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YOOoba2zvU?si=C8ksr0tX3t7X9S6z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 1 - Barenboim, Celibidache, MPO (1991)
차이코프스키의피아노 협주곡 1번 Op.23
이 작품은 민족주의적 낭만시대에 살고 일했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처음부터 이 곡을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에게 헌정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1875년(35세) 2월에 이곡을 완성하자 곧 그 초고를 들고 루빈시타인을 찾아갔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피아노의 거장으로 유명한 안톤 루빈시타인의 동생이며 형에 못지않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당시 차이코프스키가 몸담고 있던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은인이요 선배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 곡을 시청하는 자리에는 동료교수인 후버트도 함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모스크바 악단의 중진인 이 두 사람에게서 좋은 평이 나오기를 기대했었다. 그때의 모습을, 차이코프스키의 전기를 쓴 바 있는 카슈린은 이렇 게 전하고 있다.
[악보 표지]에는 니콜라이에게 드리는 헌정사가 씌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의 성과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 기 때문에 니콜라이에게서 큰 칭찬이 나올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니콜라이는 피아니스트도 아닌 차이코프스키 가 이 곡을 씀에 있어서 자기에게 한 마디 의논도 하지 않은데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 처음부터 적의 편견으로 대했다.
그래서 루빈스타인은 이 곡이 피아노에는 부적당하다느니, 칙칙하다느니, 독창성이 없다느니 하면서 격렬하게 까내 렸다. 차이코프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루빈시타인의 충고에 애정과 진 의가 깃들이어 있었다면 차이코프스키도 그의 말을 경청하고 개작했을는지 모른다. 내성적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악보 하나라도 변경하지 않고 출판하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모처럼 썼던 헌정 사를 찢어버리고, 얼마 전부터 알게 된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토록 친했던 두 사람 사이는 벌어지고 말았다. 이 곡은 뷜로에 의해 1875년 10월 25일 미국 보스턴 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루빈시타인은 이 곡이 초연된 3년 후에 차이코프스키에게 사과하고 그 뒤로는 그 자신의 연주회에서 이 곡을 자주 연주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 곡은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지적하여 말하였듯이, 피아노 독주부에 꽤 어려운 기교가 요구되고 있다. 물론 이 곡이 작곡된 그때와 현재와를 비교해 보면 피아니스트의 기교도 장족의 진보를 하고는 있으나 꽤 숙달된 피아니스 트가 아니고서는 완전히 쳐내지 못한다. 특히 격렬한 춤곡 가락이 난무하는 제3악장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세련된 서구적 협주곡과 달리 러시아적인 어둡고 서정적인 선율과 슬라브적인 거칠고 중후한 화음, 색채적인 관현악,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솔로 피아노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엔 피아노 협주곡의 최고 인기작의 하나로 4년마다 열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본선 지정곡으로 비르투오조적 피아니스트의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어 왔다.
전곡 중 4개의 혼에 의해 유도되는 제1악장 도입부의 주제도 인상적이지만 독주 플루트에 의한 목가적인 제2악장 안단테 주제와 현에 의한 제3악장의 가요풍의 제2주제가 특히 아름답다.
악기편성 : 독주 피아노,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4, 트럼펫2, 트롬본 3, 팀파니, 현악 5부
https://youtu.be/uf9RMOOJhCU?si=qbRxHeFktRKDwczV
Ivo Pogorelich ..Chopin - First Piano Concerto Op.11 ..Shades of Zagreb, 2012
이보 포고펠리치Ivo Pogorelich(1958~ 유고슬라비아)
1980년,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콩쿨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1, 2차 예선을 거치면서 가장 뛰어난 연주기량을 들려주었던 이보 포고렐리치가 본선에서 탈락되자 일부 심사위원이 퇴장하고 청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두차례의 예선을 거치면서, 특별상과 비평상을 수상하며 보여준 이보 포고렐리치의 너무나도 개성이 강한 연주는 심사위원들로부터 "호평"과 "악평"의 극과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을 만큼 예사롭지 않았는데 이런 포고렐리치가 본선에서 탈락하자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졌고, 급기야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심사위원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포고렐리치를 “천재”라고 평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심사위원직 사퇴로 인해 그 해 콩쿨 우승자였던 베트남 출신의 피아니스트 “당 타이손”보다도 훨씬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된 이보 포고렐리치는 이 사건 이후 단번에 스타덤에 오르며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안정된 테크닉의 토대 위에, 논란의 소지가 많은 자의적인 해석과 웬만해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은 이후로도 계속 찬반양론을 불러 일으켰다.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 출신인 이보 포고렐리치(Ivo Pogorelich)는 1958년 벨그라드에서 태어났으며 7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모스크바의 중앙음악학교와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여류 피아니스트 알리자 케제랏제(Aliza Kezeradze)였는데 이보 포고렐리치는 1980년에 12살 연상의 그의 스승이었던 알리자 케제랏제와 결혼하였다. "알리자만큼 나의 음악 세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녀와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결합을 이뤘던 포고렐리치는 1996년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이로인해 심한 우울증세를 보여 그의 연주활동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쇼팽 콩쿨에 앞서 몬트리올 콩쿨과 이탈리아의 테르니(Terni)콩쿨에 도전하여 모두 우승을 따낸 이보 포고렐리치는 1981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데뷔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후 가는 곳마다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주인공이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 Orchestra),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hicago Symphony Orchestra),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Boston Symphony Orchestra),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 등 수많은 세계 굴지의 유명 오케스트라들로 부터 협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으며 연주회는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연주는 항상 “초현실주의”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극단적인 낭만성과 극에서 극을 오가는 템포설정, 독창적이다 못해 괴팍하다는 평을 받을정도의 개성적인 곡해석으로 인해 자신만의 음악세계가 투철하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화제와 그의 팬들이 뒤따르기로 하였다. 1980년에 첫 음반으로 발표한 '쇼팽 리사이틀'이 발매 사흘만에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후 1982년부터 도이치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고 총 15종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가장 최근에 발매한 음반은 2002년에 출시된 음반으로 이 수록되어 있다.
이단아적인 성향이 강한 이보 포고렐리치의 또다른 면모는 명성이나 물질대신 젊은 음악도들을 후원하거나 전쟁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더 큰 열성을 쏟고 있는 그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986년 크로아티아에 재단을 설립, 젊은 연주자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1989년부터는 매년 <이보 포고렐리치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재능 있는 청소년들이 저명한 연주자들과 연주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한편 1993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이보 포고렐리치 콩쿨>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1994년, 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할 병원을 사라예보에 세우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으며 유네스코의 후원을 얻어 이 재단을 위한 수차례의 콘서트를 갖고 있다.
이밖에도 적십자를 돕는 자선연주회, 사라예보 재건을 위한 자선연주회, 암이나 복합성 경화증과 같은 불치병 퇴치를 위한 자선 콘서트 등 남들을 돕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유네스코에서 1988년에 '친선대사(Ambassador of Goodwill)'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음악을 통애 인류애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이보 포고렐리치도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2005년 10월 6일 예술의 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갖졌다.
글출처: 하늘바람꽃
https://youtu.be/Ixq-AEkxM54?si=bWZCoF5rHD3rRf7A
Ivo Pogorelich -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live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