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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13강
환난과 하나님 나라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은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의 후반부 내용입니다. 1차 전도 여행 전반부는 비교적 수월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환난이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믿음이 약해지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더 강해지고 깊어집니다. 사실, 환난과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환난과 고난이 없으면 아름답고 숭고한 열매도 없습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삶을 준비시킨다.” 고난은 평범한 인생을 특별한 인생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줍니다. 이 시간 우리의 복음 사역과 신앙생활이라는 삶의 여정에서 과연 환난이 어떤 것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이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이동합니다. 이고니온은 현재 튀르키예의 코냐라는 도시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예수님 믿는 형제들에게 악감정을 품게 합니다. ‘악감을 품게 하다’라는 것은 ‘독을 타다’, ‘독살스럽게 하다’입니다. 복음의 대적자들은 양들의 순수한 마음에 독을 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얼마 전까지 그렇게 말씀을 잘 받던 양들이 180도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사도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틈만 나면 작은 것을 꼬투리 삼아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두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정나미가 떨어져 빨리 그것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어떻게 합니까? 그곳에 약 1년 동안 오래 머뭅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는 형제들이 이제 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초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 그냥 두고 떠나면 그들의 연약한 믿음은 곧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양육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사도들의 가르치는 말씀에 권위가 더해집니다.
그런데 이고니온 시내의 무리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한 부류는 두 사도를 따르며 복음을 잘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부류는 유대인들을 따르며 복음을 대적합니다. 대적자들은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듭니다. 두 사도는 할 수 없이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도시로 옮겨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루스드라는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완전히 이방 땅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는 회당이라도 있었는데 이곳은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라 회당도 없었습니다. 회당이 없으니 두 사도는 노방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했으니 일평생 한 번도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고치지 못했으니 치료 불가능한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건성건성 대충대충 들은 게 아니라 진지한 자세로 경청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진지하게 말씀을 듣는 그의 모습 속에서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아무튼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큰 소리로 명령합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 걸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jumped up and walked”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점프하면서 걸었습니다.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소망없는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축복하셔서 걷게 해 주셨습니다. 운명의 자리에서 일어나 뛰고 걷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놀라운 기적의 시작은 그의 마음에 작은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 바울의 확신 있는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확신 있는 말씀선포로부터 양들에게 믿음이 싹트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지르며 외쳤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으예!” “하모! 신들이 우리 도시에 오셨는데 우리가 몰라보고 홀대를 했으예!”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일은 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입니다. 헤르메스(헬, 에르메스)는 신들의 사자, 즉 제우스의 대변인입니다. 사람들은 바나바가 과묵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니까, 제우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설교도 하고, 말을 많이 하니까 헤르메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제물인 황소와 제단에 같이 올릴 화환, 즉 꽃다발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졸지에 갓바울, 갓바나바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사도는 이전에 이고니온에서 돌 세례를 받을 뻔할 만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루스드라에서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이들의 대접을 은근히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모, 하나님이 이제야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구나!” 하면서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큰 죄가 됩니다. 12장에서도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벌레 먹혀 죽었지 않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엔 루가오니아 방언을 몰랐기 때문에 어찌 돌아가는 영문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행하는 광경을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두 사도는 어떻게 합니까? 유대인들은 큰 슬픔을 당하거나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발견할 때, 자기 옷을 찢어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 옷을 찢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경배하겠다는 것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 걷지 못한 그 사람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명령한 것은 분명 바울입니다. 바울의 명령과 동시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바울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신적 존재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두 사도는 이 헛되고 어리석은 일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우상숭배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두 사도는 자신들이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사도의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전하는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영광 받을 때 우리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몇 번이나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출했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했습니다.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이새의 막내아들이요, 양이나 치다 끝날 인생을 이렇게 높여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겸손했습니다. 바울도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제자들을 세웠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 여사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언니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독일 지역을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고문하고 언니를 죽게 한 독일인 간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녀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저 인간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코리 텐 붐 여사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니?” 코리 텐 붐 여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 후 코리 텐 붐 여사는 용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간증을 듣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간증 후에는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코리 텐 붐 여사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기자가 묻습니다. “코리 여사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박수를 치는데 기쁘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대답합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주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는 나귀에 불과합니다. 착각에 빠지지 말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 때 우리는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복음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루스드라 지역의 무리들이 헛된 일, 어리석은 일을 버리고 대신 무엇을 해야 합니까?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주님께로 돌이키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악되고 어리석어 제 갈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버리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 속에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철을 따라 결실하게 하셨습니다. 각종 음식과 소소한 기쁨으로 마음에 만족을 주셨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이런 은총들을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특별계시인 성경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완전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 불청객들이 찾아옵니다. 누구입니까? 대적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옵니다. 백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박해 원정대입니다. 과거 예수님을 믿기 전, 사도바울의 모습과도 똑같습니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질합니다. “저들은 여러분을 혹하게 하여 다른 신을 섬기게 하려고 하는 종교 사기꾼들입니다. 저들에게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하모! 그라믄요.” 그러자 순식간에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바울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수 많은 돌들이 날라옵니다. 돌 세례를 받을 때 아마도 바울은 자신이 주동하여 죽인 스데반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요? 서서히 바울은 죽어갑니다. 바울이 죽은 것으로 알고 무리가 시외 변두리로 내다 버립니다. 얼마가 지난 후, 바울 주위로 제자들이 몰려듭니다. 아마도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인생이 여기서 이처럼 허무하게 끝나 버린다면, 좁은 길을 스스로 걸어간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미련해 보이는 그 길을 간 것은 정말 미련해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받은 이방인의 사도, 이방의 빛이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께 받은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대반전입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이 벌떡 일어납니다. 바울은 먼지를 툭툭 떨어버리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돌에 맞아도 끄떡하지 않는 특수체질, 아이언맨 이런 사람일까요? 아니면 너무나 화가 나고 억울해 그들과 싸우고자 다시 성에 들어갔을까요? 바울은 어찌하든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섬기고자 다시 루스드라 성내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서는 믿음의 정병이었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와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도와주었습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은 몸에 부상을 많이 입었기 때문에 더베에서 빨리 고향인 다소로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다소에서 몸을 추스른 후, 내륙으로 안디옥 교회에 돌아가는 것이 안전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반대쪽으로 back해서 이전에 개척했던,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항구도시였던 앗달리아에서 배 타고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개척하다가 핍박을 받았지만 그 위험한 지역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제자들을 모아 “흔들리지 말고 이 믿음에 굳게 머물러 있으라”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복음을 전한다’는 말만큼이나 자주 반복되는 단어가 제자들과 교회를 ‘굳게 하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재방문하고 또 편지를 보내 흔들리는 교회를 굳게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면합니다. 지속적으로 복음을 굳게 붙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구원받으려면 고난을 받아야 한다거나 고난을 안 받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의 종착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수많은 환난의 터널들이 있을 것이고 그 환난의 터널들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 사항입니다. 꽃길만 생각하면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는 크고 작은 고난들이 주어집니다. 왜일까요?
첫째,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바울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나,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절했다고 죽임당하는 환난이나, 공산당들에게 죽임당하는 순교의 환난이나 이런 수준의 환난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 문화와 동화되도록 유혹하는 것이 우리에게 고난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싸우고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중심 지키고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가운데 배척당할 수도 있고, 소외될 수도 있고, 크고 작은 현실적 아픔들과 불이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문화와 가치관적인 측면에서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둘째, 환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환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말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환난은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환난을 참고 인내할 때 내면이 연단되어서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게 됩니다. 환난은 세상에 붙은 헛된 소망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붙들게 합니다. ‘환난’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뜰립시스’로 ‘탈곡하다’ ‘껍질을 벗겨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환난을 겪을 때 덕지덕지 붙은 영적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됩니다. 욥기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은 그 믿음이 정금처럼 순수하고 빛이 납니다. 무엇보다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영적 거목이 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환난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더 소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했던 것입니다(빌3:10,11).
한마디로 바울은 고난에 대한 철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배우고 신앙의 최고 경지인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려면 반드시 고난에 참여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용광로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 많은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울림이 있는 이유는 그가 많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배우고자 몸부림을 쳤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환난에 대해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믿음 중심 지키고 성경적인 가치관대로 살고자 할 때 고난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십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환난들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사회에서, 불신 가정에서 믿음 중심을 지키고 세상 문화와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려 할 때 주어지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냉대받는 아픔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고자 할 때 겪는 고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신앙의 굴곡과 함께 엎치락 뒷치락하면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아픔들을 겪게 됩니다. 그런 고난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고난들을 통해 우리 믿음이 연단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는 사람으로 빚어지게 됩니다. 이 땅의 삶에서 주어지는 고난, 역경, 어려움,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믿음의 길을 인내하면서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