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10장 1-3절
1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본토와 바다 섬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더라 2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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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과 좋아 보이는 사람은 다릅니다. 좋은 목사와 좋아 보이는 목사도 다릅니다. 멀리서 좋아 보인 게 가까이 보면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망원경으로 볼 때와 현미경으로 볼 때가 다릅니다. 이건 목회자, 성도, 남편, 아내, 직장 동료도 같습니다. 관계해보면 진상과 진국이 느껴집니다. 진상은 인상 써지고 진국은 천국까지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관계할 때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살아보면 믿음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에스더와 모르드개, 하만과 아하수에로의 행적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서의 끝은 모르드개란 이름을 언급합니다. 10장 3절은 에스더서의 끝장 끝 절입니다.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향이 진합니다. 첫사랑은 짜릿하고 마지막 사랑은 애절합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첫사랑으로 시작해 따름이란 끝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됩니다.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을 받습니다.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입니다. 성도들은 목사라고 당연히 존경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목사 같아야 적어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반대도 그와 동일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개독교, 먹사, 잡로라 부르는 건 단지 사탄의 이간질이 아닙니다. 실제로 기독교가 개독교처럼 보여주었고 목사가 먹사처럼 장로가 잡로처럼 살았기 때문 아닐까요? 세상은 교회가 존경해달라고 해서 존경하는 게 아닙니다. 말과 삶의 간격이 좁을수록 존경은 깊습니다.
믿은대로 살라, 말씀대로 살라는 말은 이미 식상한 설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안 들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살아서 못 들은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고민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믿음의 실천 말고 세상에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통로는 뭘까요? 없습니다. 다 아시는대로 세상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삶을 듣습니다. 전도지를 읽지 않고 성도의 행동을 읽습니다.
세상은 우리와 관계해본 다음 결론을 내렸습니다. 교회는 가짜, 예수는 진짜. 인도의 간디가 영국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떠나라. 그러나 예수는 놓고 가라.”, “나는 예수를 존경한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들은 믿음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힌두교도의 말이라고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고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고 모두 맞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는 지금 입은 다물고 삶은 열어야 함이 맞습니다.
모르드개는 그냥 존경받은 게 아닙니다. 자기 이익이 아닌 백성의 이익을 생각했습니다. 그걸 백성들은 압니다. 이유는 처음과 끝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실하다 말합니다. 신실함은 처음과 끝이 같습니다. 안과 밖이 같습니다. 말과 삶이 같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말씀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미 답은 있습니다. 이제 아는 걸 삶으로 증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무엇보다 입을 다물고 삶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신실함이 쌓일 때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