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문
오정현씨는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10년이 되는 무렵에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초기 저술들을 출간합니다. 또한 그 무렵에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출간한 책은 오정현씨가 활동하던 시기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열정의 비전메이커, 저자 오정현, 출간일 1997년 6월 30일, 규장
* 목회트렌드 2000, 저자 오정현, 출간일 1997년 12월 31일, 규장
* 비전을 움켜쥔 사람들,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간일 1998년 4월 30일, 기독신문사
이 3권의 책에는 '73학번 이론'이 아니고서는 연대기적으로 말이 안되는 사항들이 다수 있습니다. 각각 열비메(열정의 비전메이커), 목트(목회트렌드 2000), 비움사(비전을 움켜쥔 사람들)라고 줄여서 부르겠습니다.
3. 비전을 움켜쥔 사람들 (비움사)
(1)
오정현 씨와 관련된 책 중에 비움사는 오정현 씨가 개입하지 않은 채 내수동교회 대학부 편찬하여 출간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책입니다. 출간 시기는 오정현씨가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열비메, 목트를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은 98년 4월입니다.
비움사라는 서적은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역사가 기록된 마지막 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70년대, 80년대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 주보, 소식지 등에 실렸던 글을 수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움사가 특이하다는 것은 이 책 내용에 당시 대학부원 오정현의 글이 일부 수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2)
내수동교회 대학부 초기 역사를 언급하는 후반부의 글을 먼저 보겠습니다. 참고로, 이 부분은 내수동교회 대학부 페이지에 샘플로 올라와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비움사 239-240쪽] 대학부가 처음 형성된 것은 1974년 10월이었다. 1973년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회에 들어간 이성주를 비롯한 몇몇 형제, 자매들이 전통적 교회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년회에 부족함을 느끼고 이종현 등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그러다가 대학부의 필요성을 느껴 당회장 신복윤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정식 부서로 인정되지 않아 목회자가 시무하거나 당회의 재정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16명의 회원으로 대학부 역사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학부는 네비게이토 원리를 도입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 사람을 양육하고 일꾼을 만들어야 한다는 형제들의 신념 속에서 태어났다.
1975년 박희천 목사님이 부임하셨고, 이 무렵 오정현이 지방에서 올라와 대학부에 참여하면서 이성주, 이종현 등과 함께 대학부의 주역이 되었다.
--> 1973년도 내수동교회 창립 멤버들은 청년회 모임에 참석했으나, 대학생 중심의 모임을 분리하여 가지기 위해 따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 오정현 씨를 신촌 다락방 모임으로 데려갔던 이종현 씨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형태로 정식 인가 받는 74년 이전 초기 내수동교회 대학부 모임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3년 당시 오정현 씨는 어떻게 이종현 씨를 만나 다른 대학부 창립 멤버들과 어울리게 되었을 까요? 1) 재수생 신분으로 공부하느라 새벽 기도만 참석하던 중에 교회 분들의 소개로 만났을 수도 있고, 2) 아니면 재수생 신분으로 청년회에 속해 있다가 어울렸을 수도 있고, 3) 대학생(!) 신분으로 청년회에 있다가 대학생들만 모인다는 모임에 어울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부원들이 오정현 씨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아주 먼 과거도 아니지만 '증인들'이 되어 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또, 저 기록에 75년 무렵에 오정현 씨가 지방에서 올라와 대학부에 참여하여 주역이 되었다는 내용은 처음에는 (재수생 또는 자칭 대학생 자격으로) 창립멤버들과 개인적으로는 어울렸지만 대학부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실제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오정현 스스로 밝히는 73년도 상경 또는 대학 1학년생, 73-74년도 대학부 활동 등의 기록과의 차이가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움사 242쪽] 즉, 처음에는 회장을 중심으로, 이성주와 오정현이 엘더가 된 1978년 이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대학부의 비전과 방향성이 정해져,
[비움사 243-244쪽] 이러한 열정은 용산 L'abri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76년부터 대학부를 주도하던 이성주, 이종현, 오정현 등이 제자 양성과 리더 훈련을 위한 공동 생활의 필요를 절감하다가 영적 부흥 이후 1979년 1월에 24시간 연속 기도를 하면서 준비하였고, 마침내 5월 3일 용산구 서부 이촌동 중산 아파트에서 '라브리'를 개원하였다.
--> 오정현 씨의 부친은 2남인 오정호 씨까지 서울에 올라오자 거처를 마련할 필요를 느꼈을 것 같고, 오정현 씨는 이를 잘 활용하여 '라브리'라는 생활공동체가 설립될 수 있도록 하였을 것 같습니다. (참고: 당시 대학부원이던 박성규 씨의 다음 글 참고 http://www.churchr.or.kr/news/articleView.html?idxno=2767 오정현 목사님 아버님께서 얻어주신 서부이촌동 중산아파트에서 7명 남짓의 형제들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비움사 245쪽] 오정현이 간사로서 1981년까지 사역을 했고,
[비움사 247쪽] 1985년 오정현 강도사님을 초빙한 여름 수련회는
--> 1985년 내수동교회 여름 수련회 설교자는 오정현 '강도사' 입니다.
(3)
비움사 자료를 보면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정체성이 1978년도 옥한흠 목사님이 강사로 오신 수련회를 계기로 정립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1978년 4월 23일자 오정현 씨 작성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움사 139쪽] 감히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련회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으랴마는 지금까지 4번의 수련회를 빠짐없이 참석했고, (중략) 74년 10월에 대학부를 세우시고, .. 76년 2월 29일부터 3월 2일까지 일일 수련회를 영보 수녀원에서 박희천 목사님, 김병선 전도사님을 모시고 연 것이 수련회의 효시가 되었는데
--> 74년 10월에 대학부가 설립된 이후 76년 2월에 최초 대학부 수련회가 있었고, 기록 대로라면 오정현은 그 때부터 위글이 작성된 시점인 78년 4월 이전까지의 4회 수련회에 참석합니다. 다른 기록대로라면 오정현 씨는 76년도에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장이었는데, 청년회에서 대학생들 그룹만 분리되어 74년 10월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대학부에서 76년도에 회장이 되었다는 말은 그 중에서도 75년 한 해동안 오정현 씨가 제일 열심히 활동을 했다는 말일 것 같습니다.
[비움사 141쪽] 이제 우리 대학부의 나이가 5살이 되었다. (중략) 1978.4.23. 남5 오정현
--> 오정현 씨의 78년도 작성 글에는 대학부의 나이가 5살, 본인은 대학부 5학년 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오정현 씨 스스로 74년도에 대학교 1학년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 부분은 오정현 씨의 다른 저술 내용과 모순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997년도 본인이 직접 저술한 '열비메' 및 '목트'에서는 본인이 73학번이라고 얘기하였지만, 본인이 개입하지 않고 1998년도에 출간된 '비움사'를 보면 78년도 당시에는 대학부원들에게 본인이 74학번이라고 얘기 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자면,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이미 있던 청년회에서 대학생 중심의 모임으로 분리된 모임이기 때문에 그때 재수생이었다거나 다른 신분인데 대학부 학년 카운트를 시작한 것은 아니고, 대학교 1학년이기 때문에 대학부 1학년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정현 씨는 자신의 과거 학력에 대해서 78년도 전후 대학부원일 당시에는 74학번이라고 말하고 다니다가, 남가주 목회를 하던 97년도에는 73학번이라고 책에 기술하였고, 서초센터가 지어질 즈음인 2013년도에는 '거의 40년이 지난 자신의 검정고시가 왜 문제 되는지 모르겠다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우리에게 묻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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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없는 옛날 책 뒤지느라 시간 쓰는 짓은 앞으로 그만하려고, 모두 열거하는 식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이 모든 책들에 나오는 그의 기록들에 진실된 내용이 과연 몇 %나 될까요? 이것도 알 사람만 알도다 일까요?
'비움사'에 나온 얘기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술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85년 여름수련회 강사 '오정현 강도사'가 자꾸 눈에 밟히는 군요...
대학생 신분이 아닌데 대학부에 중요한 리더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보통의 경우 재수를 할 경우에 대학부에 출석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주일예배만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미 대학생이라고 사칭을 했으니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친구와 후배들을 교묘하게 속였겠지요.
이종현씨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 분이 당시 정황을 잘 알텐데.
@스케쳐 최재진 서울대 언어학과를 다녔던 이종현씨를 찾아봅시다. 혹시 목회자가 된 것은 아닌지요?
puzzle---jigsaw---mystery---paradox---enigma
거짓을 움켜쥔 사람들...
내수동교회 대학부 다수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들도 역시 오정현씨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겠죠. 제가 비움사를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내수동대학부 사람들이 스스로를 "증인들"이라 부르는데 이 호칭은 이미 브랜드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일에 대해서는 '증거'하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은 헛된 구호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자료들을 볼려면 일찍 들어와 봐야겠군요. 아직 지우개들이 출근을 안했을 시간이니 ...
거짓이 거짓을 낳는다 ..... 전형입니다. 자기 과시욕을 위하여 하나님을 파는자, 이런자들이 하나님의 돈을 횡령하며 떵떵거리고 사는대 이를 감독해야 할 기관들이 초록은 동색이라고 감싸고 있으니 ... 한국 교회는 이런 먹사들로 황폐해져갑니다.
시간 있으신 분들은 다음 주 월화에 있는 정기노회가 열리는 곳에 가셔서 노회재판의 잘못을 알리는데 참여 하시지요..
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신이신 분들 중에 85년 수련회 전체 사진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주강사: 오정현 강도사" 이렇게 찍혀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사진.
참고로 오정현 등이 만들었다고 하는 '라브리공동체'는 프란시스쉐퍼박사 부부가 설립한 국제선교단체인 'L'abri Fellowship'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으며 단지 이름만을 차용한 사설모임입니다. 1980년대 말 영국라브리에서 수학하다 귀국한 성인경, 박경옥 간사(현 한국라브리대표)에 의해 정식으로 라브리 한국지부가 설립될 당시까지 오정호 등에 의해 유지되던 '라브리공동체'는 더이상 'L'abri'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L'Abri Fellowship과 혼돈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보충합니다. 라브리선교회에 대해 궁금한 점은 www.labri.kr 을 참고하시면 될 듯 합니다.
오정호는 총신대 다니땔 자기형 표절박사의 검정고시 또는 77관동대, 78숭전대 입학한걸 알텐데 지금도 형제애로 쌩까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총회의 중책을 맡고 기독교언론회의 이사도 맡고 하는 것을 보면 합동 교단이나 그 언론회의 수준를 알만 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4.06 17:0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4.06 18:50
대학 다닌다 뻥치니 사람들이 믿어주대요 사기가 내 체질이구나 하는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게 왜 화두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누라도 처가집도 모르는 내 학벌 캐내니 좋습니까? 케토톱도 아니고 말야 성도는 그저 헌금 많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한테 내는 돈이 내 돈 아닙니까? 내 인생에 태클걸지마세요 조용히 빼먹다 사라질테니까요 지옥행 열차라도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강남사람답게 크게 헌금 합시다 헌금 하는 자에게 대대손손 복이있을지어다
아님 말고. . . . . . .
건축헌금 하는자 3대가 복
십일조 하는자 2대가 복
감사헌금 하는자 당대 복
헌금 안하는자 출교
잘들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