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26 | 복음과 하나님의 의 말씀/ 로마서 3:21-31 요절/ 로마서 3:25 | 2026. 7. 4 | |
| 여름수양회 주제 2 강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사도 바울은 한 가지 결론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도덕을 자랑하던 사람이든 율법을 자랑하던 사람이든,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는 선언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출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닫혀 있던 하늘이 열리고, 막혀 있던 길이 뚫립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한 줄기 빛이 비쳐 옵니다. 그 빛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죄인 된 우리에게 임하고 새사람이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셔서 오늘 복음의 의미를 이전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원어 성경에는“이제는” 앞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전환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타났다”는 말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디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품고 계시던 한 의를 마침내 온 세상 앞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이 의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새 발명품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성경 전체가 가리켜 온 것입니다. 율법 즉 모세오경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제시함과 동시에 인간의 잘못을 지적해내는 가운데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따로 있다고 증거해왔습니다. 또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다고 증거해 왔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것은 죄와 심판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임한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약속의 형태로 흐르던 하나님의 의가,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요 새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누구에게 임합니까?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먼저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은 차별이 가득한 곳입니다. 학벌과 스펙, 연봉과 직급, 살고 있는 아파트와 타고 다니는 차로 사람의 값이 매겨집니다. 대학생은 학점과 자격증으로, 직장인은 성과와 인사 평가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세상의 의는 늘 조건을 따지고 점수를 매기며, 이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을 가차 없이 ‘루저’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학벌도 스펙도 직급도 보지 않으십니다. 실패한 사람에게도, 병들고 지친 사람에게도, 주저앉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의는 똑같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점에서는 차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만 그 효력이 미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효력이 미치지 않습니다.
23절은 인간이 처해 있는 실상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어린이든 어른이든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나도 죄인 너도 죄인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자범죄를 짓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에 미달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늘 부족한 자로 드러나게 되고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진노의 대상인 인간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까? 아무리 좋은 약도 복용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듯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효력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마련되었습니까? 공짜처럼 보이는 이 은혜 뒤에는 얼마나 큰 대가가 치러진 것입니까?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이란 본래 노예제도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속량은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본래 한번 노예가 된 사람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주인인 듯 살았지만 실상은 죄의 노예였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죄는 더 단단히 우리를 옭아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자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원치 않게 죄의 열매만 주렁주렁 맺게 되고 결국은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이런 죄인된 자신의 모습에 이렇게 탄식했습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 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전으로 지불하시고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나의 노력이나 공로는 단 1퍼센트도 보태지지 않았고 100퍼센트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값없이 주어졌다는 것은 값싸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을 만큼 값이 커서 그저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얻어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의 속량하심은 어떻게 마련이 되었을까요? 25a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물을 뜻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합니까?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 때문에 쌓여 있는 하나님의 진노는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어 잿더미가 되게 하더라도 다 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진노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남김없이 그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 위에 쏟아져야 할 진노를 예수님에게 남김없이 다 쏟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5b,26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한 재판관을 떠올려 봅시다. 범죄가 분명한 중죄인을 번번이 그냥 풀어준다면 사람들은 그를 부패한 재판관이라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 이래 인류의 죄를 오랫동안 ‘간과하셨다’ 즉 아시고도 지나가셨다고 말합니다. 죄지을 때마다 즉시 심판하셨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방관하고 잊으신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참으시며’ 심판을 미루어 오신 것입니다. 마치 외상 장부에 죗값을 기록해 두신 것과 같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모든 죗값을 한 곳에 몰아 청구하셨고, 그 청구서를 받으신 분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값을 자신의 피로써 남김없이 지불하셨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인들까지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철저히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셨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흐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의가 증거된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까? 히브리서 9:22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의 그림자입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 효력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새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 문제를 다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더하여 줍니다(히9:12-14).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죄는 즐길만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개인을 파멸시키고 공동체와 가정을 무너지게 하는 독약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고 죄악된 분위기를 피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즉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연약함과 죄를 이기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profile로 나의 의를 쌓았습니다. 8년간의 독일에서의 선교사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얼마 동안은 섬기던 독일양이 변화된 체험을 통해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를,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알기까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버티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 앞에서 저의 이런 은혜는 금방 말라져 버렸습니다. 40 나이에 아이들 셋을 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저는 주변 40대들에 비해 너무 초라했고 생존의 십자가는 너무 버거웠습니다. 30대를 독일에서 온전히 하나님역사를 위해 쏟았으니 이제는 나를 위해, 나의 가족을 위해 나의 열정을 드려도 되겠다는 자기를 합리화하였습니다. 금방 문닫을 것 같은 회사가100억대 매출회사로 성장하기까지 저의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상무로, 50대 중반에는 5년6개월을 쏟아부어 경영학 박사 타이틀로, 그 다음에는 KAIST에서 AMP 타이틀로, 2020년 부터는 데이터분석 컨설팅 회사 대표요, 서울사이버대학교 교수로 나의 의를 계속 쌓아갔습니다. 이렇게 쌓은 나의 의는 그럴 듯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결혼 후 첫번째 생일선물로 보낸 카드에는 “가열차게 살아온 아버지”라고 나의 삶을 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의 프로필을 인정했다고 해서 저의 의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저의 내면은 교만과 이기심과 운명주의로 고통받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독일에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저를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 것처럼 한국에서도 제가 저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영접하기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캠퍼스 개척과 세계선교에 귀히 써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나의 나된 것은 나의 어떤 프로필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입니다. 제가 매순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만이 나를 살게 함을 고백하겠습니다. 한 양을 먹이고 제자를 세우는데 저의 시간과 열정과 생명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첫 번째 변화는 ‘자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27,28절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된 것이기에 결코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자랑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9-10) 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얻는 데에는 민족과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며,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율법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면 믿음이 율법을 폐기합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면 율법은 뭐지? 무슨 쓸모가 있는 거지? 더 이상 필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31절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런 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거듭나기 전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는 거울이었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는 길잡이가 됩니다. 은혜의 깊은 맛을 본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원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행합니다.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견고하게 세웁니다.
우리는 평생 ‘나의 의’를 쌓으며 살아왔습니다. 더 좋은 성적, 더 화려한 스펙, 더 높은 자리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평생 쌓아 올린 나의 의의 탑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 같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복음의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더러운 옷을 벗고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의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주제처럼, 죄로 칙칙하게 물들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칠해지는 Re-Coloring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존귀한 자녀— 그것이 우리의 진짜 신분입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자기 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얻고 참 자유와 평강과 행복을 누리길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