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한송로 / 김미자
봄은 소리로부터 온다. 그 소리는 동면에 들었던 만물이 땅속의 온기에 화들짝 잠을 깨면서 터지는 첫 울음소리다. 몸피와 상관없이 살아있는 생명체는 한 해의 소임을 위해 제 목청안의 소리를 끌어올려 터트린다. 그 탄생의 소리는 힘이 솟구치는 팡파르 같은 환영음악이다. 봄의 소리가 무성해지면 주변은 순식간에 꽃 대궐처럼 변한다. 때맞추어 추위와 무기력에 폭삭 움츠렸던 내 안의 소리도 나를 밖으로 잡아끈다.
통도사. 그곳이라면 봄 소리를 오롯이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길을 나선다. 요금소를 지나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결정적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애매한 갈림길이다. 한쪽은 구불구불 아늑한 숲길이다. 울창한 소나무가 숲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어 한 눈에도 걷기에 딱 좋아 보인다. 입구에 '무풍한송로' 라는 팻말이 서있다. 다른 쪽은 무풍교로 이어진 아스팔트길이다. 그 길도 구불구불한 산길로 이어져있다. 어느 길로 들어서야 잘했다는 생각이 들까.
순간의 선택은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편하고 분위기 있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또 그렇게 살기를 소원한다. 아늑한 풍경을 만나면 분별력을 잃고 그 속에서 둥지를 틀고 평생 안주하고 싶어진다. 신경이 조금이라도 쓰게 되면 등을 돌리기 일쑤이고 여지없이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통도사로 향하는 길목조차조차 소심한 중생을 번뇌에 빠트린다.
무풍한송로로 들어선다. 무풍한송로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바람 따라 너울너울 춤추는 형상으로 아름답게 늘어선 길이라는 뜻이다. 몸을 들여놓은 순간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벼워진다. 마음속에 담겼던 복잡한 고민이 싹 씻겨 내려간다. 바글거리던 잡념들이 일제히 납작 엎드려 주인을 괴롭힌 죄를 사죄하는 모양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던 말이 실감이 난다.
노송의 등치와 훤칠한 키를 따라 고개가 저절로 하늘로 향한다. 나이테를 가늠할 수 없는 거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철 푸른 솔가지는 공작새가 날개를 양껏 펼치고 암놈을 유혹할 때처럼 당당하고 기품 있는 모습과 빼닮았다. 망사처럼 아리따운 솔잎무늬로 얼비친 하늘은 규격 없는 무풍한송 병풍 같다. 꽃을 장식한 것처럼 솔방울까지 달려있어 감탄의 소리가 연발 터진다.
솔숲에 바람이 인다. 부드러운 바람이 사방에서 모였다 흩어진다. 반듯하게 서있는 소나무, 오랜 비바람을 견뎌내느라 허리가 굽힐 대로 굽혀 지지대의 도움으로 서있는 소나무, 물소리에 반해 개천 쪽으로 몸을 반쯤이나 기울여 보는 이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소나무. 어느 소나무 하나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다. 인생살이가 제 각각이듯이 이곳 노송도 살아온 곡절대로 범상치 않은 형상이다.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출 때처럼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노송은 근엄하다. 마치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을 안고 이 길을 오가는 중생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청빈한 노스님 같다. 어느 소나무 하나 더 잘난 소리를 내려고 나서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혼자 힘으로 힘든 현실을 견디고 있거나,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소리보살이 틀림이 없어 보인다.
무풍한송로 바람소리도 그러하다. 입구에서부터 경내까지 40여 분이 걸린다. 이 오솔길에는 시원하게 목을 축여줄 둥그런 우물도 있고 가슴에 쏙 와 닿는 글귀를 써넣은 비석도 띄엄띄엄 서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해를 거듭한 솔갈비와 솔방울이 노송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다.
발아래에서 걸을 때마다 자그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마사토다. 자잘한 돌멩이인 마사토가 사람들의 발밑에서 온몸이 부서져간다. 아픔을 견뎌내는 운명으로 살지만 싫은 기색 없이 걷는 이의 발걸음을 경쾌하게 받쳐주고 힘도 실어준다. 혼자 걸어가는 길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무풍한송로 솔밭길이다.
오솔길 옆에는 개천이 있다. 양 갈래로 나뉜 무풍한송로와 무풍교가 조화를 이룬 널찍한 개천이다. 통도사를 감싸 안은 영축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크고 넙적한 돌과 자갈돌이 깔려있다. 큰 너럭바위를 돌아가는 물살은 패기 넘치는 소리를, 작은 돌멩이 위를 흘러가는 물살은 찰랑찰랑 보드라운 소리를 낸다. 서로 하나의 화음으로 섞여 사하촌으로 내려간다.
새소리가 들린다. 새는 허공으로 올라가 솔가지에 앉더니 앉자마자 부리나케 내려와 너럭바위에 앉는다. 그곳도 아니다싶은지 휙 날아 솔 갈비를 헤치며 먹을 것을 찾느라 부산스럽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풍한송로 식솔에게 유일한 감초보살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소리가 있다. 들을수록 감동과 울림을 주는 소리가 있다. 어서 멈췄으면 하는 싫은 소리도 많다. 그것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소리이리라. 그렇다고 자기의 목소리를 더 높여 상대방을 제압해서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목소리로만 이어진다면 세상은 온통 굉음뿐일 것이다.
쩍쩍 갈라터진 노송의 표피를 본다. 껍질이 갈라터지는 고통조차 아름다운 바람소리로 승화시킨 노송. 우리도 타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인내와 느긋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 목소리를 부드러운 저음으로 바꾸고 상대방의 소리를 귀담아들을 때 세상은 온통 무풍한송로가 될 것이다.
진정한 가르침은 많은 말이 아니라 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반성을 어지간히 한 모양이다. 욕심과 불만으로 불룩했던 내 마음의 소리가 확 쭈그러들었는지 제법 홀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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