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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에페 3,2-12
복 음 : 루카 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올 때를 물었고,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 가운데 그 확정된 날짜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루카 12,39) 미리 준비하는 것처럼
그때를 알면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때를 알려 주시지 않았을까요?
마치 시험 날짜를 알려 주지 않고 치르는 시험과 같습니다.
학생 때 가끔 그런 시험들이 있었습니다.
언제 시험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복음에 나오는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올 시간을 모르기에 언제라도 주인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종의 처지라면, 사실 주인이 언제 오든,
그때에 일어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을 결정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그분의 다시 오심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여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을 준비하며 살았고, 수천 년이 지난 뒤에라도 주님께서 오실 때
그들은 어제 만났던 주님을 오늘 다시 만난 듯 친밀하게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마지막 날에 대한 기다림이 약해졌고,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 대하여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종처럼 당황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바로 우리의 오늘을 살펴봅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아이돌 가수가 자기의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얼마나 해야 열심히 한 것인 줄 몰라서 계속 연습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코피가 나면, ‘아! 오늘 연습 좀 했나 보다.’ 싶었다고 말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멋지고 화려한 모습의 아이돌을 보지만,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열심히 해서 코피 나본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코 후비다가, 또 친구가 던진 공에 맞아서 코피 난 것 외에는….
그러다 문득 들은 생각은 ‘그렇게 열심히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일까?’라는 것입니다.
아이돌 연습생들 숫자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코피를 쏟을 정도로 열심히 해도 데뷔하지 못하는 연습생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즉, 열심히 해도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번아웃 증후군(만성적 스트레스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하지요.
노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행사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예행연습까지 하며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당일 엄청나게 비가 오면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노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를 인정할 수 있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쓸데없는 것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안에서의 의미를 찾고 이를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 따르는 것 역시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과정 안에서의 의미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주님 따르는 것 자체에서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명심하여라.”라고 하시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이 준비는 무엇일까요? 코피 쏟을 때까지 일하면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시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고 있다면
주인이 오시는 날 큰 후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자주 죄에 빠지고 맙니다.
즉, 우리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또 곧바로 주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큰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곁에 충만하게 내려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앞 장면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에 이어,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단지 잠들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깨어있으려면, 먼저 ‘대체 무엇이 맡겨졌고’,
‘무슨 일이 맡겨졌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먼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사실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곧 ‘나에게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양식은 이미 정해져 주어졌고,
그것을 때에 맞추어 소홀함이 없이 잘 챙겨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 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은 ‘슬기로움’으로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일입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의 말·샘 기도>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저는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하오니,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 집행과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이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카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저런 모양으로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12,40).
하느님의 자녀로 뽑힌 우리는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혹 이미 많이 받았는데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많이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파랗게 보입니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갛게 보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진흙 속에서 피는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게 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이 알고, 더 잘할 것 같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사제 생활 33년을 했지만, 상황이 바뀐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과거의 굴레에 잡혀있으면,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린다면 현재는 늘 근심과 걱정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몸을 맡기고, 즐기면 언제나 마음은 햇살 가득한 날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속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관념의 세계를 따르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연대와 소통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또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민족, 사상의 벽을 넘어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자연과 생명과 연대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댕, 메튜 폭스, 토마스 베리, 토마스 쿤과 같은 분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을 넘어서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품으로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순간에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교성인들에게 지복 직관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였고, 늘 기도하였고, 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조욱현 토마 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가장 궁극적인 준비, 가장 중요한 준비, 주님 오심의 준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준비’라는 표현이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늘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하루해가 짧습니다.
이제 슬슬 바람도 불고 날씨가 추워지니, 제 머릿속에는 월동 준비로 가득합니다.
난방비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하나?
동파 방지를 위해서 어디 어디를 챙겨야 할텐데...
주말에 오시는 피정객들 메뉴는 무엇으로 준비해야 하지?
내일은 플라스틱을 수거하는 날인데, 미리 준비를 해야할 텐데...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바쁘게 지내다가,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준비로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준비,
주님의 날을 위한 준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위한 준비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준비는 지극정성, 환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잘 준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존경과 친절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별 다섯 개짜리 숙소나 레스토랑 같은 곳은
고객들을 위한 준비에 얼마나 만전을 기하는지 모릅니다. 그 어떤 것 하나 소홀함이 없습니다.
최상의 고객 만족 서비스 앞에 사람들은 거금을 투자하면서도 흡족해하는 것이지요.
완벽한 준비는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살다 보면 수많은 준비를 하게 됩니다.
식사 준비, 여행 준비, 수술 준비, 이사 준비, 시험 준비...
그런데 가장 궁극적인 준비, 가장 중요한 준비가 있습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열심히 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실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어떤 것일까요?
입에서는 항상 진실되고 거룩한 말이 흘러나와야겠습니다.
귀로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 경건한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눈은 지속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마음은 성령의 불로 활활 불타올라야겠습니다.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12,47)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다른 사람들은 제 성격이 내향적이라면 의심스럽다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짓지만, 전 분명히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흔히 젊은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MBTI에서 전형적인 INTJ입니다.
물론 기질적으로 욱하는 성향이 강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하기에
쉽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전 분명 내성적이기에 낯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위축되기도 합니다.
다만 직업의식(?)이 투철해서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할 때는 그러하지 않지만,
평소의 제 모습은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아울러 저는 M.E 주말에서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솔직하며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고, ‘시간’에 정확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무슨 일을 사전에 생각하고 준비하지만
한번 결정하고 난 다음에 그 일에 매진하고 충실한 편입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준비되면 계획을 실행에 옮겨왔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도 저처럼 먼저 생각하고 준비하고 난 뒤 실행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매사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때론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운전하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적인 사고나 상황을 만나게 되듯이
예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는 당연히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해서 변명하면서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는 예상하지 못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맞았을 때는 변명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나 여러분이 게을러서 혹은 더디 일어나려니 하면서 준비하지 않았을 뿐,
일어날 일이었고, 분명히 다가올 일이었음에도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 닥칠 낭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때가 되면 주님은 분명 오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어제 복음의 주제와 같습니다.
그 시간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반드시 오시게 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 준비하여 깨어 기다리도록 거듭 당부하시고 강조하십니다.
도둑이 예고하고 집을 털러 오지 않듯이,
사람의 아들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베드로 사도는 이 비유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12,41)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베드로에게 답을 주시기보다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은 집사입니다.
집사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종의 신분이지만, 다른 종들에 대해서는
주인을 대신해서 종들을 관리하는 신분입니다.
여기서 집사는 다름 아닌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교회의 성직자들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직-사제직-왕직을 수행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빌미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마지막 날에 가서는 소홀히 한 만큼의 대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12,47)라는 이 말씀은
정말 무섭고 떨리는 말씀이며 그만큼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기에
역설적으로 저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살아야 하겠다, 는 각오를 새롭게 다집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 교회의 집사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충실하지 않은 성직자들에게
그날엔 하느님께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가 교회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성직자(=교황, 주교, 사제)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종말의 심판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어떤 누구도 열외는 없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누구나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강하게 표명하신 것처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십니다.”(12,48)
물론 많이 주신 만큼, 많이 맡긴 만큼 그에 따른 계산의 순간은
개인적으로 죽음의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보다는 매일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 결산의 순간처럼 늘 깨어 준비하고 살아간다면,
그날은 두렵고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다리던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축복으로 충만한 날이 되리라 믿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시는 주님”(마태28,20)은
항상 매 순간 매일 영적으로 친밀하게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오시기에,
그분의 몸짓과 음성 그리고 그분의 발자국 소리에 민감해진다면,
그분의 오심은 결코 두렵기보다 설렘과 흥분으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읽고 감명받았던 「단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이란 글을, 기도를 대신해서 옮깁니다.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겠습니다.
덜 가지고 더 행복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겠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는 대신 오늘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는 대신 새로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아픔을 견디겠습니다.
바쁘다고 말하는 대신 쌓인 일을 하나씩 해나가겠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겠습니다.
남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대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겠습니다.
갖지 못함을 불평하는 대신 베풀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살아있음을 기쁘게 즐기겠습니다.
단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