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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페 4,1-6
복 음 : 루카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지난 며칠 동안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도 마지막 날이 가까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시대의 표징들에 마지막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아보고,
그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말씀과 관련하여 보았던 것처럼
언제 마지막 날이 오든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저마다 그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죽음에도 적용됩니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는 종말입니다.
내 죽음의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이론상으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잊고 삽니다.
세상 종말을 잊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정 사진을 미리 준비하면서 장수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면서도 그 말을 입에 담기가 불편하여
죽음을 미루는 듯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분명히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고,
죽음과 마지막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여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마지막 날은 도둑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때로 연옥에 관한 말씀으로도 풀이됩니다.
“마지막 한닢까지”(루카 12,59) 갚아야 할 그때를 생각하며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내가 살아있고 또 화해를 하여야 할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화해하여 죽음을 준비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그 책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습니다.
헤르베르트의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 책을 출판했던 출판사 사장님께서도 요즘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되지 않는 책 읽기인 것 같지만,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넓어집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저의 상상력을 더해서 새로운 삶을 떠올려
지금을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작가의 통찰에 공감과 비판을 반복하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일회적 말씀이 아니라, 지금에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묵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지금도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또 어느 성경 말씀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자기변호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변화는 예측하여 대비하면서,
절박하게 닥친 시대의 변화는 왜 올바로 읽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하시지요.
읽을 수 있음에도 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각종 전례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더 중요하다고, 바빠서 주님을 알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위선적인 모습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분명히 마지막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심판자 앞에 섰을 때 과연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될까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두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단순히 이 세상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이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 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 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의 회칙인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 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 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백분 토론’을 보았습니다.
주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고, 이스라엘과 이란은 멀리 있기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확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이란과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란도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기에
미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결국 문제의 열쇠는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으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이란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고 해도
이란은 큰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합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은 적다고 합니다.
1년 넘게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전쟁을 이어가고, 전선을, 헤즈볼라를 넘어
이란에까지 넓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1,000명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1년간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은 40,0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도, 국제사회도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국내 정치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형사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총리는 전쟁을 계속 이어가면서 지지도가 올라가고,
전쟁의 성과로 형사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수자원이 더 필요해졌다고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물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레바논 남부 지역에 있는 강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레바논 남부에 있는 헤즈볼라를 몰아내면서
자연스럽게 레바논 남부에 있는 강을
이스라엘의 수자원으로 확보하길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중동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유엔에서 천명한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합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1,000년 넘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개의 국가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국제사회와 미국이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요청하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언론에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크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폭력과 전쟁의 방식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복음의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는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받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 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 구절 중에 ‘은총의 독방’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방은 아파트 안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 대상자가 쓰는 독방입니다.
독방! 하니 세상 편하겠네, 생각하시지만,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그냥 독방이 아니라 은총의 독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그분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셨던 분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 안에 살아가니,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천국을 사셨던 분입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 분...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부단히 초대 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런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그냥 수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벽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빡센 하루 일과를 보낸 지금,
별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하루였음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형
박상대 마르코 신부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하신 첫 말씀이다.
바로 이 “오늘”과 더불어 우리 인간의 실존은 역사의 새로운 시간으로 돌입하였다.
이 시간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이 된다.
이 시간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기 때문이다.(루카 11,2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위기이자 동시에 그 완성을 의미한다.
문제는 사람이 과연 이 시대의 징표를 파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루카 10,22),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는 능력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예언자들과 제왕들은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류역사의 다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지금 보고 듣는 것을 그들도 보고 듣기를 원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격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아는 제자들에게
곧 들이닥칠 마지막 날에 대하여 준비하고 기다릴 것을 거듭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다수가 섞여 있는 군중을 향하여
시대의 징표를 깨닫지 못함을 한탄하신다.
당대의 삶들은 구름과 바람의 변화를 보고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정작 중요한 시대의 징표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었건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다.
오히려 예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들이었다.(루카 11,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기적,
즉 회개의 설교 외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으며(11,29-30),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12,31)고 하셨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거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하나하나가 이미 충분한 기적이요 표징이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우거나 얄팍한 자존심으로 일상을 재촉할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탓하며 나쁜 습관에 소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판단을 앞세워 그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57절)
타인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법정에 이르러 실형을 받기 전에 서둘러 화해하여야 한다.(58절)
마지막 심판에서 實刑을 선고받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50절)
실형이 煉獄이라면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풀려나지 못할 것이고,
실형이 地獄이라면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