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335호 우리,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복 받아봅시다 (잠19:2~8)
목회 초였으니까 어언 40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백여 명의 우리 성도 모두를 학교 버스에 태우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뒤쪽에 있는 호텔 뷔페식당으로 갔습니다. 당시는 뷔페식당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호텔뷔페는 그야말로 별천지였습니다. 성도들이 쭈뼛댔지요. 저는 그들에게 맘껏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슬며시 제게 그러더군요. “이렇게 비싼 음식을 먹는 것보다 이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저는 모두 들으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교회 돈 아닙니다.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도 좋습니다만 내가 잘돼야 나눠줄 것 아닙니까? 내가 지지리 궁상인데 누구에게 뭘 나눠줍니까? 여러분을 이곳에 모시고 온 것은 여러분 생각의 틀을 깨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나도 잘살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이 주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럼요, 먹어봐야 맛을 알지요.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보고 느껴봐야 부자가 되고 싶지요.
가난이 정상입니까?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가 지지리 궁상이나 떨고 사는 게 정상입니까? No, 이는 믿는 자들이 잘 사는 것이 무슨 죄인 것처럼 가르쳐서 그런 겁니다. 그들은 ‘잘살아라.’, ‘부자가 돼라.’ 그러면 기복신앙이라 합니다. 아니, 그러면 성경을 찢어버려야지요. 신명기 28장은 나가도 복, 들어가도 복, 떡 반죽 그릇도 복, 심지어 우양까지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말씀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입니다. 이 말씀은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지, 가난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Love’와 ‘Like’는 완전 다른 겁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돈이 싫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저도 돈 좋아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의 노예가 되거든요. 그래서 돈 때문에 몸을 팔고, 사람도 죽이고, 악을 행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정들이 돈을 받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돈 많은 청년을 보세요. 영생과 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돈을 택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랑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라고 하신 것이지, 무조건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찾아오셨지만, 우리가 평생 가난한 자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나사로처럼 천국에 오기를 바라시지만, 나사로처럼 평생 빌어먹고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몸을 누우셨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이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고후8:9). 이것이 복음이요, 우리가 꼭 부자가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도 잘 살고, 누리다가 천국에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선친들을 다 부자, 거부(巨富)로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아브라함이 소떼, 양떼가 넘치게 하셨고, 이삭은 당년에 백배 축복을 주셨고, 야곱에게는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까지 친히 가르쳐주셨으며, 요셉을 약관의 나이에 대국의 총리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여러분, 자고로 병에 물을 담으면 물병이 되고, 따르면 물이 나옵니다. 오렌지 주스를 담으면 오렌지 주스 병이 되고, 따르면 오렌지 주스가 나옵니다. 병에 오물을 담으면 아무리 비싸고 멋진 병이라 할지라도 그건 오물병이고, 따르면 오물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배웠고, 가문이 좋고, 외모가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생각이 썩어 있으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 썩은 것뿐이라는 겁니다. 오물병에서는 절대 오렌지 주스가 나올 수 없거든요. 그래서 뿌리가 썩은 나무에 기대할 것이 없듯, 생각이 썩은 자에게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생각이 결과니까요(렘6:19).
‘나는 부자가 되어 보리라.’, ‘나도 성공해보리라.’, ‘나도 부자가 되어 남을 도와야지.’ 생각하십시오. 별거 아닌 것 같은 그 생각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 것입니다. 사과 속의 씨는 헤아릴 수 있지만 사과 씨 속의 사과는 헤아릴 수 없거든요.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겁니다. 내 생각과 말로 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운전해보셨습니까? 자동차가 맘대로 왼쪽 오른쪽 갑디까? 아니요, 운전자가 어디로 핸들을 트느냐에 따라 자동차는 움직일 뿐입니다. 내 운명이란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방향으로 내 운명이 향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로 운명의 자동차를 끌고 가고 있습니까? 부자 쪽입니까? 청렴을 가장한 가난 쪽입니까?
생각 속에는 상상력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이 상상력은 무한합니다.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 위대한 믿음의 선친들도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이상을 이룬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뭇별을 보며 자손을 상상하더니 열국의 아비가 되었고, 야곱은 무늬 없는 양들 앞에 버드나무와 신풍나무와 살구나무를 놓고 얼룩지고 점 있는 양의 새끼가 나올 것을 상상하더니 상상한 대로 되었고,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하였지요. 요셉은 꿈을 꾼 후에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을 상상하며 고난을 견디더니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상력은 긍정적인 생각, 진취적인 생각일 때 전원이 들어옵니다. ‘내 팔자야’, ‘내 주제에’, 이런 사람에게는 상상력의 전원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꼭 부자가 될 거야.’, ‘최고의 기업이 될 거야.’ 하는 자에게 상상력의 전원이 들어오고, 상상의 나래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거기서 무한한 창조력, 창의력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꼭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한 삭개오에게 뽕나무에 올라가는 기지가 발휘된 것처럼, 친구를 살리고야 말겠다고 생각한 네 명의 친구가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을 생각을 한 것처럼요.
그다음은 움직여야 합니다. 도토리 하나를 그대로 두면 평생 도토리 하나입니다. 나중에는 썩고 말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심고 물을 주고 가꾸면 나무가 되고, 거기서 많은 도토리를 따게 됩니다. 제가 ‘세계를 교구화하리라’는 생각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여전히 도토리 하나 쥐고 있는 셈이었겠지만, 저는 말도 설고 물도 선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반에 몇만 명 들어가는 운동장에 몇백 명만 있었던 적도 있었고, 무산된 집회도 있었지만 꾸준히 심었더니 지금은 어딜 가나 도토리를 따서 남에게 나눠주게 되었지 않습니까?
안 된다,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세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하나님,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주입되면 반드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로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으로 바뀌게 되고,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고, 무채색의 삶이 화려한 것으로 변화되어 인생의 작품이 멋져지고 명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자들이 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만방에 드러내고, 또 사회적으로도 덕을 쌓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고아원도 짓고, 병원도 짓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물이 없는 저 아프리카에 우물도 파주고….
당장 잘못된 생각일랑 벗어버리고 우리, 부자가 되어 남을 도와주면서 사는 멋진 인생이 됩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할렐루야!
뿌리가 썩은 나무에 기대할 것은 없다
인생은 말과 생각으로 만드는 작품이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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