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엔 이렇게 인사해 보세요…
“혼자 계시면 식사 함께하실래요”
김홍준 2026. 9. 12. 00:03
50년간 400만통…‘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
하상훈 생명의전화 원장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도록 ‘선’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연결이다. 서로의 고통을 얘기하는 것. 들어주는 것은 고통에 길을 내주는 것이다.’(하상훈 『목소리 너머 사람』 중)
‘고통에 길을 내주는 것.’ 문득 이 표현이 궁금했다. 책을 쓴 하상훈 사회복지법인 생명의전화 원장이 답했다. “누구나 고통이 있어요. 그 고통을 유독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죠. 또 누구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줄 수 있어요. 가만히 들어주는 것으로도 응어리진 고통을 저 멀리 망망대해로 뺄 수 있게 됩니다.”
50년. 생명의전화가 누군가와 연결해 온 시간. 1976년 9월 호주의 라이프라인(LifeLine) 시스템을 도입해 위기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 어디서든 1588-9191. 그렇게 400만 건 넘게 연결됐다. 다음은 그중 하나.
새벽 2시. 한강 다리 한복판. 40대 초반의 K씨. 이곳에서 왠지 모든 고통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별안간 별빛이 전화기를 비췄고,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를 잡았다. “살려주세요. 그런데 살고 싶지 않아요.” 그는, 살았다.
이 전화를 받은 이는 하 원장이었다. 1988년부터 38년을, 그러니까 생명의전화 역사의 8할을 함께한 그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지난해 『목소리 너머 사람』을 내놨다. ‘자살 예방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9일. 그는 생명의전화 상담원처럼 기자의 질문을 찬찬히, 넓게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깊게 답했다. 묵직했다.
Q : 자살률이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입니다.
A : “자살 사망자 수가 2024년 1만4872명으로 2011년(1만5906명) 이후 최다입니다. 지난해 잠정치는 1만3774명으로 줄었다지만, 걱정입니다. 10만 명당 자살률이 29.1명입니다. 2003년부터 22년째 부동의 1위. 불명예죠. OECD 평균이 11.1명인데, 3배 가까워요. 하루 40여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겁니다.”
힘들면 도움받아야…우리가 연결고리
Q : 그런데 우리 남성(41.8)의 자살률이 여성(16.6)의 2.5배나 됩니다.
A : “남성은 보다 치명적인 방법을 시도합니다. 게다가 도움받는 걸 꺼리는 경향도 다분해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약해 보이지 않으려는 자의식이 작용합니다. 반면 여성은 소통이 상대적으로 원활해요. 서로 처음 보는 여성들이라도 신세 한탄이라도 하죠. 실제 생명의전화 이용자 중 여성이 70%입니다. 전화를 건 것만으로 다행이죠. 연결됐으니까요.”
Q : 젊은 층 자살은 왜 늘어나나요.
A : “고립·은둔이 많습니다. 미래가 암담하다는 거예요. 학교도 직장도 어느 정도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고. 청소년을 위한 SNS 상담 채널도 운영 중인데, 초등학생까지 입장하고 있습니다.”
하 원장은 내내 ‘연결’을 얘기했다.
Q :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군요.
A : “도움 주는 건 좋고, 받는 건 나쁘다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힘들면 도움받아야죠. 이게 자연스러운 문화가 돼야 합니다. 연결은 연결을 낳아요. 사회복지기관·금융채무상담기관·고용센터·의료기관…. 저희가 연결고리가 되는 거죠.”
이재명 대통령은 “자살은 사회적 재난”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 그러면서 ‘국가자살예방전략’을 내놨다. 5년 내 자살자 수를 ‘1만 명 이하’로, 10년 내 자살률 OECD 1위에서 벗어난다는 목표. 하 원장은 이와 관련 “자살을 사회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Q : 사회적 이해라뇨.
A : “자살은 모든 사회 이슈의 출발점이자 집결지입니다. 사업 실패, 고용 불안, 채무, 주가 폭락, 집값 박탈감, 빈곤, 과중한 돌봄, 오래된 고립과 은둔, 신체·정신적 장애 등. 한 문제가 다른 문제와 겹치고 결국 자살로 향합니다. 연쇄적입니다. ‘연결’로 그 연쇄 작용을 끊어야 합니다.”
에릭 엘보젠 미국 듀크대 교수는 4개 이상의 사회적 문제가 있는 경우 자살 시도 가능성이 20배 증가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 원장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중에서도 상담심리학에 관심이 컸단다. 1988년 생명의전화에 ‘봉사자’로 들어갔단다. 남을 돕는다는 것, 생명을 지키는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 그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천직이 됐다. 2003년부터 쭉 원장이다. “장기 집권이죠”라며 그는 웃었다.
Q : 위기에 처한 사람도 웃게 됩니까.
A : “그럼요. ‘상담원 선생님 덕분에 삶에 눈뜨게 됐습니다’라고 하죠. 저희 눈에는 그들의 미소가 보입니다. ‘숨을 다시 쉬게 해줘 감사합니다’라고도 하죠. 호흡 소리가 들립니다. 정말 보람찬 순간, 저희의 존재 이유죠.”
Q : ‘저희’라면.
A : “전국 16개 센터 상담원 1500여 명이 30여 개 회선의 전화로 연 10만 건 상담합니다. 무보수, 철저히 자원봉사죠. 대학교수, 성직자, 주부 등 다양합니다. 전 우리 상담원 분들을 존경합니다. 상담원들은 전화기 너머 누군가를 돕고, 원장인 저는 그런 상담원을 돕고.”
30여 년 봉사를 해온 상담원이 유명을 달리했다. 유족인 작은 딸이 장례식장을 찾은 하 원장에게 뭔가를 보여줬다. 생명의전화 회보. 그곳에 아버지가 짧게 쓴 글. 별세 며칠 전 유서처럼 건넨. ‘가장 잘한 일,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적힌.
상담은 인적 사항을 안 묻고, 일회성이 원칙이다.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 상담자가 사연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과 다시 통화하는 경우는 0.1%도 안 된다고.
Q : 기억에 남는 상담이 있습니까.
A : “실직한 30대 후반 남성이었어요. 대출 만기가 다가오자 죽겠답니다. 1시간 넘게 통화하고 제가 약속을 하도록 했어요. 또 죽고 싶은 생각이 들면 다시 전화해라, 지금 나와 나눈 얘기를 아내와 해라. 다짐받는 것, 굉장히 중요해요. 되새기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기적같이 다시 전화가 온 겁니다.”
그 남성은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고, 아내는 깜짝 놀라며 “당신 죽으면 나도 같이 죽는다” 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 남성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또 다짐했단다. 하 원장은 “당시 퇴근길에 날아갈 것 같았다”고 전했다.
Q : 상담원 통화가 길겠네요.
A : “보통 30~40분이에요. 다른 분들 말씀도 들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3~4시간도 걸려요. 이런 비유가 맞나 싶은데, 영화 제목처럼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가 많아요. 그만큼 밤에 더 힘들다는 거죠.”
Q : 계절적으로 보면 봄에 그렇고요.
A :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고 표현하죠. 학교·직장·이사·결혼 등 새롭게 시작하는 게 많잖아요. 봄에는 일조량도 늘면서 사람이 들떠요. 보통 사람은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하지만, 우울감이 있는 사람은 쉽게 안 되는 겁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증세가 심해지죠. 명절, 다가오는 추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즐거운 명절’이라고 하는데, 자신은 전혀 즐겁지 않거든요. 고립감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유족이 최대 피해자, 사후 예방 중요
하상훈 생명의전화 원장이 지난 9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사무실에서 상담 통화를 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하 원장은 “이런 특성에 맞춰 자살예방 정책을 수립하면 보다 효과적”이라고 제안했다. 하 원장은 자살 시도자들과 자살 사망자들의 유족에 대한 ‘사후 예방’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살 시도자들은 문제가 봉합된 채 지역사회로 다시 들어갑니다. 다층적인 연계로 관리해야 합니다. 자살 유족은 가장 큰 피해자예요.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사회적 낙인이 심하고, 죄책감·수치심·우울감으로 위축됩니다.”
Q : 유족 관리가 자살 예방이네요.
A : “네. 1명이 자살하면 최소 6명이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습니다. 그 고통은 평생 가요. 결국 다른 자살 고위험자를 낳습니다. 자살의 전염이죠. 2024년 1만4000여 명이 자살했으니 8만여 명의 유족이 생겼잖습니까. 부모를 잃은 청소년 유족의 경우엔 경제·법률·건강·진학 등 복합 위기가 찾아옵니다.”
생명의전화는 유족을 위한 힐링캠프와 자조모임을 마련하고 쉼터 ‘새움’도 만들었다. 지난달부터는 정부의 자살예방상담전화 109와 협력 중이다.
Q : 어떤 협력인가요.
A : “이번 달까지 두 달간 야간에 109에서 못 받고 넘어오는 전화에 응합니다. 하루 40통 정도죠.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민관협력도 이어지면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 ‘누가 거기 있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는 채널이 항상 열려 있어야죠. 그게 ‘선(線)’입니다. 유선이든 무선이든. 인간애를 갖고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그 사람이 혼자 있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공지능(AI)이 대신할 수 있다고요? AI에게는 심장이 없습니다.”
Q : 누구든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A : “그럼요. 누구나 양가감정이 있어요.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시소처럼 왔다갔다하는 거죠. 10분이라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그리고 한마디 보태주는 것. ‘밥은 먹었냐’고요.”
하 원장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이렇게 인사해 보세요. ‘혼자 계시면 식사 함께하실래요?’ 삶의 끈을 붙잡게 할 수 있습니다.”
‘끈은 죽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끈으로 우리를 다시 묶어 주었다.’(박정헌 『끈』 중)
김홍준 기자
ㅁ
'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 인터뷰 "전화가 아니라 '삶의 끈'... 비판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아무튼주말]
https://www.youtube.com/watch?v=XEs3mnWzYLQ
조선일보 2025. 3. 15. #속보 #뉴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