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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마]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간의 앙숙관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두 팀 간의 대결을 지칭하는 '엘 클라시코 더비'에서의 놀라운 열기, 루이스 피구와 사무엘 에투를 놓고 극명한 반응을 보여줬던 바르셀로나의 팬들, 왕실 지원 클럽과 철저한 시민 구단이라는 뒷배경 거기다 레알 마드리드나 유니폼을 입고 바르셀로나 시내를 활보하면 큰일이 난다는 믿지 못할 뒷얘기까지 이 두 팀 간의 이야기는 수많은 화제를 낳았고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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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팀 간의 격돌을 지켜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를 슬쩍 살펴보더라도 대체로 가해자 레알 마드리드와 피해자 바르셀로나 간의 구도가 그려짐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두 팀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팬들은 이 두 팀 간의 라이벌 관계가 다른 라이벌보다 좀 더 뜨겁고 정치적이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좀 더 내부적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근 백여 년간 함께 해왔던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사이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살아숨쉬고 있을까?
지배와 굴복, 저항의 굴레 속으로
어쩌면 스페인 라 리가의 역사는 지배와 굴복 그리고 저항의 역사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성적 여부를 떠나 거대한 세력인 왕실 그리고 정권의 힘을 얻은 레알 마드리드와 이에 따르는 꼭두각시 클럽 그리고 맹렬한 저항을 펼치는 클럽의 물고 물렸던 역사를 살펴보면 스페인 라 리가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마로 바스크 지방의 아슬레틱 빌바오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가 가장 유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백여 년간 저항해오며 클럽을 이끌어왔고 이제는 G 14에 가입해 레알 마드리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바르셀로나는 어느 클럽보다도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마'로서의 이미지가 확고한 팀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수난과 고통 그리고 피를 흘려야 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1902년 창단한 레알 마드리드보다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는 3년 빨리 팀을 창단한 바 있다. 스위스인인 호안 감페르가 주축이 되어 1899년 팀을 창단한 뒤 바르셀로나는 3년 만에 당시 스페인 최고의 축구대회였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오르는 등 빠른 속도로 카탈루냐 지방을 대표하는 클럽으로 성장했다.
이후 바르셀로나는 호안 감페르가 직접 회장직(6대 회장)에 오르면서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0년대 초반까지 당시 전 유럽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잉글랜드의 잭 그린웰 감독을 중심으로 파울리노 알칸타라, 리카르도 사모라 등 당대의 선수층을 꾸리는 데 성공했고 순식간에 카탈루냐를 넘어 스페인을 대표하는 클럽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이 시기는 스페인 근현대사 중 가장 어지러운 시대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기는 화려했던 스페인 제국의 영광이 몰락하며 나라 전체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한 때였다. 좌파, 우파로 나누어진 이데올로기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축구 클럽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바르셀로나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당시 카탈루냐의 독립을 원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축구팬들이 (당시 주로 좌익성향이 강한 그룹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불리게 될 스페인 국가 '라 마르챠 레알(La Marcha Real, 스페인 국가)'를 비아냥거리며 부르기 시작했고 당시 군부독재정권을 이끌고 있던 프리모 데 리베라에 의해 관련가담자가 감옥에 가거나 6개월간 축구장 출입금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재정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놓였던 바르셀로나는 이들의 경기장 출입이 사실상 봉쇄되자 위기에 봉착했고, 결국 초대 클럽 회장이었던 호안 감페르가 직접 진화에 나서며 이들의 처벌수위가 3개월로 줄어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호안 감페르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클럽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결국 1930년 6월 30일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카탈루냐 출신으로 좌익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호셉 수뇰이 10년간 공석으로 있던 바르셀로나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수뇰이 취임한 시기와 맞물려 스페인은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이후 바르셀로나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만다.
스페인 내전이 남긴 바르셀로나의 상처
앞서 약간 언급했듯 바르셀로나가 왜 레알 마드리드와 철천지원수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근현대사를 약간은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군부독재정권을 세웠던 프리모 데 리베라는 부임 초기 정치, 경제적으로 국가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스페인 역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결국, 프리모 데 리베라가 책임을 지고 정권에서 물러났고 이후 좌파정권이 스페인에서 수립되었다. 좌파정권은 당시 허울뿐인 국왕이었던 알폰세 13세에 퇴위를 요구하면서 공화국을 수립했고, 그 세력 중에는 바르셀로나의 2대 회장이자 카탈루냐를 대표하던 좌파 정치인이었던 호셉 수뇰도 함께했었다.
하지만, 이 좌파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당시 식민지였던 모로코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당시 좌파정권에 반발하고 있던 카톨릭 세력과 기존의 상류층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반란은 4년간 6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끝에 프랑코 장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코 장군은 집권 후 좌파를 비롯한 쿠데타 정권에 반하는 세력에 가담한 40만 명을 숙청을 단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975년 심장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이런 피로 얼룩진 철권정책을 이어나갔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바르셀로나 역시 안전할 수 없었다. 팀을 착실히 이끌던 호안 감페르의 뒤를 이어 클럽에 취임한 호셉 수뇰은 프랑코 장군이 반드시 숙청해야 할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코 장군에 대항했던 좌파정권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것.
바르셀로나의 호셉 수뇰 회장은 그 좌파정권의 대사였고 그 좌파정권의 보살핌으로 바르셀로나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1936년 8월 6일, 스페인의 과달라아라주 인근에서 프랑코 장군의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종식된 뒤 바르셀로나는 프랑코 장군의 세력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고 카탈루냐어, 카탈루냐 국기 사용을 완전히 금지당했다.
여기에 프랑코 장군은 '축구 클럽 명칭에 외국어(스페인어 기준)는 사용할 수 없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바르셀로나는 영국식 이름이었던 FC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의 명칭마저 쓸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카탈루냐 인들을 충분히 자극할만한 명칭인 CF 바르셀로나(Club de Futbol Barcelona)였고 이 명칭은 73-74시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코 장군과 왕실의 두둑한 후원을 얻어 유럽 최정상 클럽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CF 바르셀로나 그리고 요한 크루이프
'CF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은 바르셀로나의 암울한 시기를 말해주는 증거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르셀로나는 클럽의 정식 명칭을 바꿔야 했고 엠블럼 속에 새겨져 있던 카탈루냐의 국기 삭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기내적인 탄압도 이어졌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43년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이었다. 스페인의 모든 클럽들이 참가하는 FA컵인 코파 델 레이 준결승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격파하며 결승전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으로 자리를 옮긴 2차전, 결승 진출이 눈앞에 왔기에 들뜬 마음으로 경기를 준비하던 바르셀로나 선수들에게 프랑코 정권에서 보낸 요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2차전에서 큰 점수 차로 패하라는 것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코 정권의 상징적인 존재였고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극렬하게 저항하던 바르셀로나에 밀려 결승전 진출도 못한다는 것은, 당시 집권자에게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없었다. 결국, 당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무려 1-11이라는 엄청난 점수 차로 패하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 국내와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연전연승하는 동안 이들은 호셉 사미티에르라는 명장과 세자르, 안토니 라마예츠, 후안 벨라스코와 같은 카탈루냐가 낳은 당대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단 세 번의 우승(52-53, 53-54, 58-59)에 그쳐야 했다.
그리고 60년대에는 언제나 레알 마드리드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정부와 왕실의 지원을 얻어 페렌치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같은 대 스타를 거느린 군단이 되었고, 1950년부터 1969년까지 20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챔피언스컵(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의 우승컵을 여섯 번이나 들어올렸지만 바르셀로나는 1960년대 내내 스페인 리그 우승 한번 못해보는 치욕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73-74시즌, 바르셀로나에 영웅이 찾아왔다. 당시 네덜란드를 세계 최정상으로 이끌었던 불세출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해온 것이다. 당시 아약스를 유럽 최정상 클럽으로 끌어올리며 네덜란드 축구의 신기원을 만들어냈던 슈퍼스타가 암흑의 시기에 놓여있던 바르셀로나를 향한 것이다.
물론 프랑코 장군의 후원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레알 마드리드가 요한 크루이프를 영입하고자 시도는 했었다. 실질적으로 선수를 놓고 베팅에 있어 바르셀로나는 이전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스타가 바르셀로나를 등지고 레알 마드리드를 향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달랐다.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바로, '독재자' 프랑코 장군의 후원을 받는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뛰기 싫다는 것이었다. (크루이프는 정치적인 행동을 많이 하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당시에도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독재정권이 개최하는 대회라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한 바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대회에 참가하지 말고 가정에 충실하라는 아내의 만류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도 한다.). 이런 모습은 독재의 억압으로 고통받고 있던 카탈루냐인들에게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첫댓글 빌바오도 장난아니던데. 바스크 지방 아직도 독립운동하고 있지 않남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