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일제 피해자 명예회복 한 길,
고 이금주 회장 발자취 ‘재조명’ 눈길
-17일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출판기념회 개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로 한일 간 대립이 여전한 가운데 일제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한 길을 걸어 온 고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의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이어진다.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오는 17일 오후 2시 광주광역시 동구 전일빌딩245 9층 다목적 강당에서 고 이금주 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배우 지정남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날 출판기념회에서는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결성을 시작으로 30여 년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 온 고인의 활동을 돌아본다. 또 ‘역사정의시민모금’ 등 올 한 해 격렬했던 투쟁 과정을 돌아보고, 향후 투쟁을 함께 결의하는 시간을 갖는다. 행사는 추모 공연, 영상 상영, 최봉태 변호사의 회고 대담과 함께 독후감 대회 시상식 등으로 꾸며진다.
출판기념회에 맞춰 개최한 제1회 독후감 대회에는 10대에서 60대까지 전국에서 22편의 글이 접수됐으며, 최고상인 이금주상 수상자에는 상금 50만원이 주어진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이금주 회장의 유족 김보나씨를 비롯해 오랫동안 고인과 인연을 가져 온 일본 지원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 재일교포 이양수씨도 참석할 예정이다. 또 정부의 제3자 변제를 반대하며 판결금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양금덕 할머니의 가족들도 함께해 의미를 북돋을 예정이다.
고인의 삶과 이야기를 담은 창작 오페라도 처음 선보일 예정이다. 오는 27일 오후 7시 30분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는 창작 오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펼쳐져, 고난과 좌절속에서도 인권운동의 꽃을 피워낸 고인의 발자취를 음악으로 꾸며 다시 한번 감동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무료)
올해 초 발간된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는 이금주 회장이 외롭게 부딪히며 맞서야 했던 고뇌와 투쟁이 담담히 풀어져 있다.
192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한 이금주 회장은 결혼 2년 만에 일제에 의해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겨야 했다. 남태평양 타라와섬에 끌려간 남편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1943년 11월 25일 사망했지만 아직 유골조차 못 찾고 있다.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를 결성한 이금주 회장은 1992년 ‘광주천인소송’을 시작으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7건의 소송을 제기해 일제강제동원 문제를 한일 간 이슈로 끌어내는 등 평생을 일제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앞장서 왔다.
법정 진술, 시위, 일본 지원단체와 교류 등으로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가 넘었지만, 일본 법정에서는 번번히 쓴맛을 봐야 했다. 일한회담 문서 공개 소송을 제외하고 그동안 일본 법정에서 ‘기각’ 당한 것만 17차례에 이른다.
특히 요즘처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도 없는 시대에, 이금주 회장은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일일이 일기와 기록으로 남겼다.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메모한 자료는 일본 소송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었고,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역사적 기록물이 되었다.
이금주 회장은 1992년부터 2011년까지 20년간 총 229차례 매월 10일 유족회 주요 임원들과 함께 정기적인 광주유족회 월례회(의)를 가졌는데, 이날 출판기념회에서는 아직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제1차 회의록(1992.1.10.)과 광주유족회 마지막 회의록인 229차 회의록(2011.4.10.) 내용도 처음 소개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일제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대한민국 인권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2021년 12월 12일 끝내 일본의 사죄 한마디를 듣지 못한 채 10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쳤다.
◑문의:062-365-0815 / 사진 자료(월례회 회의록, 행사 웹포스터) 다음 카페 참조.
2023년 12월 14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일본의 만행, 우리는 죽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광주유족회 ‘월례회’ 기록으로 본 그날의 울분-
1992년 1월 10일 가진 1차 회의에는 32명이 모여 경과보고와 함께 안건 토의 순으로 진행됐다. 경과보고는 도쿄 지방재판소에 광주 천인 소송을 제기하기에 앞서 원고들의 소송비 진척 상황이 보고됐고, 이 회장 남편이 끌려가 사망한 기리바시공화국 타라와 섬에서 열린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건립 제막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소식이 담겨있다. 이 회장은 이날 “2주간의 격분과 슬픔과 감격의 눈물이 마를 새 없었다”고 그날의 심경을 밝혔다.
미야자와 총리 방한에 앞서 광주역 앞에서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시위와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한 그날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각각 역할을 분담해 오 총무한테는 경찰에 집회 신고를 접수하도록 당부하고, 준비물로는 어깨띠 500개, 현수막 7매, 피켓 30개 등을 준비하는 등 광주유족회가 분주하게 움직였던 생동감이 기록물을 통해 생생해 전달된다.
이렇게 전국 어느 곳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던 광주유족회이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피해자들이 속수무책 사망하고, 그나마 있던 유족 회원들조차 한 명 두 명 쓸쓸히 떠나면서 모임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첫 회의에는 몸을 비집고 앉을 틈도 없이 32명이 참여한 것과 달리, 20년 후 2011년 4월 10일 229차 마지막 월례회 회의는 단 4명만 참석했고, 그 중 2명은 이 회장과 할머니 곁에서 투쟁을 이어 온 손녀 김보나씨였다.
이날 기록에는 해체 위기에 놓인 쓸쓸한 모습이 행간 곳곳에 묻어 있다. 한 일본인으로부터 윤봉길 의사에 관한 CD 자료를 받은 이 회장은 ‘우리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될 것임’이라고 남겼다.
20년간 이어 오던 광주유족회의 마지막 회의가 된 229차 회의록은 피어린 역사가 누군가에 의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생애 마지막 당부를 담는 것으로 끝마쳤다.
“우리 태평양전쟁 피해자 가족들은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무서웠던 2차 세계대전을 잊어버릴 수도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모두 끝났다고 무심상이다. 우리는 죽더라도 자식들에게 인계해서 계속 제사도 드리고, 또 모임에도 가서 참석 함으로서 사망한 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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