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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재미있는 풍수이야기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66 14.10.04 15: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재미있는 풍수이야기
 

풍수이야기 1

남대문 현판 숭례문(崇禮門)과 광화문 앞 해태상에 관한 이야기

풍수적으로 부족한 땅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보충해주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리라 하여도 한 두 가지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서울도 마찬가지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남향을 하고 있다. 옛날부터 궁궐에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병향(丙向)은 오행으로 큰불을 상징하는 양화(陽火)인데다 궁궐 정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관악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관악산의 화기를 한강수가 차단해준다고는 하지만 역부족하여 수성(水性)이 강한 물짐승인 해태상을 대궐문 앞에 관악산을 바라보게 하여 세웠다. 또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하여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세웠는데 관악산의 화기를 화기로 제압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숭례문(崇禮門)에서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낸다. 즉 숭례(崇禮)는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가 된다.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서 불은 불로 막는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동대문의 흥인지문(興仁之門)과 옹성(甕城)

동대문은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다.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다.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았다.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다.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낸다. 따라서 동쪽이 흥하여 허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이 담겨져 있다.

창의문(彰義門) 지붕의 닭 모양 조각

경복궁 서쪽인 창의문(자하문)의 의(義)는 오행으로 금(金)이고 서쪽을 나타낸다. 창의(彰義)는 서쪽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지붕 위에 닭 조각이 있다. 이는 창의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풍수 비보책이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데이트를 하면 왜 헤어지게 된다고 할까?

얼마전 SBS '호기심천국'에서 덕수궁 돌담길에 대한 소문이 풍수지리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프로로 만들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정감이 있어야 할 고궁길이 이별로 이어진다는 소문이 궁금하면서도 호기심이 갔다. 그러나 풍수적 해석을 하자니 난감하다. 돌담길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을 걷는 연인에 따라 다를 것인데 굳이 풍수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

풍수지리에서 길은 물을 나타내는데 음양이 교배가 이루어지려면 물은 안쪽으로 감고 돌아야 한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은 약간씩 바깥으로 굽어 있다. 이러한 물을 풍수에서는 반배수라고 하는데 배신을 나타낸다.  또 풍수에서 물은 여러 곳에서 득수하여 한곳으로 빠져나가야 진혈을 만들 수 있고 보국이 안정되는데 덕수궁 길은 가다보면 여러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모서리를 돌아 또 가다보면 다음 모서리에서 또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러한 지형의 특성이 사람의 심리에도 작용하는 것인지모른다...,

풍수이야기 2

풍수사(風水師) 지관(地官) 이야기

지리와 풍수술에 능통하여 땅의 길흉을 점지하는 사람을 풍수사, 지사, 지관이라고 부른다. 지관(地官)이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왕의 능을 만들 때 지리를 살피기 위해서 땅 보는 일을 맡게 된 자를 가르킨데서 유래한다.

왕릉을 선정할 때 나라 전체의 풍수사 가운데서 우수한 몇 명만을 선정하여 상지관(相地官)으로 임명하였는데 일단 지관에 임명되면 실력이 인정되었고 풍수사 중에서 첫째라는 권위가 주어졌다. 다른 벼슬도 마찬가지이지만 한번 지관에 임명되면 퇴임 후에도 지관이라는 호칭은 계속 쓰여졌다. 그러나 실제 지관에 임명된 일이 없는 풍수하는 사람도 경칭으로 지관이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나라의 일에 관여하기 위해서 뽑은 풍수를 국풍(國風)이라고 불렀다.

 풍수는 한문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공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승려나 상류계층이 아니면 풍수사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풍수사의 지위는 다른 점복술(占卜術)을 하는 사람과는 달리 사회에서 대우와 존경을 받았다. 풍수사에 대한 보수는 일정하지가 않았다. 학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풍수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잡아주는데 일정액의 보수를 정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부모가 안주할 좋은 묘지를 선정해 주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했다는 기쁨과 그 묘지의 발복으로 자손들이 부귀번창 할거라는 기대에서 될 수 있는 한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풍수설화의 대부분은 명당(明堂)은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효자나 효부(孝婦) 등 착한 심성을 가지고 남에게 공덕을 많이 베푼 사람에게는 풍수에 통달한 승려나 풍수사가 우연히 나타나 좋은 자리를 점지해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풍수사들은 대부분 지관으로서 꼿꼿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富)보다는 명예를 존중하였다.

  다음의 설화(說話)는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느 날 숙종 임금이 평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려고 밀행을 다니는데 가난하게 생긴 한 부부가 슬프게 울면서 냇가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장사 지내려는 것을 보았다. 풍수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임금이 깜짝 놀라 가까이 가서 보니 광중(壙中)에는 어느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가난한 부부는 물이 차 오른 광중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더욱 슬프게 울고만 있었다. 숙종 임금은 아무리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묘를 쓰려면 산에 써야지 어찌 냇가에 쓰는지 의아하고 기가 막혔다. 임금은 두 부부에게 물었다.

 "여보게! 물이 금방 이렇게 솟아나는 곳에 어찌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에 오랜 병환 끝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아침에 저기 저 높은 언덕에 사시는 지관 어른이 찾아와서 저희들의 평소 효심에 감동했다 하면서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다 장사를 지내야 발복한다고 자리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 분은 이 지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인데 이런 자리일 줄은 몰랐습니다." 임금은 수행한 신하에게 쌀 백 가마를 효성이 지극한 이 부부에게 주라 명령하고, 또 상지관을 불러 좋은 자리를 잡아주라고 하였다. 화가 난 임금은 자리를 잡아 준 지관이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집으로 갔다. 지관은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임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나는 한양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는데 듣자니 당신이 지리를 좀 안다하던데 어찌 착하고 가난한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냇가에다 자리를 잡아 주었는가?" 그러자 지관은 껄껄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 자리는 시신이 광중에 들어가기도 전에 쌀 백 가마가 생기는 금시발복 할 자리며, 나라의 국풍이 나서서 다시 좋은 자리로 옮겨줄 자리란 말이오. 내 저들 부부의 효성에 감동하여 자리를 잡아 준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소."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자신이 조치한 내용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다시 물었다. "영감님은 그렇게 잘 알면서 호의호식하지 않고 어찌하여 이런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오?" 그러자 지관은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잘 살려면 남을 속이고 도둑질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 여기는 비록 오막살이 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임금이 찾아올 자리요. 이 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단 말이요" 임금은 대경 실색을 하고 말았다.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 형국

 국회의사당과 KBS, MBC, SBS 등 방송국을 비롯해서 대한생명 63빌딩과 각 증권 회사 건물,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 여의도는 한강에 있는 섬이다. 조선시대 도성인 경복궁에서 보았을 때 여의도는 한강 물이 서울을 감싸고 흘러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외수구(外水口)로서 율도인 밤섬과 함께 나란히 있다. 크고 작은 두 섬이 한강 물 가운데 있으므로 유속을 조절하고, 서울을 형성하는 보국의 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즉,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백두산에서부터 출발하여 천리를 넘게 달려온 음(陰)인 용(산맥)과 역시 천리 이상을 흘러온 양(陽)인 한강수가 음양교배를 하여 서울이라는 큰 보국(保局)을 만든다. 이때 한강수가 빠르게 흘러 나간다면 용과 물의 충분한 음양교배가 어렵고 서울을 둘러싼 보국 안의 생기(生氣) 역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여의도와 밤섬이 있으므로 한강의 유속을 느리게 하여 양인 물의 기운을 충분하게 공급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1968년 여의도 개발을 착수하여 밤섬을 폭파하고 그 흙과 모래를 모두 파다가 여의도 섬을 돋았는데 이로 인해 한강의 자연 환경과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의도 개발로 얻은 득보다는 실이 더 크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여의도와 밤섬의 생태계가 복원되어가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여의도는 서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자체적으로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수세국(水勢局)의 명당을 이룬다.

 혈의 생기는 물이 보호하는데 사방에 물이 있기 때문에 기가 하나도 흩어지지 않는 명당이다. 여의도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배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형(行舟形)의 모습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행주형 명당은 부(富)를 상징한다. 배에는 승객뿐만 아니고 값나가는 곡식과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가기 때문이다.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더욱 힘을 쓰고 발전이 있는 것이지 물 따라 흘러가면 힘과 발전이 없다.

  우연인지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의도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형에 맞게 건물이 배치되었다. 63빌딩은 마치 배 머리에 있는 돛대와 같고, 국회의사당은 배 뒤편에 있는 기관실이며, 가운데에 있는 아파트 단지는 선실이고, 금융가와 상가가 있는 곳은 금은 보화로 가득 찬 화물실에 해당된다.

배가 순조롭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기관실이 건재해야 한다. 나라가 편안하고 발전을 하려면 기관실인 국회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항상 시끄럽고 요란한 국회와 여의도에 초고층 건물을 짖는다는 뉴스를 보면서 혹시나 배가 균형이 맞지 않아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이여송 이야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 왜군이 물러간 후 그는 귀국하면서 백두산 근처에 있는 한 묘를 보았는데 왕후지지(王侯之地)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다스릴 자손이 나올 자리였다. 이여송은 곧 묘의 혈을 자르도록 하였다. 그러자 묘에서는 피가 흘러 나와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여송이 귀국해서 부친께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부친이 깜짝 놀라면서 그 묘가 바로 이여송의 조부 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얼마 후 이여송은 조정에서 물러났으며, 후손들은 모두 절단이 났다.

방안 풍수와 작대기 풍수

 우리 속담에 '방안 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이 있다. 방안 풍수란 집안에서는 큰소리치지만 밖에 나가서는 제대로 일을 못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방안에서 배운 이론이 아무리 논리 정연하다 할지라도 실제 현장의 상황과 맞지 않으면 일을 망친다는 말이다. 세상살이 모든 일이 그렇듯이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배운 이론만 가지고 실제 산에 가보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방안 풍수에 비교되는 말이 작대기 풍수인데 아무런 이론도 논리도 없이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오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홀로 주어진 일은 잘 할지 모르지만 설득력이 부족하여 남을 이해시킬 수 없으며,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대기를 들고 산을 많이 다녀 보아서 자리는 잘 잡는다 할지라도 그곳이 왜 명당이 되는지를 모른다면 신뢰성은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이론적인 공부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분간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하겠다.

금시발복지지(今時發福之地)

묘를 쓰고 발복이 빠르게 나타나는 것을 속발(速發) 또는 금시발복(今時發福) 한다고 한다. 흔히 인시하관(寅時下棺)에 묘시발복(卯時發福), 사시하관(巳時下棺)에 오시발복(午時發福)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사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발복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옛 설화나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그 설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깊은 산골에 대대로 머슴살이를 해온 총각이 병든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주인집은 천석지기 부자였으나 몇 해전 돌림병이 돌아 모두 죽고 젊은 며느리만 홀로 되어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총각이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지관인 노인은 그 근처의 명당을 찾으러 왔다가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이틀을 쓰러져 있었다.

총각이 노인의 다친 다리를 치료 해주자 이를 고맙게 여긴 지관은 자신이 찾은 명당을 가르쳐 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여기다 묻으라고 일러주고 떠나갔다. 총각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죽자 총각은 노인이 말한 그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마을의 머슴들이 무덤을 만드는 사이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집에 오자 종들은 아무도 없고 며느리 혼자 있었다. 밥할 쌀을 꺼내려 광에 들어갔을 때 그 들은 곧 눈이 맞아 인연을 맺고 말았다. 총각과 젊은 과부는 그 날로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멀리 떠나 신분을 감추고 부자로 행복하게 살았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후에 정승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은 설(雪)울에서 유래되었다.

 나는 두 아들에게 틈틈이 한문을 가르친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종원이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종환이에게 한문의 원리와 뜻을 설명해 주면 매우 흥미 있어 한다. 하루는 한문으로 집 주소 쓰는 법을 가르치는데 '서울'만 한글로 쓰자 왜 서울은 한문이 없냐고 질문을 한다.

  아이들에게 서울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어디서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난감했다. 어는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선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 태조는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도록 하였다.

 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약17Km)에 이른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성을 눈설(雪)자를 써서 '설(雪)울'이라고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유래 된 것이다.




풍수이야기 3

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道詵國師)

 도선(道詵)은 신라 말 덕흥왕 2년(827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혹은 최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호는 옥룡자(玉龍子)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 해안지방은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던 곳으로 당의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도 다른 지방보다 빨리 이 지방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도선이 자라면서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선은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불경을 공부하여 4년 만인 문성왕 8년(846년)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았다. 이때부터 수도 행각에 나서 동리산(桐裡山)의 혜철(惠哲)을 찾아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의 선승(禪僧)들은 가르침을 베푼 스님의 인가를 받으면 그 스님을 떠나서 혼자서 전국 각지의 명산대첩을 떠돌아다니며 고행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히 산하에 대해서 많은걸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지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풍수사들이 대부분 스님이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한반도 산천의 순역(順逆)을 삼국도(三國圖)로 그려 작성하였다. 이것은 산수의 형세에 따라 명당을 설정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작성한 삼한(三韓)의 지도다.

  신라말기 혼란기에 지방호족들은 대부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명당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세력 확장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주 중심의 전통적인 신라의 국토관(國土觀)이 와해되고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갔기 때문에 도선은 신라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 국토에 비보사찰을 건립하고 허약한 땅에는 탑을 세웠다.

 그는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비보풍수사상(裨補風水思想)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수입된 풍수와 다른 한국의 자생 풍수다. 현존하는 풍수지리 이론서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발간된 것들인데 땅을 고쳐 쓸 수 있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도선은 이 비보풍수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결함이 있는 땅은 사찰을 세우거나 탑을 세워 보완 해 주었다.

이러한 비보풍수는 다음 일화로 유명하다.

 도선 국사가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날 때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제( , 느릎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 삼베)를 심었을까?" 하자 왕륭이 도선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문을 구하였다. 도선은 뒷산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말하기를 "송악산의 맥은 멀리 임방(壬方)에 있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뻗어내려 와서 마두(馬頭)에 떨어져 명당을 일으킨 곳이다.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물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삼십육구(三十六區)로 만들고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부응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도선의 말처럼 1년 후 왕건이 태어났으며 그는 장차 성장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도선 국사가 풍수설을 누구한테서 배웠는가 하는 설은 여러 학설이 있다. 도선이 죽은지 252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최유청이라는 사람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도선이 출가하여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이상한 이인(異人)에게서 배웠는데 그 이인은 도선에게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을 보여 주면서 풍수를 전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인 장일행(張一行)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일행(一行)은 선종 계통의 승려로 당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의 이조판서에 해당되는 이부상서(吏部尙書)라는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으로 벼슬을 버리고 입산 수도하여 천문지리에 정통한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 현종의 칙명으로 승 홍사(泓師)와 함께 진나라 사람 곽박(郭璞)이 저술한 금낭경(장서)을 해석했는데 산수의 형세를 설명하면서 실제 사례를 드는 실증법(實證法)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국토를 남쪽부터 북쪽까지 위도를 측량하여 <구당서(舊唐書)>, <율역지(律歷志)>, <천문지(天文志)>를 저술하였으며, 당나라 전체를 지세에 따라 양자강 유역은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황하의 중상류 지역은 용문지지(用文之地, 학자가 많이 나오는 땅), 사천과 산서 지방은 용무지지(用武之地, 무장이 많이 나오는 땅)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는 등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선은 신라 덕흥왕 2년(서기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서기898년)까지 살았고, 일행은 당 현종 때 인물(서기 712년-756년)로 도선과는 약 100년 정도 시대 차이가 난다. 또 도선 전기(傳記)에도 당나라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도선이 당나라에서 일행한테서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으며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진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도선국사(道詵國師)의 국역진호설(國域鎭護說)

 국역진호설이란 국가 영토의 기운이 과한 것은 진압하고 결여된 것은 보호해준다는 뜻으로 도선국사의 독특한 학설이다. 아래 내용은 도선국사실록에 소개된 것으로 조선 영조 때 중간(重刊)된 것이며 저자 미상이다.

 문장은 한문이며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저자명을 밝히지 않고 조선조를 아조(牙彫)라 표현한 점으로 보아 조선조에 들어와서 작성된 것이며, 문장에 능통하지 않은 자가 민간에 전하고 있던 도선 설화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이 책은 영조 19년에 중간된 인본(印本)으로서 당시 민간 신앙계에 이 국역풍수 신앙이 중추를 이루고, 많은 신봉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도선이 가난한 조선을 구제하고 바람기를 빼고 방기(邦基, 나라의 기초)를 굳게 하여 백성을 안전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행주(行舟, 항해하는 배)같은 것이고, 태백산 금강산이 그 머리이고, 월출산, 영주산이 배 꼬리이며, 부안의 변산이 그 타( :배의 방향을 잡는 키)이다. 영남의 지리산은 배의 노이며, 능주의 운주산이 선복(船腹, 배의 중앙부분)이다. 그런데 배가 물에 뜨는 것은 물건이 있어 배의 머리와 꼬리 등과 배를 눌러 주어야 하고, 타즙( 楫, 키와 배 젖는 기구)으로 진로를 잡아야 선체가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서 위험한 곳을 진압해야 한다. 특히 운주산(전남 화순군 도암면) 아래 완연규기(  糾起, 지세가 꿈틀거리듯 일어나는 곳)하는 곳에는 별도로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설치하여 그 등과 배를 실하게 하였다. 또 금강산과 월출산에는 탑을 건조하여 정성을 다했다. 이 두 산이 행주(배)의 수미(首尾, 배 머리와 꼬리)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압(鎭壓)을 끝낸 도선은 지팡이를 짚고 천리 길 여정에 올라 팔도강산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선은 국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절을 둘만한 곳은 절을 세웠고, 절을 둘 만한 곳이 아니면 부도(부처)를 세우고, 탑을 세울 곳이 아니면 불상을 세우고, 결함이 있는 곳을 보충하고, 비뚤어진 곳은 바로 세웠다. 또 월출산 천왕봉 아래에 보제단(普濟壇)을 설치해 매년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 복을 기도하고 재앙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 후 조선의 지리에는 변화가 나타나 산의 흐름은 계곡이 아름답게 되고 지맥이 꿈틀거리는 곳이 변하여 부(富)를 모으게 되고 나라에 분쟁의 우환도 없이 사람들이 한탄할 일도 없었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것도, 조선조가 북방을 개척해서 육진(六鎭)을 설치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운이 발전한 것도 이 도선의 진호(鎭護)의 힘에 연유한 것이다.

고서(古書)에 나타난 팔도의 인물 비교

 조선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 팔도의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여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이 발달해 왔는데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의 일치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수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수많은 인구이동과 지역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문화공간이 확산되면서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여기서는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1)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은 중국 남경의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팔도의 형상을 인체와 동물에 각각 비유하여 팔도의 인물평을 하였다.

 .함경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머리(頭,두)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장어다

함경도 사람은 우직하지만 지혜를 가졌다. <우직지협(愚直知夾)>

.평안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얼굴(面,면)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매다.

평안도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며 날쌔다. <견강용예(堅剛勇銳)>

.황해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손(手,수)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소다.

황해도 사람은 느리고 어리석어 용골 차지 않다. <우준무실(愚蠢無實)>

.경기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가슴(胸,흉)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범이다.

경기도 사람은 앞에는 억세고 뒤로는 부드럽다. <선용후유(先勇後柔)>

.강원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갈빗대(脇,협)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꿩이다.

강원도 사람은 자기 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 <칩복지단(蟄伏知短)>

.충청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배(腹,복)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까치다.

충청도 사람은 행동이 경솔하지만 용맹스럽다. <부경용호(浮輕勇豪)>

.경상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다리(脚,각)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돼지우리다.

경상도 사람은 어리석고 순하고 질박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 <우순질신(愚順質信)>

.전라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발(足,족)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원숭이다.

전라도 사람은 속임이 많고 교활하고 가벼우나 예술성이 있다. <사교경예(詐巧輕藝)>

2)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의 팔도 인심론

 무엇으로서 인심을 말할 것인가? 공자께서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하시었고,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은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사람이 살 고장을 찾을 때에 그 착한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해가 있어서 반드시 좋지 못한 풍속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그러니 살 곳을 가리는데 그 땅의 세상 풍속을 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 나라 팔도 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醇厚)하여서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악한 까닭으로 백성들이 거의가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짜기 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野邑)은 백성들의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재리)에만 따른다.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는 서민을 두고 논한 것이요, 사대부의 풍속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렇지 않다.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인심(人心)편>

3) 정조 때 규장각 학자인 윤행임(尹行恁)의 팔도 백성의 성격

.함경도 사람은 이중투구(泥中鬪狗)로 진흙 속에 개들이 싸우는 격으로 강인한 의지와 인내력이 있다.

.평안도 사람은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사나운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나오는 격으로 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다.

.황해도 사람은 석전경우(石田耕牛)로 돌밭을 일구는 소와 같은 격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근면성이 있다.

.경기도 사람은 경중미인(鏡中美人)으로 거울 앞에 선 미인 격으로 이지적이고 명예를 존중한다.

.강원도 사람은 암하노불(岩下老佛)로 바위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 격으로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자기 할 일을 해 나간다.

.충청도 사람은 청풍명월(淸風明月)로 깨끗한 바람과 밝은 달 격으로 풍류를 즐기는 고상한 면이 있다.

.경상도 사람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크고 높고 험한 산 격으로 웅장하고 험악한 기개가 있다.

.전라도 사람은 풍전세류(風前細柳)로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버들 나무 가지 격으로 시대에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4) 성호 이익과 청담 이중환의 영호남 인물 비교

영조 때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경상도는 산수가 모두 취합하고 바람 소리와 풍기(風氣)와 습관 또한 흩어지지 아니하며 옛날 풍속이 그대로 지켜져 명현(名賢)이 배출되는 국내 최대의 길지인 반면 전라도는 산수가 모두 산발체(散髮體)를 이루면서 흩어져 나가 국면(局面)을 이루지 못하므로 그 지방에는 재주와 덕행이 드물고 인정도 고약하다 하였다.

반면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전라도의 풍속이 노래와 여색, 부(富)함과 사치를 숭상하고 사람들이 흔히 영리하고 경박하며, 기교를 다하여 문학을 중요시하지 않는 까닭에 과제(科第)에 현달한 자는 경상도에 비해 떨어지나 인걸은 지령인지라 역시 전라도에도 인재가 적지 아니하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인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인 이고, 하서 김인후는 장성인 인데 모두 도학(道學)으로써 이름이 있었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다 광주인 인데 모두 절의(節義)로 이름이 있고, 고산 윤선도는 해남인 이고, 묵재 이상형은 남원인으로 모두 문학(文學)으로서 이름이 있었다.

장군 정지와 금남군 정충신은 나주인과 광주인 인데 장수(將帥)로 이름이 있었고, 찬성 오겸도 광주인 이고, 의정 이상진은 전주인 인데 재상(宰相)으로 현달 하였다. 그리고 문장가(文章家)로서는 고부의 옥봉 백광훈과 영암의 고죽 최경창이 있고, 우거(寓居)로서는 부윤 신말주가 순창에 살았고,

이상 이계맹이 김제에 살았고, 판서 이후백이 해남에 살았고, 판서 임담이 무안에 살았다. 단학(丹學)으로서는 도사 남궁두가 함열인 이고, 청하 권극중은 고부인 인데 또한 방술을 수련하여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공명 정대하고 사내답게 뛰어나 명성을 후세에 남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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