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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제1독서 : 에페 2,19-22
복 음 : 루카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언젠가 성공회에서 옮겨 온 분의 세례와 견진 문제로 이리저리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세례와 견진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세례는 간단하였습니다.
누가 세례를 주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공회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었습니다.
가톨릭교회로 일치되는 예식도 이미 거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견진은 어떻게 될까요?
의문스럽기는 한데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는 없어서
교회법, 교리, 전례 전공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법을 전공한 분이,
교황청에 있는 친구에게까지 물어 답을 주었습니다.
견진을 준 주교의 성품이 사도 계승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천 년 전에 살았지만,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사도 계승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전에 살았던 조상이 있고
우리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우리는 사도들에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에페소서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2,20)이라고 말합니다.
족보에서 첫 조상이 다르면 다른 집안이 되듯이,
하나의 집안인 교회는 모두 사도들을 기초로 하고,
그 기초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전하여 오는 신앙을 잘 간직하면서,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초인 사도들과 결합하여
“하느님의 한 가족”(에페 2,19)인 교회의 일치를 지켜 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보면, 대체로 80년대의 노래입니다.
당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아니면 엘피판이나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들었습니다.
특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서 들고 다니며 들었습니다.
음질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당시에 들었던 것들입니다.
지금 훨씬 더 좋은 음질과 멋진 사운드 그리고 다양한 노래가 있음에도
잡음이 잔뜩 들어가 있는 노래에 감탄사를 내뱉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부족한 삶에 대한 낭만일까요? 부족했기에 더 집중했고 그래서 사랑했던 것입니다.
‘찌지직’ 거리는 잡음 소리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긴 영상을 보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튜브의 짧은 영상만 보고, 책도 두꺼운 것이 아닌 얇고 글씨 적은 것을 본다고 하더군요.
집중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만큼 풍요로움 속에서 보고 들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족함이 있어야 작은 것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족함보다 풍요로움을 미덕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족함 속에 있으면 불행한 것으로 단정짓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을 지냅니다.
열두 사도의 일원인 두 사도의 축일이기에,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싶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의심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셨고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배고프고, 그리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니 분명히 풍요로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부족함 투성입니다.
이 부족함 안에 계속 머물라고, 전교 여행을 보내실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부족했을 때 행복의 이유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삶은 풍요로움이 가득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삶도 부족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함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할까요?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곧 신분이나 능력이나 지위에 있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히었기에 거룩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에 의해 뽑히었고, 거룩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건물’이 되고, 거룩한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20)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도 이 '건물'(집)은 '자라납니다.'
곧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그렇게 자라나면서 신령스런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참으로 신령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 당신의 신비가 살아있다니,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분이 나보다 작아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경탄할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을 건설합니다.
바로 내가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집의 건축 자재요, 그 가정의 식구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참된 스승과 제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는데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이들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 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 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쇄신을 갈망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91년 8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월 5일에 첫 본당인 중곡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이 앞으로의 사제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의 세례명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였습니다.
타대오의 이름은 ‘유다’였는데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스카리웃 유다와 구별해서 ‘타대오’라고 부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에게서 ‘자유’를 배웠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는 두 개의 날개를 타고 날았습니다.
하나는 ‘기도’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루에 3시간 이상씩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 방의 기도 초는 신부님의 기도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수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이처럼 순수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제 막 새 사제가 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매일 동네 산책을 같이하였습니다.
보좌신부가 더 필요하다면서 용돈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33년 저의 사제 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셨던 타대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영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동창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시몬’입니다.
제가 예수님 시중을 들며 분주했던 마르타와 같았다면
그 친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던 마리아 같았습니다.
제가 눈에 띄는 ‘꽃’을 지향했다면 그 친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았습니다.
제가 소리만 요란한 ‘빈 그릇’ 같았다면 그 친구는 속이 꽉 찬 ‘그릇’이었습니다.
저는 활동과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면 그 친구는 홀로 있음에서 힘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뭔가 한 것 같은데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는데, 그 친구는 침묵 중에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2년 전입니다. 저는 북미주 파견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 지도를 제안받았습니다.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난감했습니다. 그때 제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동창 신부였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매년 수도원 피정 지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피정 자료를 보내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귀한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산과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그런 친구를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주변에 있는 분, 나와 함께 일하는 분,
내 가족들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조욱현 토마 신부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제자의 본분은 스승에게 배우고,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가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이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처럼”(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은혜로운 만남!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제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마다 정말이지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 저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토록 부족한 저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이런저런 단련과 정화의 과정을 겪게 하신 후,
남 앞에 서게도 하시고, 크게 영양가는 없지만,
당신 말씀의 선포자로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최측근 협조자로 부르신 12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명 한명 면면을 살펴보면 대체로 존재감이 없던 사람들,
가방끈도 길지 않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분은 사도단 안에서도 10번째, 11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분들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며 전직 열혈당원이었다는 것뿐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유추할 뿐입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폭력과 살상도 마다하지 않던
독립군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군사로 변화되었다.”
유다 사도의 이름은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딱 세 차례에 걸쳐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대신 타대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다 사도를 예수님의 형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 사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 성경학자들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모호한 인물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다.”
두 사도들에 대한 관련 자료나 문헌이 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처럼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단 내에서도 크게 주목 받지 못해서 그 영향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쪽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충직했습니다.
고민하고 따지기보다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스승님의 모든 말씀은 내게 있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목숨걸고 준수해야 할 명령입니다!’라고 여기며 목숨걸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사도로서 자신의 신원에 걸맞게 살려고 애를 쓰다 보니 따로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추수할 일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앞에서 말하기보다는,
하루 온 종일 죽기 살기로 헌신하고 뛰어다닐 일꾼이 필요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시몬과 유다 사도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까지 불사하던 시몬 사도가
사랑과 자비의 열혈당원으로 탈바꿈한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매국노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던 그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선포자로서의 열정으로 끓어오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강렬한 애국심과 저항정신은
이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변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다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한 인간의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혼동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안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어떤 것이 더 큰 것인지?
삶의 질서를 잡게 도와주십니다.
마침내 이승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삶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과 한 인간의 참 만남은 이렇게 큰 은총과 선물로 다가옵니다.
사도 시몬과 타대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교회는 시몬과 타대오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낸다.
이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 12사도 중 두 사람이다.
신약성서는 12사도의 명단 속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전해주고 있을 뿐 다른 내용은 거의 없다.
시몬은 갈릴래아 지방 가나 출신(가나안)으로서(마태 10,4)
그에게 붙여진 “혁명단원”(마르 3,18; 루카 6,15)이라는 별명처럼
하느님 외에는 어떤 통치자도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라도 로마제국의 압제에 항거하여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뭉친 젤롯당에 속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시몬이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활동 속에서
정치적인 메시아의 모델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다 타대오는 신약성서에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명기되기도 하고(루카 6,16; 사도 1,13),
사도 야고보와 함께 알패오의 아들 타대오(마태 10,3),
또는 그냥 타대오(마르 3,18)라고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도를 편의상 “유다 타대오”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는 명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데,
그것은 가리옷 사람 유다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요한 14,22)하고 묻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사도 유다 타대오가 혁명당원 시몬처럼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이기를 바랬던 점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자료에 의하면 시몬은 처음에 이방인과 유다인들에게,
나중에는 이집트, 키레네, 마우리타니안, 리비아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마지막으로는 페르시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다 타대오도 처음에는 팔레스티나에 머물다가
아라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마지막에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 시몬과 유다 타대오는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톱으로 몸이 잘리는 순교를,
유다 타대오는 도끼에 목을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장엄한 과정을 거쳐 12제자를 선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계속된 치유행적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엄선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보니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루카는 이렇게 산과 평지를 구분하였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카 복음사가가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일 것이다.
“제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선포의 지상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아 그분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되어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