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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
단군신화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기원은 중국의 천산(天山) 일대라는 문헌자료가 제시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유래를 서역(西域)으로 확대시키면서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의
동진을 뒷받침하고 있어 향후 우리 학계의 중요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박은용(76) 전 효성여대 교수(인문대 국문과)는 중국 청(淸)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삼위'(三危)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며 20일 이를 처음 공개했다.
흠정서역동문지 4권(卷之四) '천산남북로산명'(天山南北路山名)에 적힌 삼위에 대한 설명은
'古天山東盡境(山海經)三危山西三百五十里曰天山… 一統志天山一名白山自哈密東北境綿亘而西…'
등으로, 삼위산(三危山)의 위치와 삼위산이 곧 천산(天山)이며 이를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을
'산해경'과 '대명일통지' 등의 고서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흠정서역동문지는 박 전 교수가 30년전 일본 도쿄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입수한 지리서로
한자와 만주어.몽골어.아라비아어.타밀어.티베트문자 등으로 된 희귀본이며 '삼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 유일의 고서이다.
'삼위'에 대한 이같은 문헌학적 입증은 단군신화의태백산 위치 설명을 위한 결정적인 학술자료를 제시할
전망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는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내려다 보니 삼위 태백이 가히 널리 인간을이롭게 할만
하다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란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지금까지 '삼위태백'(三危太伯)이란 글귀
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던 게 우리 학계의 실정이다.
따라서 민족의 기원을 밝힌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두고 주로 백두산을 가리키는가 하면 강원도 태백산과
북한의 묘향산.구월산 등지로 해석하는 등 명확한 근거자료나 학설을 제기하지 못한 상태이다.
박 전 교수는 "우리 학계가 민족의 기원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
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천산 일대의 위구르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유사점도 많아 역사.언어.문화인류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구약창세기와 인도철학
구약성서 제2장8절에 있는 이전원, 즉 에덴동산은 동방에 있다는 구절은, 지금의 곤륜산 남쪽에 있는
화전이었다.
예수가 12살 때 동방박사의 인도로 16년간 공부하여 선통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해내북경에 있는 주석에서 구약창세기편을 인용한 것에 따르면, 제석환인(BC8937년)때부터
농기구인 쇠스랑과 밭을 가는 쟁기를 만들었고, 삼과 모시를 심어 옷을 만들어 입기 위한 베틀이 있었
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인도 철학에서는 제석환인을 석제환인이라 하여 샤카라데바남 인드라라고 했다.
즉 샤카라는 석자를 뜻하고, 데바남은 제를 의미하며, 인드라는 환인을 뜻한다. 그러기에 인드라는 인디
아이며, 인디아가 인도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도의 고대어는 범어이다.
범어는 파라문의 주문하는 소리이다. 즉 파라문은 천축국의 속국이며, 천축국은 신독국의 분신이다..
그리고 신독국은 동이국이며, 동이국은 조선이다.
조선의 조상은 삼묘이며, 삼묘의 선조는 묘족이다.
묘족의 조상은 제석환인씨가 상원갑자년 음력 10월3일에 신시 즉 신의 도시를 세우고 정통국을 건국하
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신과 성모와 성자의 삼의 사상과, 인도의 최고 경전이라고 하는 리그베다
경전에서도 삼페타의 신을 풍백, 운사, 우사를 삼신으로 본 것은 모두 한민족의 천인,지의 삼원 일체사상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인도의 리그베다 경전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리그는 알다, 으뜸이라는 뜻이며, 베다는 한민족의 배달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배달민족은 으뜸가는 민족이며, 아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베다란 영어사전에서 고대 인도의 언어는 파라문의 종교문헌이라고 적고 있다.
지금 우리들이 알고있는 인도의 요가는 요가가 아니라 유가이다.
유가란 절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아름다운 옥돌처럼 만들려는 의지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최고의 정신적 육체적 수련법이다.
그렇다면 제석환인씨때부터 유가의 수련법이 옥돌의 원산지라 할 수 있는 곤륜산을 무대로 인간의 정신
수련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도의 최고 경전에서 밝히고 있는 샤카라데바남인드라를 원조로하여 후세에 발달한 것이 유가라고 보
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신수련과 심신수련, 그리고 육체적 수련은 제석환인을 원조로 하여 처음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옥돌처럼 하려는데서 유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먼 훗날 내려오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단전호흡과 심신수련범이 점차 발달되었고, 춘추시대이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무술인 태극권이니, 태권도, 또는 당수 등이 발달하면서 검법등의 호신술 또는 방어
용으로 발달되었다.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서구풍 에어로빅은 단지 육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것일 뿐 인간의 근본적인 정신
수련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보면 기독교나 인도철학에서 시작된 유가는 제석환인으로부터 한민족의 역사적인 뿌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석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석가 이전의 연등은 환인씨의 5대손으로 금선자(BC8011) 가
있고 금선자는 석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불교의 최초 뿌리 조상은 아홉 번의 득도를 한 제석환인이 원조가 됨을 알 수 있다.
불교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가르친다는 뜻이지, 요즘처럼 타락된 불교가 아니다.
노자나 공자처럼 자자를 붙이는 것은 성인의 칭호라면, 석자는 만유만물의 진리를 깨달은 대득도자임을
알수있다.
석가나 석등에게 석자를 붙이는 것은 뒤에 득도했다는 뜻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는 의미로 붙여진
칭호다.
이렇게 본다면 인류의 조상이자 한민족의 시조인 제석환인씨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로 한민족으로부터 나왔음을 정사는 고증하고 있다.
상고사학회장 이중재
이전원(伊甸園)은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라는 책에 나오는데, 상고시대에 한民族의 조상이었던
반고환인천제(盤古桓因天帝) 즉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 B.C.8937년)가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
이전원이었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이전원적건설자(伊甸園的建設者)'편에는 환인씨가 신강성 탑리목분지에
있는 이전원을 건설하였다고 되어있다.
" 上帝所造, 自無理由住進上帝的伊甸園. 眞正的伊甸園其中心區就是今日新疆省的塔里木盆地.
'중국민족기원어탑리목분지(中國民族起源於塔里木盆地)'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上帝之下都, 太帝之居, 天皇被跡的聖地, 我們業已知道, 所謂 開天闢地, 首出御世的盤古氏, 乃套取苗
等族的人類起源設.
천제의 도읍지 아래 太帝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天皇이 자리한 聖地이다.
아문(我們) 즉 君臣들의 가문에서는 道를 알기 위함을 主業으로 했다.
이런 일은 天地를 개벽(開闢)하게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世上에 나타난 으뜸가는 사람이 반고씨(盤古氏)
즉 환인씨(桓因氏)이다. "
바로 12,000년전에 환인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도통(道統)하는것을 주업(主業)으로 삼았다고하니 아마 지금시대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큼 엄청난 정신문명이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이된다.
이와관련하여 다른 몇가지 기록을 언급하고 이전원(伊甸園)을 떠나 삼위산으로 이동해오는 한民族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1992년 호남성(湖南省) 악록출판사(岳麓出版社)에서 발행한 성씨심원(姓氏尋源) [지은이 청(淸)나라때
장주(張澍) ]이란 책의 서문(序文)에 " 초목의 뿌리는 곤륜산(崑崙山)이며 上古代때부터 한일자의 성을
천신(天神), 즉 하늘의 신(神)인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BC. 8937年)께서 姓氏를 사용해 왔다. " 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고려말(高麗末) 이승휴(李承休)는 삼오역기(三五曆記)를 인용(引用)하여 인류역사상(人類歷史上) 최초
(最初)로 나라가 세워지면서 한일(一)자의 姓氏가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BC. 8937年)에 이어 천황씨
(天皇氏 BC. 8479年), 지황씨(地皇氏 BC. 8364年), 인황씨(人皇氏 BC. 8247年)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사실(事實)을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밝히고 있다.
한民族은 상원갑자(上元甲子)년을 기준으로 하여 한 일(一)자의 姓氏를 사용하게 된 것은 한일(一)자가
하늘이라는 뜻에서 한民族은 하늘의 자손(子孫)임을 의미(意味)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있듯이 삼국유사에는 환인(桓因)이 서자(庶子)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삼위태백(三位太伯)에 내려보내 홍익인간 하라고 하였노라고 기록하고있다.
상당히 함축적인 말이지만 일연은 많은 사서들을 참고하여 그렇게 썼을 것이다.
지금도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의 돈황현 남쪽에 있으며 태백산도 그곳에 있다.
더 확실한 기록이다.
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 본문 4페이지에
下視 三危太白, 三危, 山名, 非今 外興安嶺也, 叉 非今 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
하시 삼위태백, 삼위, 산명, 비금 외흥안령야, 차 비금 문화구월산야, 내금지나감숙계,
燉煌縣所在地 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 初降之地 是也
돈황현소재지 삼위산야, 본려묘조반고, 초강지지 시야
아래를 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이 보였다.
삼위(三危)란 산의 이름(山名)으로 지금의 홍안령(興安嶺)이 아니다.
또한 지금의 문화구월산(文化九月山)도 아니다.
지금의 지나 서역편에 있는 감숙성 경계이다.
이곳은 돈황현에 있는 바로 삼위산이다.
본시 구려(九黎)와 묘족의 조상반고가 처음 내려온 땅이다.
구려(九黎)와 묘(苗)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므로 다음에 언급함
즉, 천산에서 환인씨의 무리들이 험난한 산맥의 줄기를 헤치고 죽을고생을하면서 일만리길을 걸어서
東으로 東으로 이동해온 곳이 바로 삼위태백인 것이다.
다음은 율곤이중재선생님의 저서에서 발췌한 글이다.
" 天山은 지금도 天山山脈으로 불려오고 있다.
또 地名도 남아있다.
그러나 天山이 白山이니 雪山이니 하는 말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부 학자들은 白山을 白頭山이라 하여 억지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런 행위는 참된 歷史를 오도하는 위험한 짓이다.
天山은 분명히 중국 서부 끝 국경선 주위에 있으며 따라서 南部까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반고환인(盤固桓因) 때부터 黃帝에 이르기까지 6250여년이 흐른 뒤에는 天山의 南部는 곤륜산
(崑崙山)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BC.3898년까지 유소씨(有巢氏)는 天山이었던 곤륜산(崑崙山)의 이전동산(伊甸園)에서 서석기 文化時代
에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것이 이전(伊甸)은 우전(우전 또는 우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8년 6월 북경에서 제작한 4백만분의 1로 된 중국지도에는 우전(于田)으로 지명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옛 문헌과 지도에는 우전(于 : 성할 전)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 많다.
天山은 白山이다.
그렇다면 宇宙와 萬物 또한 흰색이다.
한民族은 대대로 흰옷을 입고 살아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며 필연적인 자연의 사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民族은 이전낙원(伊甸樂園)에서 점차 동쪽으로 이주해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돈황(敦煌)의 三危太白이다.
이것은 天山이 끝나는 동쪽 부분이다.
三危太白을 三危山이라고 하며 太白山이라고도 한다.
또는 黑水三危山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黑水太白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天山의 남쪽 곤륜산 속에 이전원(伊甸園)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
이전(伊甸) 아니 이덴 또는 에덴동산은 분명히 天山이었던 곤륜산(崑崙山)에 있다.
그러므로 이전낙원(伊甸樂園)은 한民族의 樂園이자 故土였다.
왜냐하면 이전동산은 천제울국(天帝울國)의 아홉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홉 나라는 九族을 뜻하며 九夷族이다.
九夷의 선조는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반고환인(盤固桓因)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東夷의 선조였던 桓因氏의 부족국가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桓因은 모든 史書에서 밝혀진 대로 天山의 남쪽 곤륜산(崑崙山)정에서 東으로 이주해왔다.
그러므로 天山과 白山, 雪山은 이전낙원(伊甸樂園)과 함께 잊을 수 없는 한民族의 靈山이자 故鄕인 것이다.
1981년 2월 홍콩에서 발행된 이당(李唐) 著「上古史」에는(본문 2쪽 참고) 上古 때부터 내려오던 민족은
모두동방민족(東方民族)이며, 황제(黃帝) 이후 요, 순, 하, 은, 주 (堯舜夏殷周)로 부터 고구려 주몽(朱蒙)에
이르기까지 묘족(苗族)의 후예임은 의심할바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도지면:대구 매일신문
보도일자:2002년3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