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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노마
삼독의 불이 활활 타는 듯한 번뇌가 흐림, 중생의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고통스런 환경이 많아져 인간의 자질이 저하된 중생이 흐림, 오욕에 매몰되어 물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중생들의 수명이 흐린 사바세계의 오탁악세에 최상의 완전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체 세간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진리의 말씀을 설하셨다고 찬탄하셨습니다.
오감과 의식을 보유한 인간의 육체는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우주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그 소통의 수단은 오감과 의식입니다.
이 가운데 먼저 눈과 의식을 수단으로 개발하여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그대로 관찰하여 파악하고 나라는 존재를 분석해 봅니다.
우주는 허공이 끝이 없기에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에 부처님의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작용하는 형태도 또한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경계는 한계 지을 수가 없기에 우리 중생의 분별로는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요, 중생은 자기 견해에 빠져 갖가지 오류를 범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본의를 망각하여 또 다른 새로운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작용은 한계가 없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 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하여 주십니다. 나아가 중생의 소질과 능력의 차이에 따라 온갖 방편을 제시해 주어야 하기에 본래의 진리의 몸을 나타내어 각각의 시공을 초월해 구제하시고자 보신과 화신으로 나투시어 (응변여약) 을 처방하시어 인도하십니다.
이 생에서 우리가 죄없을 소멸시키려면 어떠한 경전이든 외우고 수지독송해야 소멸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업은
아무리 깊은 곳에 숨기려 해도
하늘 아래 햇빛 아래 숨어 있지 못하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 수행자는 수행의 기초부터 육체적인 쾌락보다는 정신적인 안정을 상위에 둡니다. 이것이 아미타불께서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법장비구로, 비구를 버리고 보살로, 보살을 버리고 부처를 추구한 결과입니다. 어느 곳이든지 삶의 주체에 따라서 환경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환경을 동경하면서 아미타부처님을 기억하여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곳에 나기를 바라면 아미타불을 찬탄만 하면 극락의 연못에 자기의 연꽃이 피어나 화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의 원력과 아미타불의 원력이 하나로 결합하여지고, 마음으로는 경전에 설해진 극락세계를 간절하게 관상하면서 입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찬탄하는 것은 수행자의 자력과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타력이 합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력과 타력은 둘이면서 하나인 불가분의 연기관계 속에 통일 됩니다.
000보살님을 비롯하여 덕양선원 보살님들을 이글로 표현한다면 천수경에 등장하는 천수관음보살님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천수관음보살님은 자비로 대표하는 보살로 자유로운 모습이면 될 것인데 왜 특이하게 천수천안이나 십일면 등 특이한 모습으로 설명되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눈이 천개이고 손이 천개인 사람이나 얼굴이 열 한 가지인 사람을 만난다면 아마도 혼비백산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관세음보살이 그런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다양한 모습과 차별없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라고도 부르는데 관세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하는 자비의 표현이며 관자재는 그 관하는 능력이 자유자재한 지혜를 뜻합니다. 천개의 손과 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손과 눈은 과연 몇 번째 손이 아니라, 천개의 손과 눈에는 차별 등이 있을 수 없으며, 열 한가지의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손 모든 눈이 곧 온몸인 것이며, 모든 얼굴이 자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관음보살은 어떤 곳에서나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자비를 펼치되, 그 자비는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온 몸으로 혼신을 다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관음보살은 가피의 손길(자비)로 희망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신행의 표상 “지혜”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곧 천수천안이 되고 십일면이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관음보살로 태어났으며, 자신이 관음이 되어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이 관음임을 알게 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는 사람이 약사여래부처이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지장보살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면 아미타부처님입니다. 빈궁한 사람에게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추운 사람에게 땔감을 주고 옷을 주는 사람이 자비와 지혜가 많은 관세음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덕양선원 보살님들께서는 굶주린 우리에게 떡과 영치금까지 넣어 주시면서 우리 아픈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으며, 고통을 해결해주시고, 편안하게 해주셨으니 바로 관음보살, 약사여래부처님, 지장보살, 아미타부처님입니다. 모든 부처님들이 이렇게 우리 주변에 가까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먼곳에 있단 말입니까?
“영세유방”의 꽃다운 이름은 영원히 아름답게 전해지듯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온 우주에 꽃향기로 되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낙엽귀근 적수구천이라 하였듯이 나무는 낙엽을 떨구면 뿌리로 돌아가 양분이 되겠지만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간직한 들 베풀지 않고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빈손으로 황천으로 돌아가서 장부에 무엇을 기재할 것입니까?
관자재를 보다 심도있게 풀이해보면 마하반야가 됩니다. 마하반야를 회복해 가졌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갖추고 있는 마하반야의 마음을 회복해 가지면 관자재를 이루어 이 세상 무엇이든지 자유자재롭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자재의 관(觀)은 본다는 뜻입니다. 실상의 입장에서는 관은 자연의 귀입니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관은 일반사람들의 볼 견(見)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관으로 보는 것과 견으로 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면요? 일반적으로 견이라 하면 오관의 하나인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등 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관’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 깊은 마음심으로 보고 마하심으로 본다는 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견은 나의 주관이나 고집 등을 가지고 보는 것이요. 관은 나의 주관이나 고집 관념 추측 착각 등을 벗어나 큰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관자재를 이루려면 나라고 하는 아상을 떠나 깊고 평정한 마음을 갖추어야만 자유자재 관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대우주법계처럼 넓은데 감옥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어 놓은 감옥의 벽을 허물면, 그 자리가 바로 우주법계가 되고, 하나가 되어 마하심을 회복하고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되면, 자유롭고 평안하고 티없이 맑은 복래의 삶을 회복하게 되겠지요. 보살은 자리이타를 실천해야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자리이타 이것이 보살의 실천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곧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요, 남을 위하는 일은 곧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나도 살리고 남도 동시에 살리는 삶이 보살행입니다. 자리이타의 삶을 달리 정의하면 자비의 실처닝라 할 수 있습니다.
보살님!
몸이 갇힌 곳에서도 남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찾으면 많다고 생각합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다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웃게 만드는 것도 지혜의 자비심이요, 부처님의 중생구제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며, 생사의 고통이 없는 무여 열반의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법상큰스님께서 법문하시면서 불법 만나기아 정법을 설하시는 스승 만나는 일은 넓은 바다에서 매구우목 만나기 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이 떠올라 “자경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자경문에 있는 맹구우목이라는 비유의 말씀은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운데 더 나아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란 망망대해에서 눈먼 거북이가 구멍 뚫린 자그마한 나무판자 하나 만나기 보다 어렵다고 하는 비유의 법문인 것 같습니다.
범부중생의 우매한 저도 다행스럽게 불법의 인연으로 보살님과 큰 스님과의 인연이 되어 그 배우기 어려운 불법을 배우고 있으니 미혹하였던 마음을 조복받고 있으니 다행스럽습니다.
범부중생의 우매한 저도 다행스럽게 불법의 인연으로 보살님과 큰스님과의 인연이 되어 그 배우기 어려운 불법을 배우고 있으니 미혹하였던 마음을 조복받고 있으니 다행스럽습니다. 저는 고마운 마음에 법상스님과 보살님께 매일 아침마다 덕양성원을 향하여 삼배로 예를 올리오니 받으소서...
새벽 4시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정리해놓고 세수하고 덕양선원을 향하여 법상큰스님께 아침마다 삽래로 예를 올리는 것이 벌써 4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표현하지 않고 있다가 법상스님과 보살님들의 고마움에 어떻게 갚을 길이 없어 이제야 서안을 통해 저의 진실한 마음을 전합니다.
법상큰스님께서 우리에게는 각자의 경전 한권씩이 들어 있다고 하셨는데 저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은 경전을 글을 통해 큰스님께 전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세수하고 큰스님께 계신 곳을 향해 옥체 무탈하옵소서... 오체 투지로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니 옆에 있는 동료가 ㅇㅇㅇ씨는 혼자말로 무슨 말을 그리 중얼거리느냐고 하여 “내마음 속에는 큰스님 상주하시고 계시니 아침에 일어나면 스승님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답변을 하면서 당신은 집에 있으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는가 하니 말을 하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버렸습니다. 화장실에 갔다 오더니 웃음을 띄면서 ㅇㅇㅇ씨에게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여 그러면 내일 아침부터는 당신이 제일 고마움을 주는 사람을 스승 삼아 이곳에서 출소할 때까지 그 사람을 향해 인사를 올려 보세요.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사회로 출소하면 무슨 일이든 잘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절하는 것은 나 스스로 낮춘 것이요, 남에게 공향하는 것 또한 나에게 공양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항상 남에게 절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신자입니다.
남에게 절하는 것은 나에게 절한 것이니 그런 마음으로 생활하다보면 하늘에서 빛을 주고 땅에서는 양분을 주니 무슨 재물이 필요있겠소. 이것이 천국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 사람에게 말을 드리고 나니 웃음을 지으면서 ㅇㅇㅇ씨하고는 더 이상 말이 막혀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그 사람하고 대화를 마치고 계속 글을 써내려 갑니다.
법상 큰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항상 말씀하시는 무릇 베푸는데 있어서는 상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무주상보시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알음알이란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불가설 불가설 항하사 불찰미진수라고 하셨듯이 말을 학 선이라는 것은 글로써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말로써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혜(慧가) 아닌 식(識)은 글과 말이 많을 뿐이겠지요.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범부중생은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공부를 지어가야 되는지 몇 년을 경전공부를 하면서도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보니 우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범부중생인 저로써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갇혀 있기에 갈길을 잃은 돛단배처럼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생과 부처 차이겠지요.
치문이라는 경전을 살펴보면요. 저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고 있는 새들도 밤에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나무를 가려 제일 편하게 하루 저녁을 지낼 수 있는 나뭇가지를 찾고 고른다고 하였습니다(鳥之將息 必擇其林 人之求學乃選師友 조지장식 필택기림 인지구학 내선사우). 그러나 모든 것이 구속되어 있는 저로써는 경전 공부를 몇 년 해왔지만 자유가 그리워 매 시간 시간 담밖을 오고 가면서 본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물에 있는 물을 마셔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물이 더운지 시원한 지를 알지 못하듯이 자유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법입니다.
원효스님께서 말씀하신 경책의 말씀이 자꾸만 머리를 자극합니다. 하루하루 알게 모르게 짓는 악업은 나날이 늘어가는 데 내일로 미룬 선업은 날마다 줄어들고 좋은 금언을 다짐하지만 번뇌와 망상이 한이 없고 내년으로 다시 미루면서 보리의 정진은 하지 않는다고 경책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급히 한 달이 가며, 한두 달이 흘러서 홀연히 일 년이 지나가며 한 해 두 해가 거듭하다 문득 죽음의 문에 다달은 다고 경책하시며 부서진 수레는 굴러 갈 수 없고 늙은 몸은 도를 닦을 수 없는데 게으름과 마시고 먹고 놀면서 망상만 피운다라고 꾸짖으시며 이 허망한 몸뚱아리가 허물을 벗은 다음의 생에는 어찌할까를 생각한다면은 지금 이생의 순간순간이 진실한 참나를 찾는 것이 급하고 급하지 아니한가라고 크게 경책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행을 하지 못하는 우매한 중생입니다.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 화쟁삼매론까지의 유식학을 공부하여 가다보면요, 연기론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 인간의 생명체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느곳으로 가야되는 것인가. 그것을 원효스님의 대성철학사상인 유식론에서 찾아보면요, 하나의 생명체를 담기위해서는 4대 요소라고 하는 몸뚱이라는 물체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몇 개월 전부터 원효 스님의 대성철학을 공부해왔냐면요, 법상스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 가끔 한번씩 방하착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방하착하고 많은 관련이 있기에 실은 공부해 왔습니다.
방하착이란 어렵고도 쉬운 것입니다. 4대요소 몸뚱이에 물체를 만들기 위해선 6식과 6근 등 구성요소를 갖추기 위해서 순서에 의거 식량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찾아야 합니다. 즉 제1식에서 제8식 아뢰야식까지 공부하는 대로 지면으로 나열해본다면요.
대승기신론 유식학의 세계
제1식 안식이란 안근에 의거하여 외부의 색경(시각적 대상)을 연하여서 행하여지는 인식작용을 이르고,
제2식 이식이란 이근에 의거하여 외부의 성경(소리)을 연하여서 행하는 인식작용을 이르고,
제3식 비식이란 비근에 의거하여 외부의 향경(냄새)로써 연하여서 행하는 인식 작용을 말합니다.
제4식 설식이란 설근에 의거하여 미경(맛)에 연하여서 행하는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제5식 신식이란 신근에 의거하여 촉경(촉감)을 연하여서 행하는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제6식 의식이란 의근에 의거하여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을 일으키는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의식은 의근에 의지할 뿐만아니라 제8식인 아뢰야식에도 의지합니다.
5식 모두가 함께 일어날 수도 있고 6식이 홀로 일어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7식 말나식이란 원어인 말나를 그대로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말나식의 특징은 결코 단절됨이 없이 하연이 자세하게 헤아려서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항상 제6식과 8식 및 정5식과 함께 하면서 사량하는데 그 진실한 내용은 나와 나에 관한 것들입니다. 제7 말나식이란 제8식과 함께 생명체가 모체에서 창조된 첫째날 첫생각으로 최초의 무명의 행을 이르킨 이래로 상녹하여서 구경위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행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구경이란 깨달음의 최후의 경지인 무여열반 해탈을 이름합니다.
제8식 아뢰야식이란 아리야식은 욕계 색계 무색계 어느 곳에도 두루 통합니다. 아뢰야식은 생명현상의 실재를 말하므로 신체와 정신작용의 근본인이 아뢰야식인 것입니다. 아뢰야식의 종자란 습기라고도 하며 갖가지 명칭과 개념 형상 그리고 선악 아집 등에 물이 든체 세력적인 존재로 항속하고 있는 것이 종자식인 아뢰야식입니다. 아뢰야식이란 생명의 태동현상의 역학인 동시에 그 역학의 작용방식을 방향짓는 세력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9식이란 우리들 범부중생들이 감히 논할 수 없는 고단위의 경지인 것입니다. 즉 제8식이 아버지로부터 정자르는 이름하에 모태인 어머니의 난자와 결합하여서 인간 생명이 태동하는 자궁에 착상하는 순간을 7식과 8식인 아뢰야식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자와 난자의 생명체 이전의 상황은 9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하착 수행을 하는 불자님들은 무엇을 놓아버리고 취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또한 스님들께서도 방하착 수행을 하셨다면 무여열반 대해탈의 경지에서 환희를 만끽하셔야 합니다. 경허 스님께서는 낮닭 우는 소리에 사내대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다고 늴리리 맘보춤을 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범부중생 ㅇㅇ이는 어리석어 아직까짇 눈이 있으나 밝은 것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4년 동안 큰스님 법문을 들어왔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오니, 이 우매한 중생을 불쌍히 여겨 큰스님! 하루빨리 진정한 해탈 열반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달마
달마를 그리면서 달마라는 뜻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달마라는 말은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화두의 주인공인 달마스님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때 달마도가 세상에 회자된 적도 있었습니다. 달마도가 무슨 복을 준다든가 액난을 막아준다든가 하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예불문 가운데 ‘달마야중’에서 달마를 달마스님으로 잘 모르고 있는 불자님들이 많은 데요, 달마 이는 범어 ‘다르마’를 한자로 음역한 것입니다. 팔리어로는 ‘담마’라고 합니다. 의역하면 ‘법’입니다. 이러한 달마인 법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달마인 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데요,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므로 예불문의 달마야중에서 달마가 이것입니다. 이 달마는 불법승 삼보 가운데 말합니다. ‘자등명 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라’에서 법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삼법인 가운데 제법무아에 해당하는 법입니다. 그러면 제법무아에서 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보통 법을 세상만물 사물 존재로 풀이하여 대중들에게 쉽게 접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법무아에 대하여 예를 들면서 그 사물에 사물이라고 할 자성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볼펜을 표현해본다면 이 볼펜은 볼펜 뚜껑 볼펜대 볼펜심 스프링 등 여러 가지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ㅂㄹ펜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도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이라고 할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에서 ‘아’는 자성을 말한 것입니다. 그이 등등... 여기서는 법을 세상만물 사물 존재 등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역시 무아의 측면을 강조할 수 있는 예로서는 유효할 수 있습니다. 법은 세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 속에 마음 작용을 따라 나에게 드러난 세상을 말합니다. 물론 그때 마음 작용도 법입니다. 법을 현상 인식현상이라는 철학용어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생활용품 등은 그 사물에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에 의해 나아 관계 지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그때 규정되고 이해된 것을 밖에 실재로 고정된 그것으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전도몽상’입니다. 불교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결코 타력적인 수행이 아니라 자력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석가모니불을 거듭 호명하며 소원을 빌고, 아미타불을 수없이 부르면서 극락왕생을 갈구하고, 약사여래불을 찾아가서 온갖 소원을 쏟아내면서 기원을 드리는 것도 결국에는 기도하는 자신의 마음과 몸을 강건히 다지는 자력 수행의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글귀가 있듯이 타력이 아닌 자력으로 수행을 해야 미신이 되지 않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대부분 일반 사람들이 부처님 하면 알고 있는 불교내용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구절로 알고 있습니다. 불자 아닌 사람도 이 말을 알지만 불교를 오래 공부하신 분도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천상천하는 하늘 위 하늘 아래 이런 뜻인데요, 하늘에 있는 땅에 있든 ‘천상천하’는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 생각의 경계선 안이나 바깥이나 네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적인 경계선 안이나 바깥이나 즉 ‘모든 곳’ 이런 뜻입니다. 유아의 유자는 오로지 유(唯)자고요, 독자는 홀로 독(獨)자입니다. 존(尊)자는 존재하다는 뜻이 아니라 귀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존자를 잘못 해석하면 심한 미신으로 해석될 수가 있습니다.
유아는 오로지 나라는 뜻이고요, 독자는 홀로 독자입니다. 무슨 뜻이냐면요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라는 뜻입니다. 나는 잘났고 다른 사람은 못났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요, 오로지 나만. 오로지 내가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홀로 스스로 존귀하다는 의미로 신이나 부처님이나 남을 의존하지 않고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보통사람들은 나를 자기모습으로 생각하는 데요 내가 ㅇㅇㅇ이다 그러면 ㅇㅇㅇ이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데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수행해서 깨우치신 분’으로 이 ‘나’라는 것은 나와 남이 없는 즉 참나요 무아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 스스로가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 하나 하나가 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삼계라면 욕계 색계 무색계를 뜻합니다. 세계할 때 세자는 시간을 말하는 세상이고 계자는 공간을 말하는 세상입니다. ‘삼계’라는 것은 앞의 구절에서 천상 천하와 같은 말로서 공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우주이고 ‘개고’는 모두 다 고통인데 이것을 ‘아’즉 각자의 참나입니다. 세상이 비록 힘들고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와도 각자의 자기자신이 편안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어디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각자의 참 성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안에 그대로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이 들어 있다는 것이며 내가 누구에게 의지함없이 홀로 스스로 귀하다 이 소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냥 태어나서 깨우치신 게 아니라 전생에 수많은 세월 동안 수행을 꾸준히 해오시다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계셨습니다. 이것을 ‘도솔천의상’과 ‘비람강생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오셔서 태어나신 곳이 룸비니 이죠! 그것을 ‘비람’이라고 해요. 도솔천에서 내려 오셔서 룸비니에서 태어나셨다는 이런 뜻입니다. 어린 시절을 이모 밑에서 보내고 나이들고 철이 조금씩 들면서 세상을 구경하게 되는 데요 이것을 ‘사문유관상’이라고 합니다. 궁궐의 동서남북을 다니면서 세상 구경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인의 몸이 되어 불교 공부는 어떻게 해야 될까 많은 것을 생각해 왔습니다. 법상스님께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나 자신을 보면 한심할 때도 있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불교 공부를 하고 신행해야 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해답은 찾지 못하고 저의 나름대로 돈으로 한번 비유해봤습니다.
돈은 새돈도 돈이고 헌돈도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되었다고 해서 돈의 가치가 며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에 가끔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는 사람을 봅니다. 누누가 자기 인생에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고쳐야할 나쁜 습관도 있겠지요. 살다보면 자신의 앞에 닥쳐올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가야할 길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왔는지를 한 번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혹시 자신의 약점을 너무 크게 보거나 자신감이 없어서 더 나은 삶과 행복한 삶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어떤 성취나 행복을 얻으려면 그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가꾸고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그 가능성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지 않을까? 가능성을 존중하고 희망을 가져야 행복하고 노력하고 정진하면 누구나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법상큰스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은 있습니다. 건강이 좋은 사람은 머리가 나쁠 수 있고, 건강도 좋고 머리도 좋은 사람이 복은 없을 수도 있듯이, 건강과 지식과 복을 다 갖춘 사람이 장수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도 지혜가 모자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영원히 자유로운 삶에 대한 원력이 없어 보다 나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물과 사랑과 권력과 명예 등을 다 내가 소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살아갔다면 그는 영원히 불행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자신이 못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면 그는 현재 자신의 특징과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여 문제점을 해결해야 합니다.
해결방법은 우선 간절한 마음으로 본시에 갖추고 있는 부처님을 믿고 열심히 불법을 수행하여 방법을 찾아 나가는 일 뿐입니다. 불자라면 부처님 진리를 배우고 익히며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과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은 있기에 자신의 생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스님 말씀처럼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 결과로 작은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그로인해 성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성이란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 같은 것으로 비유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누구나 자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은 스스로 노력해서 바꾸는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소질을 계발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정진한다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법화경 약초유품에는 삼초이목의 비유가 나옵니다. 상중하의 약초와 크고 작은 나무가 나름대로 독특한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약기운이 강한 약초는 중한 병에, 약한 약초는 가벼운 병에 쓰입니다. 가벼운 병에 강한 약초를 쓰면 약효가 지나쳐서 새로운 병을 만듭니다. 또한 이쑤시개 용도의 나무를 대들보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못난 풀이나 작은 나무도 각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화경 약초유품”
법화경 제28품 중 제5약초유품을 공부하다 보면요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약초유품의 큰 뜻은 세상의 큰 진리를 약초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중 방편과 비유가 많이 인용되는데 품으로서 응용하신 것은 법화경 이십팔품 중 약초유품과 화서유품 두 품인데 왜 약초에 비유를 하셨는가 하면 약초는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모든 중생들에게 건강을 회복해 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여 상대방의 건강을 이루어주는 보살과 같은 모습과 또 약초는 좋은 사람이나 싫은 사람이 없이 평등하게 대해 준다는 일심 자비심을 나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초유품은 희생과 봉사, 평등, 자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자기의 이익과 욕심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약초는 불보살의 마음으로 자기를 바쳐 상대방이 성불한다면 오직 그것으로 최고의 기쁨을 삼고 있으니 우리가 참으로 연약해 보이지만 모든 초목 - 약초 앞에 서면 부끄럽기 그지없고 초라한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첫머리에 마하가섭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마하가섭은 용서라고 풀이해야 됩니다. 참고로 부처님 당시 마하가섭은 신통도 뛰어나고 세력가며, 밑에 제자도 많이 거느렸는데 부처님이 한때 찾아가심에 부처님을 불용이 있는 굴에 해치려 가두었습니다. 한참 후 다음날 부처님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문을 열어보니 불용을 쥐새끼처럼 만들어 놓고 가섭을 원망하지도 않은 채 빙그레 웃음으로 대해주시는 큰 자비에 감탄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깨달은 가섭이 세상의 진실한 공덕을 알고 찬탄하니 참으로 장하구나 하시며, 세상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이승지덕을 갖추고 있으니 너희들 모두는 한량없는 억만겁 동안에도 알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세상우주의 무한한 환희와 섭리를 말씀 하시며 보이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참고할 것은 약(藥)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풀초(艸)는 항상 남을 위해 존재하므로 언제나 즐겁습니다. 또 풀초(艸)를 우주에 비유하여 우주는 항상 기쁘다라는 것을 약(艸)자에 줄여 놓은 점도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섭에 이르기를 여래는 모든 법의 왕이시므로 모든 것이 허망하지 않다는 것은 세상은 우리들처럼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변하지 않고 오로지 한 섭리로 존재하므로 그릇되지 않다는얘기고 부처님은 모든 세상 섭리를 지혜와 사실대로 알맞게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이 우리를 지혜의 본질로 이르게 합니다. 가섭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하늘에 큰 구름이 일어 지혜의 갈증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감로법우를 흠뻑 내릴 적에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비를 받지만 그 비를 받는 것은 자기 근기대로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부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복덕을 수시로 한없이 내리지만 자기 그릇만큼 받는 것은 다 자기 탓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받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그릇이 적어 적게 받으면 많이 받은 사람을 원망하고 또 세상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세상은 평등하건만 모든 것은 자기 탓이니 마음의 그릇을 지혜의 넓은 그릇으로 키워나가면 세상의 큰 복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서 말씀하시길 나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 하심은 세상은 오로지 한 마음 “일승”으로 존재함을 이야기 하고, 십호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새겨야 하는 열가지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부처님은 지혜가 없어 고통스럽게 살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끌지 못한 미도자를 제도해주고, 미해자-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해진리를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해주고, 미안자-스스로 편안하지 못한 자를 편안케 해주고, 미열반자-스스로 성취 하지 못하는 사람을 성취시켜 주며, 여래는 현재도 알지만 미래의 세상도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자ㆍ일체견자, 살아가는 길을 아는 지도자, 모든 것을 열어주는 개도자, 모든 길을 안내하는 설도자라 아직도 아름다운 진리를 모르고 사는 하늘사람-자기가 제일 높다는 자리, 아수라-남이 못되는 것을 좋아하는 자리, 너희는 여기 와야 하니 그것은 지혜를 알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일상일미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모든 물체의 모습과 모양은 각각 다를지언정 그 성품과 의미는 다 똑같이 한가지 “일승”으로 구족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중생은 부처님 말씀과 섭리를 알고 수행하여도 그 얻은 공덕을 알지 못하므로 염하사, 사하사, 수하사는 세상살이를 단순한 생각, 아직 성문의 생각으로 인생을 생각하고 구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내용이며, 운하념, 연각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운하사, 연각의 마음으로 궁리하고, 운하수, 연각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하법년은 섭리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이하법사는 지혜를 향하여 고뇌하며, 이하법수는 어떻게 하면 지혜를 수행할 수 있을까, 이하법득하법은 어떤 지혜를 가져야 좋은 지혜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초목과 약초들이 스스로 상중하를 모름은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씀드리면 우리도 여래의 모습처럼 한마음, 한생각의 본래 여래 모습을 이루면 세상 만사 전부를 알 수 있고 걸림이 없이 잘못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마음에 한번 더 다짐해봅니다.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을 아시고 지혜의 본질을 말씀 하시지 않고 있었는데 가섭-용서, 평등, 봉사-이 여래께서 근기에 맞게 말씀하심을 아시고 능히 믿고 지닌 것입니다.
게송에 보면 수수와 포도가 나오는데 수수는 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생명을 쭉 뻗어 올리는 자존적 삶을 의미하며 포도는 가지가 뻗어갈 때 걸어줄 줄이 없으면 뻗지 못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를 지탱하지 못하는 의존적 삶을 이야기 함이며, 포도넝쿨은 늘 가지를 지탱할 줄을 걱정합니다. 우리는 포도의 삶처럼 의존적 삶이 아니라 수수처럼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갈 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약초유품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만큼 자기의 입지가 상중하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맞은 단계에 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법은 모든 것에 활법 생법이기 때문에 여래의 섭리를 알고 노력하고 살아가면 금방 행복은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약초유품이 제5품인 것은 오는 중심을 이야기하는데요, 약초는 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중심을 지켜 나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약초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병을 하루빨리 낳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약초는 사람들이 뜨거운 물에 넣어도 들어가면서도 원망이 아니라 미소를 짓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약초처럼 살아간다면 이세상은 불국토가 될 것입니다.
저희가 약초유품을 써 올리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000보살님의 마음씨가 이 약초유품처럼 자비애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간직하셨기에 저의 마음을 약초유품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현하여 올리는 것이오니, 부족함이 많더라도 넓은 보살의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살님께서 약초처럼 고통받고 있는 지옥 중생들에게 베푼 공덕은 한량이 없어 많은 복을 받아 “향연방개”가 피어 날 것입니다. 향기로운 연꽃이 바야흐로 피어 있듯이 보살님 가정에 항상 연꽃이 만발하여 가족과 “환담소성” “즐거운 웃음꽃”이 넘쳐 충만하시기를 부처님 전에 발원하는 마음 ㅇㅇ은 간절합니다.
그리고 존경하옵는 법상큰스님 미혹한 중생의 어두움을 밝혀주시는 법문으로 긴 터널 속에서 갈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매한 중생들을 제도하여 주시고 큰 스님께서도 법체 항상 존안 하시면서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는 깨달음에 이르시길 간전하게 두손모아 빌겠나이다.
삼복더위와 짓굳은 장마철에 법체존안 하시기를 삼가 오체투지로 빌겠습니다.
큰스님 성불하십시오.
2009년 7월 20일 ㅇㅇㅇ 합장 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힘내시고 또 좋은 글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