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金洪燮)』 1984년 3월 6일 동아일보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시대; 현대 | 출생-사망; 1915~1965. 03. 16. | 성격; 법조인 |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 | 저서; 무명, 창세기초, 무상을 넘어서
무더운 7월이면 드넓은 연지를 가득 메운 연꽃의 향기 가득한 전라북도 덕진구 덕진공원에 가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과 前서울고검 검사장 화강(華剛) 최대교(崔大敎)선생,
그리고 前서울고법원장 '사도(使徒) 법관' 바오로 김홍섭(金洪燮, 1915~1965)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병로, 최대교와 함께 "법조 3성(聖)"으로 불리는 '使徒법관' 김홍섭 판사의 50 주기에 즈음하여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김홍섭】1915∼1965. 법조인. 전라북도 김제 출생.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시작, 1939년에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 귀국 후 김병로(金炳魯)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활약하다가 광복이 되자 서울지검검사로 임용되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담당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 해 9월 검사직에 대한 회의를 느껴 사임하고 뚝섬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 뒤 당시의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의 간청으로 법조계에 복귀, 서울지방법원판사·고등법원판사·지방법원장·대법원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53년 9월 가족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청렴강직함과 구도자적 생활은 법조계와 신앙계의 모범이 되었으며,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의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사람', '사도법관(使徒法官)' 등의 칭호를 얻었다.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일본의 다나카(田中)와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법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교회사적에 대한 관심도 깊어 전주 치명자산에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순교기념비를 자비로 세우기도 하였다.
1965년 3월 16일 폐암(간암)로 죽었고, 1972년에 율곡법률문화상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명≫·≪창세기초≫·≪무상을 넘어서≫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使徒법관 김홍섭의 저서 중 하나인 "무상을 넘어서",
아래는 언론에 소개된 '使徒법관' 김홍섭 이야기입니다.
『반세기 지나도 빛나는 '法官의 길'』
-'使徒 법관' 김홍섭 판사 50주기
김병로·최대교와 '법조 3聖'
"나도 죄인… 어떻게 판결하나" 사형수와 그 가족들까지 챙겨
추념식에 법조인 200여명 참석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재판장석의 나와 피고인석의 여러분 중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능력이 부족해서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54년 전인 1961년 10월 '경주호 납북 미수 사건' 재판장 김홍섭 부장판사는 피고인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묵념했다. 피고인들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이를 지켜본 고(故) 박찬일 변호사는 1965년 "많은 법정을 다녔지만 재판장이 목메여 말문이 막히고 피고인들이 숙연히 눈물을 흘리는 광경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 타계 1년 전인 1964년 가족 묘지 앞에 선 김홍섭 판사.
그는 가족 묘비에‘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지니라’라고 썼다. /김홍섭 판사 유족 제공
16일 서울 법원 종합청사에서 '사도(使徒) 법관' 김홍섭(1915~1965) 판사의 50주기 추념식이 열렸다. 그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함께 '법조 3성(聖)'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추념식에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상민 국회 법사위원장 등 법조계 인사 200여명과 김 판사의 부인 김자선 여사, 차남 김계훈 서울시립대 교수가 참석했다. 양 대법원장은 추모사에서 "김 판사의 삶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법관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그의 삶과 철학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고, 추념식장에 전시된 사진들을 살펴봤다. 법원과 유족이 2년간 작업해 펴낸 820쪽 분량의 '법관 김홍섭 자료집'도 공개됐다.
191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김 판사는 원평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독학해 1939년 일본 니혼대 법률과에 진학, 1년 만에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됐다.
김 판사는 검정 고무신에 상·하의는 짝짝이로 다녔다. 점심은 밥과 무짠지만 든 도시락이었다. 그와 일한 서정원 전 대법원 도서실장은 "출장을 가면 기차 이등칸만 타는데, 역무원이 '판사가 이등칸에 탈 리 없다'며 다른 사람 놔두고 김 판사만 표 검사를 했다"고 했다.
김 판사는 늘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고, 죽음의 죄를 논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6·25전쟁통에 쌀 배급을 몰래 더 타간 여인을 재판하게 된 그가 지인에게 "나도 배고파서 배급을 좀 더 타 먹었는데 같은 죄인끼리 어떻게 재판하느냐"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피고인과 검사의 사정을 두루 살핀 덕에 그의 재판에 불복해 항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에겐 '사도 법관' 말고도 '사형수의 아버지' '법복 입은 성직자' 등의 별명이 따라다닌다. 사형수들을 찾아다니며 "진정하게 참회하라"고 설득하고, 박봉을 쪼개 책을 선물하거나 가족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가 사형수와 주고받은 편지는 남아 있는 것만 200통이 넘는다.
김 판사는 1964년 3월 서울고법원장으로 옮긴 직후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끝까지 법원을 떠나지 않았다. 1965년 1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사람이란 날개가 없었다'는 제목의 짧은 글이 실렸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고문이다. '꿈을 이루어보려는 希望(희망)을 간직해 본 적이 있었고, 희망을 따라 꿈에 애태워 했던 한때가 있었소. 그러나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 진정 꿈일 수 없고 잡히고야 말 標的(표적)이 어엿한 표적일 수도 없을지라, 이제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오직 평상심으로서 발 앞을 살펴 失足(실족)의 禍(화)를 조심하고자 할 따름이요. 나는 날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 안 것 같소.' 2개월 뒤 그는 가족에게 "행복한 삶이었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출처; 조선일보, 2015. 03. 17>
부장판사 김홍섭이 6·25 난리통에 속임수로 쌀 배급을 더 타간 여자를 재판하게 됐다. 그는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나도 배고파서 배급을 좀 더 타 먹었는데 같은 죄인끼리 어쩌란 말이냐." 김홍섭이 세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곤 말했다. "하느님 눈으로 보면 재판장석 나와 피고인석 여러분 중 누가 죄인일지 알 수 없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는 박봉 쪼개 사형수 가족을 보살폈다. 후배들은 나이 쉰에 떠난 그를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러 기렸다.
▶이찬형은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배워 1913년 일제강점기 첫 조선인 판사가 됐다. 그가 선고한 사형이 집행되고 얼마 안 가 진범이 잡혔다. 그는 법복 대신 누더기 입고 엿장수로 3년을 떠돈 끝에 불가에 귀의했다. 좌선에 들면 절구통처럼 꼼짝 않고 용맹정진했다는 '절구통 수좌(首座)' 효봉 큰스님이다.
▶판사들이 가장 겁내는 것이 오판(誤判)이다. 재판받는 사람 목숨까지 왔다갔다하는 형사재판 판사는 더하다. 23년 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재판부는 유죄 선고에 앞서 "나중에 제3자가 나타나 유서를 대신 썼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스럽다"고 했다. 강기훈은 얼마 전 재심에서 무죄가 됐다. 어느 판사는 소형차 앞자리에서 청바지 입은 여자가 성폭행당하는 게 가능한지 가리려고 아내 손 끌고 주차장으로 데려갔다. 한 대법관은 퇴임식에서 "그간 내 오판으로 고통받은 분들께 사죄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서울고등법원이 지난달 인사 때 68명 부장판사들의 지망을 받아보니 형사부는 한 명이 지원하고 나머지는 민사·행정부를 골랐다고 한다. 작년에 이 법원 김상준 부장판사가 박사 논문을 쓰며 1심 유죄가 무죄로 뒤집힌 사건 540건을 들여다봤다. 거짓 자백(31.5%), 피해자·목격자가 착각한 진술(70%), 과학적 증거의 오류(13.9%)가 오판 원인이었다. 자백에 과학 증거까지 믿을 수 없다니, 형사재판 피하고 싶은 판사들 심정 이해는 간다.
▶한때 1심 형사단독 판사가 "서울시장 안 부럽다" 할 정도로 어깨 힘주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형사단독 안 거치면 잘나가는 판사라 할 수 없었다. 요즘 형사부 판사는 일도 제일 많고 마음의 짐도 커 '3D 업종' '기피 부서'로 꼽힌 지 꽤 됐다.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은 여론 눈치 안 볼 수 없고, 판사가 어떤 결론을 내든 진영 논리 따라 비판하는 게 요즘 법원을 둘러싼 현실이다. 상식과 법리로 재판하고, 판결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출처; 조선일보, 2014. 03. 06>
△ 사도법관 김홍섭, 한 법률가의 사상과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