거두어 들일 추수거리가 없었기에 그의 짚단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심히 모순된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 예언이 요셉의 현재 재물에 기초한 것이 아니며 그의 통치의 재료는 가까이에 있는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고 미래의 혜택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비유를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주권을 찾게 되는 것은 집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였던 것입니다.
4. 본문 8절은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택함 받은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은총이 세상의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부채와 같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헛되이 하나님께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의 부당한 증오는 그런 수단에 의해 교정되어야 옳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 그들 가운데 서 계셔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의 맹렬한 노를 억제하시려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의 불경스러운 음모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는 너희가 비록 자랑할지라도 나는 너희가 악한 시기심으로 서둘러 파멸시키려는 자를 너희의 우두머리로 세웠음이니라'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 위로하는 꿈에 의해 그 경건한 젊은이의 고통을 경감시키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은 그들의 끈질긴 고집 때문에 더욱 늘어갔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비췸으로 말미암아 시기를 받게 되더라도 슬퍼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 꿈을 너무도 예민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꿈이 자기들의 소원과 조화되지 않았으므로 어린 아이의 잠꼬대처럼 조소합니다.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합니다. 심사가 뒤틀린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속히 알아차리면서도 경외의 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완고에는 이전의 빠른 눈치를 없애버리는 무감각이 뒤따릅니다.
5. 본문 9절은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입니다.
이 꿈의 목적은 앞에 꾼 것과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대한 신뢰도를 증대시키기 위해 하늘에 있는 형상을 이용하신다는 것 뿐 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볏 짚단에 대한 말을 무시하였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하늘을 향해 쳐다보라고 촉구하십니다.
그곳에서는 그의 엄위로우신 영광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미 죽고 없는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내려와서 그에게 엎드려 절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히브리인들은 이것이 빌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부자연한 해석입니다. 그런 둔사나 궤변 없이도 의미는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해와 달은 각기 그 가정의 머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표상에서 아버지의 온 집안 식구에게 경배 받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6. 본문 10-11절은
"⑩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⑪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입니다.
야곱이 만일 그 꿈이 헛된 야망에서 생겨난 것으로 의심한다면 자기 아들을 책망하는 일은 당연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그 꿈의 제창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요셉을 탓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그 점을 알았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명확히 구별지으면서 그들은 오직 시기의 해독만 내뿜었지만 그는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새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모종의 경건한 인상이 야곱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면, 자기 아들은 어찌해서 꾸짖었을까?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비록 그의 권위 하에 있지만 선지자적 성경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떠올라야 마땅했던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자기 아들들이 너무나 악한 것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위장함으로써 위험을 맞이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그가 그 꿈을 노여워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아들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싶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만심 때문에 동생에게 복종하는 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분쟁을 진정시키려는 욕망에서 거짓으로 자기 아들을 꾸짖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리에 대해 노여워하는 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노력 하에 진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은 결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가시채를 뒷발질하지 말라' 고 솔직하게 권면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그는 이런 온건한 말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즉 '만일 이것이 여느 꿈이라면 분노로 처리할 게 아니라 차라리 비웃고 말려무나 그러나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것을 비방하는 것은 악하다'
야곱의 마음에 그 꿈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우월 의식을 완전히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록 야곱은 정도에서 약간 기울고 있지만 그의 경건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경외심은 다른 모든 감정을 아주 쉽사리 지배하였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에게서 극히 악한 완악성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더 큰 적의를 폭발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들이 그 꿈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성낼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동생을 웃음거리로 삼고 좋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어떤 은밀한 감각이 그들을 강박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의사로든 자기 의지에 반해서든 어떤 권위 있는 점이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맹목적으로 잔인한 충동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반항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만한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질서에 복종하는 데서 유순하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고집이 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족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자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완고함은 극히 비난할 만합니다.
하물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멍에에 우리 목을 순순히 내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완악이야말로 변명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 보다 명백히 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확증되기까지 한 겸손의 교훈이 우리를 억누르며 굴복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혹 오늘날 복음의 수용을 거부하고 패역하고 일어나 진리에 대적하는 옹고집장이들이 많이 눈에 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새로운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 인류가 교만의 죄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복음에 의하면 육신의 모든 영광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의 복종시키는 힘에 의해 온유하게 된 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완고한 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