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여성의식의 특성
주체의 결정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시대학원대학교 교수
연이 댁은 골무를 낀 매듭 굵은 손으로 연방 눈물을 훔쳐냈다. 예전에 단정한 이마에 비녀가 곱던 단아한 연이 댁이 이렇게 추적추적 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안 좋았다. 이 여인도 자기가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남으로부터 자기가 피해자인 것을 인정받으려고 하는구나. 과거의 올 곧고 솜씨가 여물던 연이 댁의 의지도 시간의 분위기가 이렇듯 파괴해버렸구나, 하니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어졌다. 비틀거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비탈길을 걸어나오는데 들들들 들들들 하는 재봉틀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래, 저것이 항소의 힘이다. 신의 비어 있는 권좌를 향해 부단히 삿대질을 하는 이 힘, 항소를 멈추지 않는 덧없는 우리 동맥의 힘, 지면서 다시 거는 줄기찬 항소의 힘이 저 보잘것없이 늙어빠진 연이 댁의 어느 누구인가에 아직도 살아 움틀대고 있는 것이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김승희, 「감금을 위하여」 중에서 -
인용 부분은 외롭고 감금된 삶의 결박 속에서 자신의 결박을 잊어버리기 위해 부단히 몸부림치는 한 여인의 꺾이지 않는 억압에의 탈출 의지를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그 소송이 명백하게도 ’지면서 거는 도박‘임을 알면서도, 어떤 알지 못할 맹목적 본능으로 팽창된 채 열렬하게 다시 소송을 거는 힘, 그것은 밀물의 힘이요, 동맥의 힘이요, 헛된 결말과 시작을 향해 치받는 시지프스의 힘을 연이 댁이 말한 생명의 의지와 결부시키고 있다. 작가는 영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심한 사팔뜨기 눈을 가진 전화 교환수의 감금된 삶의 비극성을 통해 여성들이란 결박된 사람들임을 내비친다. 작품 속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감옥‘, ’넓은 감옥‘, ’십여 평의 서민용 감옥‘, ’한두 평의 질식할 듯한 감옥‘ ’갇힌 방‘ 등의 어구는 세상, 사회 가정, 직장으로 환치되어 온통 세상이 여성들에게 닫혀 있음을 드러낸다.
여성작가가 체험을 통해 강해진다는 말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받아야 했던 억압과 침탈의 원인을 깨달은 후, 끊임없이 현재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조명하고 다른 여성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삶과 같은 모형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남성이 대개 단순히 남성적임에 비해 여성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동시에 구유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는 남성 중심사회 속에서의 여성 체험은 여성을 강하게 하며 그래서 양성을 보유하는 쪽으로 이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에는 그것을 관장하는 남성적 힘과 여성적 힘이 있다고 울프는 상상하였다. 남성의 두뇌 속에는 남성성이 여성성을 지배하고 여성의 두뇌 속에는 여성성이 남성성을 지배한다고 보았지만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 협력할 때라고 하였다. 여성에게 있어서 위기와 억압에의 경험은 이 같은 정상적인 상태로의 회복을 기도하게 되며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한 성의 일깨움을 받게 한다.
위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연이 댁은 사회의 모순과 억압에서 헤쳐 나오려는 적극적 의지에 차있으며, 여성작가는 연이 댁에게서 그런 힘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 여성작가는 그 의지의 실현을 주체적 행동으로 연결시켜 보려는 의도가 내보인다. 이는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져 잇던 남성성인 적극성이 현실세계의 억압에 의해 깨우쳐져 표면에 분출된 것으로, 다른 여성들을 설득적으로 이끄는 힘을 배태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연이 댁은 다른 모든 고통 받는 여성의 대리인으로서 억압적 상황에 처해있는 여성독자들의 감정적 유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면서 다시 거는 항소의 힘이야말로 주체로 설 수 있는 힘이다. 육체적 정신적 및 경제적인
억압에 대해 분노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은 곧 무자아의 의식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 여성들이 흔히 해왔던 유일한 방책은 힘든 현실을 잊는 것이었다. 이승희는 또다른 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는 억압의 실상을 여성독자들이 깨닫도록 저항의지를 항소의 힘에 비유해서 나타내었다. 그럼으로써 주체의 결정성이 현실을 이겨내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의식을 가진 여성작가의 수필은 작가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 진정한 생명, 진정한 사랑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하는 현실 앞에서 항변하는 자세를 취한다. 또한 자신을 대상적 존재, 타자로 묶어두려는 기존의 여성관에 도전하면서 부당한 여성의 운명에 도전하기도 하고,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과감하게 분출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기존 제도에 대해 강력히 항변하기도 한다. 현실적 결핍에 대해 특히 자신이 중시하는 사랑에 방해하는 요소와 마주칠 때 절대 수동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예리한 작가의 눈으로 응시하는 일, 의롭지 못한 일을 증언하고 반성하는 일, 우리의 삶을 부당하게 하는 모든 비인간적 기제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그 총체적 집단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여성수필은 사회가 고도로 발달되면서 여러 가지 병폐 현상이 대두되자, 그것을 글로 표현하여 대중의 공감과 힘을 획득하려는 의도로부터 시도되었는데, 이러한 시도로 수필화된 글이 주제 양상의 한 축으로 차지하고 있는 데는 그 동안 여성수필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 평단의 기조가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류는 주로 논설이나 칼럼에 많이 나타나며, 정적인 수필의 경우 예화가 삽입되어 그 예화가 바로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대변하는 현실 비판이나 사회 고발의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강석호가 "수필은 자기 고백의 인간학이요, 가슴 깊이 뜨겁게 공감하는 정의 문학이다. 때로는 진솔한 고백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은근한 서정과 따끔한 비판과 고발이 있어야 하며, 때로는 유머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설파했듯이, 여성작가들이 시야를 대사회적으로 넓힌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여성소설가 박완서의 글 중에는 사회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강하게 노출되어 있는 작품이 적지 않다. 여기서의 '비판'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작가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지 정치적 참여가 아니다. 또 문학은 과거의 모습을 회상시켜 아련한 기억 속으로 몰고가는 낭만적 발상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이라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상태에서 공허로운 것만 추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남자를 위해 만들어지는 여성」은 낮 시간대에 방송되는 여성을 위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글이다.
여성지를 보건데 여성지니까 여성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건 당연하나, 오늘의 여성문제가 과연 유행, 화장, 요리 육아 그리고 사랑받는 것이 전부일까? 적이 반감을 느낄 때가 있다. 가장 여성문제를 직시해야 할 여성지가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여성지에서조차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사랑받기 위해, 선택받기 위해, 도는 선택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초적인 기교, 아니면 인내의 미덕을 가르치기에만 급급하다. 시대적이며 필연적인 욕구인 여성의 인간화를 주도하기는커녕 그 초점을 흐려 놓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의 공기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돼버린 전파매체와는 달리 여성지의 이런 오도의 책임은 여성지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여성지는 우리가 돈 주고 사는 상품이고 상품은 고객의 기호를 눈치 보며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의 실정은 우리 여성이 여성지의 고객인가조차 의심스럽다.
여성지를 사는 사람은 남편들이란 말이 있다. 실제로 월말 월초에는 여성지를 봉투째 든 선량한 남편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여성지가 여성보다 남성의 운치를 봐가며 남성이 길들이고 귀여워하기 편한 여성을 만들기에 주력하는 까닭을 알만 하다. 여성이 스스로의 읽을거리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한 여성의 지위향상은 언제나 ‘시기상조론’만 거듭될 것이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박완서, 「남자를 위해 만들어지는 여성」중에서 -
위의 예문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여성작가는 여성을 위한다는 여성지에서조차 남성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여성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초적인 기교, 인내의 미덕을 가르치기에만 급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여성소설가 박완서는 생활 속에서 주체가 되어야 할 여성들이 전부 객체로 대상화되는 현실을 ‘매스컴’과 ‘여성지’의 에를 들어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여성작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여성들을 발언하게 하면서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주는 건 좋은데, 여기 출연하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쏟아놓은 이야기가 우물가에서 해도 눈총을 맞을 소리라는 것이다.
적어도 여성들이 ‘매스컴’에 나갔으면 크고 거창한 소리를 못하더라도 집의 울타리를 넘어야 할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누고 싶은 생활의 지혜라든지 듣는 사람이 같이 기뻐하거나 속상해 해 줄 공동의 문제, 사회성 같은 것이 있는 이야기를 널어놓으라는 것이다. 여성작가는 오늘날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올바른 정체성도 없이 그저 온종일 밥만 먹고 생각하는 것이 미혼이면 적당한 남자를 잡는 것만 생각하고, 기혼이면 남편의 사랑을 놓치지 않도록 기교와 전략을 짜는 일이 전부인 양 나팔을 불어대는 꼴을 도저히 봐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이런 여성의 행동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매스컴에 동의함이 적지 않음을 생각할 때, 여성 시간이 여성 모두를 애완동물로 퇴행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박완서는 여성들의 잘못된 어법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기혼 여성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데서 남편에 대해 최고급의 존대말을 쓴다는 것이다. 남존여비가 철저했을 때도 하지 않던 행동을 요즘 여성들이 한다는 것이다. 존대말이 나쁠 것은 없지만 동격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존대말이 보편화된다는 건 자칫 동격의 관계를 귀천의 차이가 있는 관계로 자타에 인정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수필은 여성들의 올바른 정체성을 촉구하는 수필이다. 자신을 주체로서 당당히 세워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 정체성은 보다 유동적, 다원적, 개인적, 자기 성찰적인 것이 되며, 변화와 혁신이 이루어지기 쉽게 된다. 물론, 현대에도 정체성은 사회적이며 타자와 연관되어 있다. 헤겔에서 미드에 이르는 정체성에 대한 이론가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호 인정의 맥락에서 설명하곤 했는데, 이것은 정체성이 마치 타자의 인정과 이 인정에 대한 자기 확증의 결합에 따라 형성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적인 정체성의 형태 또한 어느 정도 실제적이고 고정적인 것이며, 정체성은 여전히 개인을 구속하는 일련의 역할과 규범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가능한 정체성과 새로운 정체성의 경계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체성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수필가들은 수필을 통해 여성들이 올바른 정체성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