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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6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에페 4,7-16
복 음 : 루카 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에페소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각자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우주적인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속량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 이후로는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여 줍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덕들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여야 합니다(어제 독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실천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교회 안의 여러 직무도 같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려고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최종 목표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 커다란 계획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하고,
우리 각자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4,13) 다다르기까지 성장합니다.
어중간한 삶에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살아가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심청전을 잘 알 것입니다.
심청이의 효심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청의 한자어를 보면 마음 심(心)에 맑을 청(淸)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름인 심봉의 한자어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심(心)에 봉할 봉, 닫힐 봉(封)을 씁니다.
따라서 마음이 맑은 심청이가 마음이 닫힌 심봉사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아버지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닫힌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당수에 풍덩 빠지는 심청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도 그러 합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셔서 전적인 투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전적인 투신을 할 수 있는 맑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은 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심청이가 아닌 심봉사 쪽에 훨씬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전적인 투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주고 있지 않나요?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죄가 많았고,
또 잘못을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나무는 하느님의 일에 무심하고 냉담한 우리 모습을 상징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삼 년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신 공생활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의 회개와 사랑의 응답입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잘 산다고 해서, 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죄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인 우리는
곧바로 회개하고 사랑의 응답을 해야만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 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오,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 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다.’, ‘마음이 흔들비쭉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
‘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 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 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이고 땀입니다.
그분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 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조욱현 토마 신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항상 회개하여 그에 맞 갖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애며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어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강력한 경고성 발언은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의 표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과 동고동락할 때, 너무 성급했고 미성숙했던 탓에
여린 새싹 같은 그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준 것들, 평생을 두고 반성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빗나가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으름장을 놓고 강력한 경고성 발언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에 그저 아이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음도 고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동족 유다인들에게 강력한 경고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 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 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교훈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루살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ias, 37-100년경)“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살쯤에 로마의 통치를 수용하는 바리사이파의 일원이 되었으나,
66년경 유다의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총독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독립정부 건립을 위해 갈릴래아 지휘관으로 싸우다 자신의 요새가 함락되자
로마군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Titus Flavius, 서기 9년-79년) 장군에게
투항하여 로마로 압송된다.
요셉은 감옥에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자, 예언의 功으로 풀려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69)는 그를 총애하여 시민권과 연금과 토지를 하사한다.
감사의 뜻으로 요셉은 자신의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로 개명하고
역사 저술에 몰두한다.
플라비우스가 남긴 불후의 명작은 <유대전쟁사 7권, Bellum Judaicum>,
<유대고대사 20권, Antiquitates Judaicae>, <아피온 반론 2권, Contra Apionem> 등이다.
이들은 당대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93년경에 완성된 플라비우스의 <유대고대사>는
유대역사를 창조 이후부터 반란(66-70년) 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한 책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실었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고대사 제18권을 보면,
이스라엘의 5대 총독(26-36년)으로 재임했던 빌라도가 두 번이나 유대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 당대에 엘수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35년경 가리짐산
(고대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남쪽 13km 지점에 위치)으로
제사를 지내러 올라가던 사마리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빌라도 총독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소환되었고, 그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이 소개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학살사건(1절)이
실제적인 사건인지는 의문스럽다.
실제로 있었다면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희생물로 짐승을 바치다가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빌라도의 두 가지 대량학살 사건을 하나로 뭉친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예수께서 달리 언급하시는 실로암 탑의 붕괴로 죽은 18명이 죽었던 사건은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동쪽 성 밖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이라는 샘물을
유다왕국의 히즈키야(B.C 716-687)왕이 터널(히즈키야 터널)로 연결하여
성인으로 끌어들여 만든 저수장이다.
따라서 실로암탑의 붕괴는 성벽의 붕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뜻하지 않게 당하는 참사는
모두 당사자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와 실로암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가 당시 그곳에 살면서
죽음을 면한 사람들의 죄보다 크지 않았다고 강조하신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사건의 잘잘못이나 죄의; 대소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들을 염려하여 당장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5절)
회개의 촉구는 다음에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6-9절)에 잘 나타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들과 같은 죽음을 不辭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는 세 가지 주제가 등장 한다.
이는 포도원에 심겨 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와 포도원 지기와 포도원 주인이다.
비유를 풀이하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을, 주인은 하느님을 뜻한다.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주인에게
포도원 지기가 나무와 연대하여 주인에게 말미를 청하는 모습은
아브라함이 소돔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창세 18,23-33)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소돔은 단 10명의 義人이 없어, 결국 멸망하고 만다.(창세 19,24-25)
이와 같이 오늘의 무화과나무도 포도원 지기의 도움을 받아 다음 철까지 열매를 맺을 기회를 가진다.
만약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소돔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오늘 비유 말씀에는 여지없이 당장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바램이 담겨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회개하고 화해의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