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 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체육 입문
한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을 돌아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공이 바닥에 닿기 전에 발은 움직인다
다시 머리 위로 솟구칠 때
구부러진 발등과 이마는 키스처럼 가깝고
두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두 손에서 뻗어 가슴을 향해 파고든다
공중에 박힌 눈은 온몸을 잡아당기고
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진다
덤불에 처박혀 달걀처럼 깨질 때
공을 주우러 간 그림자는 기차처럼 길고
손을 털고 사람들이 떠난 길 위에
수만 갈래 힘줄을 뻗는
공은 지구보다 넓고
하늘이 한 뼘 더 두꺼워진 다음날
낯선 공이 떠도는 공터에 모여
세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으로 솟구쳐 공중으로 나아간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방향을 잡고
공은 새가 된다
한 사람에게 날아가지만 세 사람의 심장이 뛴다
두 사람이 공을 주고받을 때
망을 보는 한 사람은 비밀처럼 뜨겁고
가족사진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 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전람회 잡담
나비처럼 날아든 초대장은 누가 보낸 것입니까. 사각으로 펼친 양 날개를 따라 우린 왔습니다. 똑같이 지참한 표정들은 누가 인쇄한 것입니까. 장황하게 늘어선 꽃들의 수다는 누가 요약한 것입니까. 꽃들 사이에 허공을 배치해도 품종은 번복되지 않습니까. 낯선 꽃술이 마음을 끌어도
군락을 이루지 못하면 돌연변이일 뿐입니까. 우리의 견해를 시험하는 중입니까. 코스요리처럼 이어지는 꽃밭의 순서는 누가 결정한 것입니까. 우린 배가 고프단 말입니다. 당신은 맨 처음의 꽃입니까. 누구의 눈에 띄었는지 어느 라인에 끼었는지 확신합니까. 얼마나 넓은 잎맥이 당신을 키웠는지 증명해 보세요. 입으로 말고 쉿, 카메라 앵글 안에서도
일거수일투족을 사용해 보세요. 담 밑에 주저앉은 당신은 거동이 불편합니까. 떠도는 행인의 발목이라도 붙잡으세요. 약에 취한 눈빛이라도 섭외하세요. 목발이라도 옆에 차고 흔들리세요. 풍향계는 믿음이 없습니다. 바람의 행렬은 지나갔어요. 짓밟힌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염료 대신 멍 자국으로 레벨업하세요. 가시를 방치하는 건 의도입니까. 피를 보면 흥분하는 흡혈귀처럼
우리의 감정이 손끝에 집결되기를 기대합니까. 고개를 숙이고 허리가 휘는 건 퇴장을 알리는 인사입니까, 충분히 죽었다는 뜻입니까. 문이 닫히면 당신들은 어디로 갑니까. 대기 중인 열두 컷짜리 열차에는 누구의 얼굴이 실립니까. 죽어서도 대물림되는 전시 목록에서 누구도 뛰어내리지 못합니다. 관람객이 모두 떠나고
우리는 마지막의 꽃들. 발자국처럼 남아 취재에 응합니다. 낮의 혈기는 철거되고 우리의 의식은 수은주처럼 떨어집니다. 계절의 기승전결처럼 감동을 완결합니다. 입을 모으지 않아도 합의되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우리는 친절한 임종의 독자들. 밤이면 배포되는 한 줄의 보도자료는 누가 작성한 것입니까.
기억의 밥
절벽 위에 두 사람이 있다
얼굴을 마주 보는 유일한 시간
의자는 늘 세 개
풀들이 일렁이자
바닷바람에 떠밀려 온 아이가
얼굴이 빠져나간 뒤통수로 앉아 있다
검은 머리풀이 자라는
해변의 목초지
밥알을 흘리듯 눈물을 흘린 날도 있었지
수저를 들다가 식탁을 걷어차고
다리가 부러져 세 발로 서 있는 식탁 아래
봄볕이 재활용하는 꽃들처럼
피를 토하듯 국물을 엎지른 날도 있었지
진수성찬을 차려도 한쪽으로만 기우는 세계
식탁의 다리를 마저 부러뜨리고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
끝나지 않는 두 손을 모으고 입을 꼭 닫고도
이빨에 끼는 썩지 않는 풀들 사이로
꽃들은 불길처럼 지나가고
하얀 머리풀이 섞이는
해변의 목초지
공복의 탯줄에 묶여
그림자는 늘 세 개
잠이 오는 사람이 먼저 일어났다
나무 시절
햇빛에 타오르는 나무 하나가 거대한 성냥불처럼 이마를 덮쳤네 거리는 나무들로 넘쳤고 밤에도 햇빛을 개발했네 타오르는 잎들이 차례로 얼굴을 핥았네 두 뺨에 불이 붙었네 혀를 꺼낼 때마다 불덩이였네 피부를 타고 불이 흘렀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서 불이 났네 스치는 사람들이 화들짝 옷깃을 털었네 타오르는 가방을 메고 학교엘 갔네 솜털이 뽀얀 선생이 출석부로 가로막았네 타오르는 주먹을 쥐고 공장엘 갔네 백발의 작업반장이 거리로 돌려보냈네 타오르는 군침을 흘리며
식당엘 갔네 전화를 받던 여자가 길 건너를 가리켰네 타오르는 머리를 감싸고 소방서로 갔네 졸고 있던 소방수가 옆 건물을 가리켰네 타오르는 계단을 밟고 병원으로 갔네 껄껄 웃던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었네 타오르는 기차를 타고
해변으로 갔네 모래밭에는 옷들이 뒹구는데 헤엄치는 연인은 어디에 있나 타오르는 옷들을 깔고 앉아 물의 온도를 바라봤네 절벽 아래 익사체를 뜯어먹던 파도가 떼 지어 달려왔네 타오르는 뒤통수를 끌고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네 이제 막 짐을 풀던 사람이 아래층을 가리켰네 아래층 여자는 골목을 가리켰네 타오르는 어둠을 안고 여관엘 갔네 목을 매던 투숙객이 옆방을 가리켰네 그를 바닥에 때려눕히고 함께 잠들었네 타오르는 꿈에 실려
예식장으로 갔네 하객들의 박수 소리가 커튼콜처럼 터졌네 처음 따낸 주인공답게 깍듯이 답례하듯 뱃속의 태아를 꺼내 부케처럼 던졌네 피 묻은 손으로 음식을 돌렸네 토사물만 남기고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타오르는 자책에 빠져
성당엘 갔네 유니폼을 입은 성가대와 입을 맞췄네 노래가 끝나면 관객들은 사라졌네 노래를 옮기려고 낡은 문에 기대어 편지를 썼네 타오르는 고백을 품고 우체국으로 갔네 닫혀 있는 입구에 늘어선 나무들 사이에 서서
어느 날 밤 우뚝 걸음을 멈추었네 끝없는 폭포수처럼 몸이 쏟아졌네 거리는 사람들로 넘쳤고 자면서도 마음을 개발했네 울렁이는 입들이 차례로 당신을 기다렸네 뺨에서 물이 튀었네 허공을 깨물 때마다 눈물바다였네 뼈를 타고 물이 흘렀네
모조 숲
날씨는 뒤에서 다가왔고
우리는 걸으면서도 목을 자꾸 돌렸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털을 키웠다.
꼬리뼈에 나무를 심은 녀석도 있다.
빌딩들 사이에 강물이 있고 버려진 숲이 있다.
날개가 걷힌 새의 얼굴과
구름의 건축.
밤과 낮에는 색깔이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고양이가 필요하다. 당신과 내가 반반씩 필요하다.
검은고양이소셜클럽.
표정이 없는 당신과 말이 없는 내가
수염처럼 멤버가 된다.
아침마다 새로운 음악이 분다.
물결치듯 드럼을 치는 호흡과
바람의 애드리브.
눈을 감고 빗줄기를 튕기는 어둠은 우리의 선생.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눈을 감으려면 부릅뜨는 연습을 하세요.
사라지세요. 줄을 서세요.
줄을 서서 우리는 눈을 맞췄다.
연주를 모르는 당신과 악보를 모르는 내가
거울처럼 주고받는 립싱크.
줄을 튕기며 우리는 입을 맞췄다.
간밤에 떠내려 온 사람들을 싣고
마부인 나는 숲 속의 오후를 달린다.
그들 중 절반은 익사체다.
발목이 잘린 소년들은 주저앉아 더는 자라지 않았다.
소년들이 성장을 멈춰도 계단을 끝없이 오르며
지뢰가 대물림되는 건물들 사이
숲을 지나고 숲을 지나고 숲을 지나는 13월의 산책.
햇빛은 빠르게 돌아가고
녹색과 검정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나무의 왕국 송충이의 왕국 구름의 왕국.
그 사이로 팝콘처럼 떨어지는 새들.
치마가 찢긴 맨발 소녀들이 쓸려 내려왔다.
물속에 누워 상처가 아무는데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무는 소문들.
유람선을 끌고 다니며
잠든 소녀들을 낚시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백마 탄 왕자는 그만 보내세요.
차라리 손목을 끊으세요. 절필하세요.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그다음엔 무엇이 필요한가.
베이비가 필요한가.
우리는 모두 서로의 베이비.
입맞춤과 시치미의 논란 속에서,
나는 숲을 캐스팅한다.
대본이 필요한 사람들은 강 건너로 돌아갔다.
숲을 나오면 숲은 사라진다.
나는 바닥에 목을 내려놓고 누워 있다.
말 한 마리가 숲 속을 달린다.
말굽 소리가 내 목을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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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
—《현대시》2012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