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갑오년 2월 (1594년 2월)
146
2월 초1일 (경술) 맑다. [양력 3월 22일]
147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148
청주의 겸사복 이상(李祥)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에 경상감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에
149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 땅으로 침범하려 하니,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
150
는 것이었다.
151
오후에 우수사위 우후(이정충)을 불러 활을 쏘았다.
152
초저녁에 사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153
이경복(李景福) ∙ 노윤발(盧潤發) ∙ 윤백년(尹百年) 등이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154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얼마 안가 그쳤다.
155
2월 초2일 (신해) 맑다. [양력 3월 23일]
156
아침에 도망군을 실어 내던 사람들의 죄를 처벌했다.
157
사도첨사가 와서 전하기를 낙안이 파면됐다고 했다.
158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159
동궁에게 올린 달본(신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160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61
활 열 순을 쏘았다.
162
바람이 잔잔하지 못했다.
163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허물을 따졌다.
164
2월 초3일 (임자) 맑다. [양력 3월 24일]
165
새벽꿈에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166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167
광풍이 세게 일었다.
168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169
우우후가 빚진 물건을 여러 장수에게 보냈다.
170
원식 ∙ 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보고했다.
171
면천공문 한 장을, 원식이 남해에게 쇠붙이를 바치고서, 받아 갔다.
172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173
2월 4일 (계축)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5일]
174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 ∙ 우조방장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175
저녁나절에 본영 전선 ∙ 거북함이 들어왔다.
176
조카 봉(菶)과 이설(李渫) ∙ 이언량(李彦良) ∙ 이상록(李尙祿) 등이 강돌천(姜乭千)을 데리고 왔다.
177
동궁의 달본을 가지고 내려 왔다. 우찬성 정탁(鄭琢)의 편지도 왔다.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78
순천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의 공문에는 진중에서 시험을 보게하는 장달을 올린 것이 몹시 나쁘니까 그 허물을 캐물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우습다.
179
조카 봉(菶)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 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180
2월 초5일 (갑인) 맑다. [양력 3월 26일]
181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182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백 장을 낱낱이 헤아려 서명하고 화피(활 만드는데 쓰는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183
발포만호(황정록) ∙ 우수사의 우후가 와서 보고, 같이 식사했다.
184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주었다.
185
우조방장 및 우우후 ∙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186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스럽다.
187
저녁에 날씨가 찌는 것 같아 마치 초여름 같다.
188
밤 아홉 시에 비가 내렸다.
189
2월 6일 (을묘) 비가 내렸다. 오후에 맑게 개었다. [양력 3월 27일]
190
순천부사 ∙ 조방장 ∙ 웅천현감 ∙ 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191
어두울 무렵 흥양에서 김방제(金邦濟)가 왔다. 누르고 향기로운 것(柚子?)을 서른 개 가져 왔는데 새로 캔 것 같았다.
192
2월 7일 (병진)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8일]
193
아침에 우조방장이 와서 보고 또 부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했다.
194
어머니와 홍군우(洪君遇) ∙ 이숙도(李叔道) ∙ 강인중(姜仁仲) 등에게 문안편지를 조카 분(芬)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芬)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芬)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195
각 배에 솟장(所志) 이백 여 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196
고성현령(조응도)이 보고에,
197
"적선 쉰 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리 끄승개)에 이르렀다"
198
고 했다. 삼천포권관과 가배량권관 제만춘(諸萬春)이 와서 서울 소식을 말했다.
199
이경복(李景福)을 격군 붙잡아올 일로 내보냈다.
200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201
방답첨사에게 죄인을 잡아오라고 전령했다.
202
낙안군수의 편지가 왔는데, 새 군수 김준계(金俊繼)가 내려왔다고 하므로 그에게도 붙잡아 오라고 전령했다.
203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204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05
2월 8일 (정사) 맑다. [양력 3월 29일]
206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워 무척 걱정된다.
207
봉과 분(芬) 등이 배를 타고 떠났으니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208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
209
"고성 땅 소소포(召所浦:마암면 두호리)에 적선 쉰 여 척이 들어왔다"
210
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 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211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212
경상우병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져 와서 저희 장수 방지기(房人)를 면천하는 일을 말했다.
213
진주에 피란해 있는 전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이야기하고서 저녁에 돌아왔다.
214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215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216
변존서(卞存緖)가 당포에 가서 꿩 일곱 마리를 사냥해 왔다.
217
2월 9일 (무오) 맑다. [양력 3월 30일]
218
새벽에 우후가 배 두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러 나갔다.
219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다. 돼지머리도 가져왔다. 그 편에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들이 굶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 인지도 물었다.
220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았다.
221
이유함(李惟 )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字)를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222
순천부사 ∙ 우조방장 ∙ 우후 ∙ 사도첨사 ∙ 여도만호 ∙ 녹도만호 ∙ 강진현감 ∙ 사천현감 ∙ 하동현 감 ∙ 소비포권관도 왔다.
223
저물무렵에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무군사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시위할 긴창을 수십 자루를 만들 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224
이 날 동궁이 문책하는데 대한 답을 써 보냈다.
225
2월 초10일 (기미) 가랑비와 센바람이 종일 그치지 않았다. [양력 3월 31일]
226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논의했다.
227
2월 11일 (경신) 맑다. [양력 4월 1일]
228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다.
229
종사관의 공문 세 통을 써 보냈다.
230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술 열 잔을 마시니 취하여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우조방장도 왔다. 같이 취했다. 저물어서 활 세 순을 쏘았다.
231
2월 12일 (신유) 맑다. [양력 4월 2일]
232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芬)의 편지에 선전관 송경령(宋慶 )이 수군을 살펴볼 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233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시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234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송경령)이 진에 도착했다.
235
임금의 분부(有旨)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236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 냥이 온다"
237
고 하였고, 한 통에는
238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보며,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
239
고 하였으며, 비밀문서에는
240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던 적어 올리라"
241
는 것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 가지 소식과 역적 들의 일을 들었다.
242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도 왔다.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243
2월 13일 (임술) 맑고 따뜻하다. [양력 4월 3일]
244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245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경령)을 불러 다시 이야기했다.
246
저녁나절에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 ∙ 사량만호(이여염) ∙ 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247
오후 여섯 시쯤에 첫나발을 불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상우수사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248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春元浦)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
249
고 했다. 그래서 곧 나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내어 상의케 하면서 전하게 한 말은,
250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
251
는 것이었다. 미조항첨사 ∙ 순천부사 ∙ 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박영남(朴永男) ∙ 송덕일(宋德馹)이 되돌아갔다.
252
2월 14일 (계해)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 [양력 4월 4일]
253
경상도의 남해 ∙ 하동 ∙ 사천 ∙ 고성 등지에는 송희립(宋希立) ∙ 변존서(卞存緖) ∙ 류황(柳滉) ∙ 노윤발(盧閏發)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卞有憲) ∙ 나대용(羅大用)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254
본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255
정종(鄭宗) ∙ 배춘복(裵春福)도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왔다.
256
장언춘(張彦春)을 천민에서 면하게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257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258
2월 15일 (갑자) 맑다. [양력 4월 5일]
259
새벽에 거북함 두 척과 보성의 배 한 척을 멍에나무(駕木) 치는 곳으로 가서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260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 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신문했다.
261
흥양배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262
또 순천부사 ∙ 우 조방장 ∙ 우수사의 우후 ∙ 발포만호 ∙ 여도만호 ∙ 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263
날이 저물 때에 순찰사(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264
"조도어사 박홍로(朴弘老)의 계본에서 순천 ∙ 광양 ∙ 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는 주문을 바친 바, 수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려왔다"
265
는 공문이 내려왔다.
266
2월 16일 (을축) 맑다. [양력 4월 6일]
267
아침에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柳夢寅)의 비밀 장계초안을 가져 왔는데 임실현감 이몽상(李夢祥) ∙ 무장현감 이충길(李忠吉) ∙ 영암군수 김성헌(金聲憲) ∙ 낙안군수 신호(申浩)를 파면하고, 순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논난하고, 나머지 담양부사(李景老) ∙ 진원현감(趙公瑾) ∙ 나주목사(李用純) ∙ 장성부사(李貴) ∙ 창평현령 백유항(白惟恒)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268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암행어사 류몽인(柳夢寅)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269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270
나라를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271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부사 ∙ 흥양현감 ∙ 우조방장 ∙ 우수사우후 ∙ 사도첨사 ∙ 발포만호 ∙ 여도만호 ∙ 녹도만호 ∙ 강진현감 ∙ 광양현감 등과 활 열두 순을 쏘았다.
272
순천감목관이 진에 왔다가 돌아갔다.
273
우수사가 당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274
2월 17일 (병인) 맑다. [양력 4월 7일]
275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다. 아침에 지휘선에 연기 그을리는 일 때 문에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각 처에 공문을 써 보냈다.
276
오전 열 시쯤에 우수사가 들어왔다.
277
우두머리 군관 정홍수와 도훈도를 군령으로 곤장 아흔 대를 쳤다.
278
이홍명(李弘明) 및 임희진(林希璡)의 손자도 왔다. 대로총통(竹銃筒)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279
우수사가 거느린 전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더욱 한스럽다.
280
순천부사 ∙ 우조방장이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81
2월 18일 (정묘) 맑다. [양력 4월 8일]
282
아침에 배 첨지가 왔다. 가리포 이응표(李應彪)가 왔다.
283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魏大器)에게 명령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284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285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 때마침 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심하게 취했기 때문에 한두번 밖에 못했다.
286
초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왔다.
287
2월 19일 (무진) 가랑비가 종일 왔다. 날씨가 찌는 듯했다. [양력 4월 9일]
288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289
조금 있다가 손충갑(孫忠甲)이 왔다고 보고하기에 불러 들여서 그 왜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더니, 감개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290
저물어서 숙소로 내려왔다.
291
변존서(卞存緖)가 본영으로 갔다.
292
2월 20일 (기사)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4월 120일]
293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294
울(蔚)이 우수사 영감의 배에 갔다가 몹시 취해서 돌아왔다.
295
2월 21일 (경오) 맑고 따뜻하다. [양력 4월 11일]
296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297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담(魚泳潭) 영감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봤더라고 보고했다.
298
청주 의병장 이봉(李逢)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우 영감은 청주영감의 아제이다. 해질녘에 돌아갔다.
299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諸漢國)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 앞바다에 왜선 여덟 척이 와서 대었다고 했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삼도에 전령하기를, 진격할 약속을 내리고서 원균(元均)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300
2월 22일 (신미) [양력 4월 12일]
301
밤 한 시가 막 넘자 제홍록(諸弘祿)이 와서 말하는데,
302
"왜선 열 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春原浦)에 이르렀다"
303
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정찰이나 하라고 명령하고서 보냈다.
304
아침에 순천부사 ∙ 우
305
2월 28일 (정축) 맑다. [양력 4월 18일]
306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307
장흥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308
우수사를 처벌했다.
309
2월 29일 (무인) 맑다. [양력 4월 19일]
310
아침에 종사관과 같이 식사를 하고, 또 전별의 술을 마시며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도 함께 했다.
311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諸漢國)의 긴급보고 내용에,
312
"적선 열여섯 척이 소소포로 들어 왔다"
313
고 하므로 각 도에 전령하여 알리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