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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개척정신
12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유럽 변방의 작은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은 유럽 최초의 단일민족국가다. 당시 유럽국가에는 민족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미했지만 포르투갈은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 14세기말 국경 분쟁에서 120만명의 인구밖에 없었던 작은 국가 포르투갈은 예상과 달리 강대국 스페인을 격파했고, 이후 양국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당시 스페인을 물리친 포르투갈 국왕은 주앙 1세(John Ⅰ, 1385-1433)였다. 그의 셋째 아들 엔리케 왕자(Dom Henrique O Navegador, Henry the Navigator, 1394-1460)는 포르투갈 해양 패권 사업의 기초를 다져 항해 대발견의 시조가 되었다. 영국 역사가들이 그를 ‘항해자’(Navigator)라고 불렀다.
항해하지 않은 항해자 엔리케 왕자
그는 개인적인 인생을 포기하고 과감한 모험을 선택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아프리카와 대서양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투자했다. 1415년 세우타 정복을 통해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 1418년 엔리케 왕자는 포르투갈 최남단 사그레스에 거점을 세우고 그리스도 기사단장이었던 그는 기사단 재정으로 항해 학교를 설립했고 천문대와 도서관도 세웠다. 사그레스에서 20km 떨어진 라고스에 항구와 조선소를 세웠다. 이후 사그레스는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항해 사업 본부가 되었다. 엔리케 왕자는 1460년 사그레스 앞바다의 거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40년 간 이곳에 머물렀다.
항해왕자 엔리케가 대양 항해를 준비하던 사그레스곶(Cabo Sagres).
엔리케 왕자의 명성이 유럽에 퍼지면서 베니스와 제노바의 수많은 항해사들이 포르투갈로 몰려와 사그레스 기지의 두뇌가 되었다. 엔리케 왕자의 사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당시 유럽 최고 지도 제작자인 유태인 예후다 크레스케스다. 마요르카 섬에 살다가 프로투갈로 이주해 온 크레스케스 덕에 엔리케 왕자는 당시 유럽에 존재했던 모든 지구 관련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제일 먼저 포르투갈에서 멀지 않은 마데이라 제도와 아조레스 제도를 개척하고자 했고, 발견한 자에게 그 섬을 봉토로 나누어 주었다. 이곳에서 설탕과 술이 생산되기 시작되면서 이것은 포르투갈 왕실에 상당한 재정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세우타 원정
엔리케 왕자는 1394년 3월 4일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잉글랜드 랭카스터 가문의 필리파(Philippa of Lancaster) 왕비의 셋째 아들로 포르투갈의 오포르투(Oporto)에서 태어났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 한 살 때인 1415년 8월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세우타(Ceuta) 요새에 대한 점령 작전에서였다. 지브롤터 해협의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세우타는 당시 북아프리카 이슬람권의 무역중심지였다. 주앙 1세는 국내의 불만세력들의 관심사를 해외로 돌려 중앙집권책을 강화하고, 아프리카산 금이 유입되는 통로인 지브롤터 해협의 통항권을 확보하고, 기사서임을 받기 위해 후보로 나선 세 명의 아들이 마상시합(tournamant)을 하기보다는 실전에서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세우타 원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큰 형 두아르뜨(Duarte)와 둘째 형인 페드로(Pedro)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선 엔리케 왕자는 8월 24일 세우타를 공략한지 불과 하루 만에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우타 원정에서 포르투갈은 고작 8명만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엔리케 왕자는 세우타에서 쌀, 밀, 소금 등의 일상물품 이외에도 후추, 정향(丁香), 생강 등의 이국적인 동양 상품이 거래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세우타 원정의 성공으로 포르투갈은 이슬람 세력권 안에 하나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우타는 모로코로 진출할 수 있는 전진기지이자 지브롤터를 공격할 수 있는 공격기지였던 셈이다. 포르투갈은 소수의 수비대만 남겨놓고 본국으로 귀환하였으나, 무슬림(muslim)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주앙 1세는 엔리케 왕자를 세우타 총독(governor)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급박한 위험이 없는 한 세우타에 상주하지는 않아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세우타에 머물면서 이른바 ‘침묵의 교역(silent trade, 언어가 통하지 않는 무슬림 상인들과 아프리카인간의 거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1418년 모로코의 무슬림 세력과 그라나다의 무슬림 왕국이 연합하여 세우타를 탈환하기 위하여 공격해 왔다. 본국에 머무르고 있었던 엔리케 왕자는 수비대를 원조하기 위하여 세우타로 되돌아 왔으나, 이미 수비대가 무슬림 세력을 격퇴하고 난 다음이었다. 이에 엔리케 왕자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의 본거지인 그라나다를 공격하기로 하고 함대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격준비가 거의 완료되어 가던 시점에서 주앙 1세가 원정을 중지시켰기 때문에 엔리케 왕자는 리스본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세우타>
사그레스의 거류지
엔리케 왕자는 부왕인 주앙 1세의 국사를 돕도록 내정되어 있었으나, 그가 이 일을 사양하자 주앙 1세는 1419년 엔리케 왕자를 포르투갈 남단의 알가르베(Algarve)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오늘날의 세인트 빈센트 곶(Cape St. Vincent)에 사그레스(Sagres, 포르투갈어로 ‘신성한 곶’)라는 거류지를 건설하고, 근 40여 년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1420년부터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정규적으로 원정대를 파견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사그레스를 아프리카 탐험의 중심지로 삼고 유럽 각국의 항해가, 천문학자, 조선공, 지도제작자들을 초빙하여 재래선을 개량하여 카라벨선(caravel)을 개발하고 지도를 제작하고 여러 가지 항해기기를 개발하고 선박을 개량하였다.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
부왕 주앙 1세가 1433년에 사망하자 엔리케 왕자의 큰형인 두아르뜨(재위 1433-1438)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두아르뜨는 팽창주의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1437년 탕헤르(Tangier) 원정이 실패하여 두아르뜨의 막내동생인 페르난도(Fernando)가 무어인들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무어인들은 세우타를 반환하고 보상금을 지급하면 페르난도를 석방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 궁정이 세우타를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페르난도는 수감생활을 하다 1443년에 사망하였다. 막내 동생을 구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두아르뜨는 재위에 오른 지 불과 5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두아르뜨의 2남 3녀 중 장남인 아퐁소 5세(Afonso V, 재위 1438-1481)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인 아라곤의 레오노르(Leonor de Aragão, 섭정 1438-1441)가 섭정으로 통치하였다. 엔리케 왕자와 이복형제인 아퐁소 드 바르셀로스(Affonso de Barcelos) 등과 같은 팽창주의자들은 레오노르의 섭정을 지지했으나, 엔리케 왕자의 둘째 형인 페드로는 레오노르의 반대편에 섰다. 페드로는 리스본과 기타 도시의 부르주아 계층과 하층민의 지원으로 큰 세력을 얻고 있었다. 1438년에서 1441년 사이에 벌어진 시민전투에서 온건파인 페드로 측이 승리를 거두자 레오노르를 섭정직에서 몰아내고 페드로(섭정 1441-1448)를 섭정으로 옹립하였다.
이처럼 궁정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엔리케 왕자는 형수인 레오노르의 섭정을 지지함으로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그는 애초부터 궁정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둘째 형인 페드로가 형수인 레오노르를 몰아내고 섭정직을 맡게 되었을 때도 페드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실제로 페드로는 엔리케의 해양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1425년부터 잉글랜드, 플랑드르, 독일, 헝가리 등 전 유럽을 순회하기 시작한 페드로는 1428년 귀국하는 길에 이탈리아에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구해 와 엔리케 왕자를 위해 포르투갈어로 번역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궁정에서 정쟁이 진행되는 동안 아프리카 탐험은 지진부진하여 1420년 처음으로 원정대를 파견한 이래 14년 동안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아랍인들이 미신을 퍼뜨렸는데 보자도르 곶 남쪽은 펄펄 끓는 ‘암흑의 녹색바다’(green sea of darkness)라고 해서 두려워했고, 따라서 당시 뱃사람들이 남쪽 바다로 항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대 바다는 그 지역의 날씨만큼이나 뜨겁기 때문에 그 해역을 항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검둥이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항해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려움은 질 이아네스(Gil Eanes)가 1434년에 보자도르 곶(Cape Bojador)까지 항해하고 돌아옴으로써 남쪽 바다도 북쪽 바다와 같이 항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마침내 미신의 벽을 넘어 풍요로운 아프리카 땅을 발견하자 포르투갈은 온 나라가 기쁨으로 들썩였다. 이후 포르투갈에는 '항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목숨을 아껴 무엇 하겠는가?'라는 말이 유행했고 젊은이들은 항해와 모험이라는 가슴벅찬 꿈으로 들떠 있었다.
두 번째로 극복해야 했던 심리적인 장애물은 아프리카 탐험으로 아무런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론은 1441년 원정대가 보자도르 곶 남쪽 해안에서 사금덩이와 흑인 2명을 잡아옴으로써 극복될 수 있었다. 1441년에서 46년까지 5년동안 포르투갈 원정대들은 보자도르 곶과 블랑코 곶(Cape Blanco)-블랑코 곶에는 1442년에 도달했다- 사이에서 1,000여명에 가까운 흑인 노예들을 사로잡거나 흑인 추장들로 구입하여 포르투갈로 데리고 왔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확대되어 가자 엔리케 왕자는 1448년 블랑코 곶 만곡부의 아르김(Arguim) 섬에 요새와 상관을 짓고 본격적으로 노예무역을 전개하였다. 아르김 요새는 유럽 최초의 해외 상관이었다.
<카보베르데와 블랑코곶>
엔리케 왕자의 둘째 형인 페드로가 섭정직을 수행하고 있던 1443년까지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 아프리카 연안 무역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익금의 1/5만 왕실에 납부하면 아프리카 연안 교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43년 이후부터는 보자도르 곶 너머에 대한 항해와 교역권이 엔리케 왕자에게 독점 양여되었다. 민간들이 아프리카 연안 교역에 참여하려면 구입한 상품의 1/5-1/10에 상당하는 금액을 왕실에 납부해야 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엔리케 왕자 휘하의 항해가들은 차츰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1445년에는 디니스 디아스(Dinis Dias)가 세네갈(Senegal) 강에 도달하였고-당시에는 세네갈 강이 나일 강의 지류라고 생각하였다-, 1446년에는 트리스타옹(Nuño Tristão)이 베르데 곶(Cape Verde)을 지나 감비아(Gambia) 강에 도달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자신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발견들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엔리케 왕자는 국왕으로부터 기니 연안에 대한 탐방과 교역에 관한 전권을 1448년 9월 15일에 획득하였고, 교황으로부터 아프리카 탐험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완전면제권을 획득함으로써 기니(Guinea) 탐험을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킬 수 있는 독점권도 교황으로부터 받아내었다. 엔리케 왕자의 휘하에서 포르투갈 뱃사람들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엔리케 왕자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독점권을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였다. 베네치아 출신의 카다모스토(Alvise Cadamosto, 1432-1511)는 1455년과 1456년 엔리케 왕자로부터 특허장을 발부받아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사하여 1456년에 케이프 베르데 제도를 발견하였다.
< 서아프리카 위성사진>
엔리케 왕자가 이처럼 열성적으로 아프리카 탐험을 조직하고 후원했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기니 발견과 정복에 관한 연대기』(Chronicle of the Discovery and conquest of Guinea)를 쓴 주라라(Gomes Eanes de Zurara)는 엔리케 왕자가 아프리카 탐험을 조직했던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엔리케 왕자는 카나리아 제도와 보자도르 곶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둘째, 아프리카의 금광업자들과 거래를 함으로써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셋째, 이교도인 무어인의 세력을 잠식하기를 원했다. 넷째, 미개인을 기독교도로 개종하고자 했다. 다섯째, 전설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선교사 존(Prestor John)의 왕국이 발견된다면 이와 연합하여 이슬람교도를 협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십자군 원정 이래 유럽 기독교권에 지속되고 있었던 목표들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선교사 존이 다스린다는 전설상의 기독교 왕국이 아비시니아(Abyssinia, 오늘날의 Ethiopia)에 있다는 풍문이 전해짐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선교사 존의 왕국을 찾을 수 있다면 동맹을 맺고 이슬람교도를 협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엔리케 왕자가 아프리카 탐험을 조직하고 후원했던 것은 어떤 새로운 이념이나 기대에서 시작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중세적인 동기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아프리카 탐험에 나섰던 것이다.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탐험에 대한 독점권과 노예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일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부를 교회와 기사단, 휘하의 부하들에게 양도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1458년 12월 28일에 노예와 금 등으로부터 얻은 이익의 1/20을 그리스도 기사단(Order of Christ)에 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해상왕국’(Kingdoms of the Seas)을 인계한 후계자에게 주도록 조처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1460년 9월 18일에는 자신이 포르토 산토와 마데이라에 세운 교회가 벌어들이는 수입을 상기한 그리스도 기사단에게 주고, 세속재산은 모두 포르투갈 왕에게 양도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한평생을 아프리카 탐험에 헌신하여 포르투갈과 나아가 유럽팽창의 길을 닦아 놓고, 1460년 11월 13일 사그레스에서 사망하였다.
출전 : 김성준, <유럽의 대항해시대>
첫댓글 엔리케 왕자에 의해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렸군요. 만약 엔리케가 권좌에 있었더라면 아프리카 절반을 휩쓸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엔리케 왕자를 서양의 11대 탐험가로 선정합니다. (토탈워 역사 차트 선정 위원회)
이베리아 반도가 평야지대가 큼직큼직한게 정말 광대하네요...
역시 마법사는 위대합니다. (_ _)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