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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아무도 살지 않던 그때 거기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공룡이 뛰어다니고 익용이 날아다니기 전, 땅과 하늘과 바다가 생기기 전, 거기에는 누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옛날 아주 옛날부터 있던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사도야!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살리는 이와 함께 하느냐, 죽이는 이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존재가 영향을 받는다.‘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결과는 생명이었고,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다.
"It was said that there were no people living long ago," who lived there when no one lived there? Who was living there before dinosaurs ran and dragons flew around, and before land, sky, and sea formed. Let's start a long story that has existed since a long time ago. Sado! Life can be different depending on who you are with. Existence is affected by whether you are with the one who saves or with the one who kills. Jesus, introduced as 'The Word', was with God from the beginning, and the result was life and a light that lit up the dark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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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말씀도 계셨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세상의 생명은 하나님과 말씀의 깊은 관계의 산물이다.사랑의 소산이다.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는 우리와 말씀의 관계 원형이다. 그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그 말씀을 통해서만 생명답게 존재할 수 있다. 말씀을 떠나서 존재의 의미도 목적도 가치도 찾을 수 없다. 그 말씀을 통한 창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말씀이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 교회와 가정을 창조하고 있는가?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In the beginning, there was also a word with God. God created the world through those words. The life of the world is the product of a deep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word. It is the product of love.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word is the prototyp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us and the word. The world created by those words can exist as life only through those words. Apart from the word, there is no meaning, purpose, or value of existence. Creation through those words still continues. Is the word creating us and creating our church and home? There is life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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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어둠 가운데 빛을, 혼돈 가운데 질서를 창조한 것이 생명이다. 생명이 빛이라면 어둠은 사망이다. 어둠 가득한 이 땅에서 생명을 누리려면 빛이신 말씀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빛의 인도함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 빛을 거절했다. 말씀의 창조를 거절했다. 말씀을 떠난 존재는 어둠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을 더나 이성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어둠의 무명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중이다. 빛이 왔고 생명이 왔다.
That life gave us life today. Life gives birth to life. It is life that created light in the dark, and order in the chaos. If life is light, darkness is death. To enjoy life in this land full of darkness, we must be illuminated by the Word of Light. We must follow the guidance of light. But the world rejected that light. He refused to create the Word. Being who has left the Word is darkness and death. The obscurity of darkness, which maximizes the autonomy of reason, is causing death by itself. Light has come and life has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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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왔다. 그 빛과 생명을 전하도록 빛의 실체보다 앞서 온 사람이 있다. 그가 빛이 아니고 빛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가 생명을 줄 수 없고, 생명을 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목하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빛이신 주님, 말씀이신 주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말씀, 세계와 인간은 어떤 관계일까?
The word came. There is a man who has come before the substance of light to convey that light and life. He is not a light, but a man who transmits light. He is only a man who cannot give life, but who delivers words that will give life. He is a man who does not make people pay attention to him, but through himself, he believes in the Lord, who is the light, the Word, and obtains life.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Word, the world an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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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야! 참 빛이 세상에 비추었지만 그 빛을 싫어하여 어둠 속으로 숨은 자들이 있어 왔다.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이 세상에 참 빛이 비치었지만 세상이 그 빛을 거부한 것이다. 이런 현실가운데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생명이 왔다. 말씀이 왔다. 참 빛이 왔다.생명이 생명 되는 구속자가 왔다. 자신이 창조한 땅에 왔고 자신이 창조한 백성에게 왔다. 하지만 빛의 소유인 세상은 주인을, 창조주를 거절했다. 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Sado! True light shone on the world, but there were those who hid in the dark because they hated it. The world was created by words, and true light was shining on this world, but the world rejected that light. Where in this reality can we find hope? Life has come. The word has come. The light has come. The restrained man who lives came. He came to the land of his creation and to the people who he created. But the world, which belongs to light, rejected the master and the creator. It did not recognize his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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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통치를 인정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셨다. 빛과 말씀을 영접하는 순간, 인간적인 환골탈퇴에 머물지 않고 새 사람으로 창조된다.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성막이 되셨다. 광야의 성막에서 첫 언약 백성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새 언약 백성에게 임하셨다. 첫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과 성전에 베푸셨던 은혜와 진리가 이제 육신을 입은 말씀 안에 더 충만하게 임하셨다.
But those who recognized the rule were made to belong to God, the children of God. The moment light and the word are received, they are created as new people, not as human beings. The word of God came to the earth in flesh. He came to his people in his land. He became the tabernacle of the living among his people. The glory of God, which was seen to the people of the first covenant in the tabernacle of the desert, has now come to the people of the new covenant. The grace and truth you gave to the first Israelites and the temple are now fuller in the words of the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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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이 임재 한 백성들은 더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누린다. 첫 언약의 은혜를 뛰어넘는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율법이 그림자로 가리킨 실재를 드러내실 것이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의 정체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보다 뒤에 오시지만 그보다 먼저 존재하셨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과 기대를 이 육신으로 오신 말씀,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드러내실 것이고, 그분의 백성으로 창조하실 것이다.
The people who are present with this word enjoy more full grace and truth. You will give grace beyond the grace of the first covenant, and you will reveal the reality that the law pointed to as the shadow. The identity of the word in the flesh is Jesus Christ, the poisonous creature of God. He came after John, but existed before him. He is God who has come so that he can see with his eyes. God will fulfill God's love, plans, and expectations for this world through this flesh-and blooded word, God. You will reveal God's power and wisdom, and you will create him as his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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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수 안에서 우리는 창조부터 새 창조까지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 분을 볼 수 있다. 모든 인간 역사의 절정으로 예수는 이 땅에 오셨고,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해서 말 할 수 없다. 죽음의 세상에 어떻게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는가?보지 않고 나타낼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신 수단이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은 무엇으로부터 시각된 믿음인가?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 난 무엇을 투자할 것인가?
In this Jesus, we can see the man who presided over all the history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 At the peak of all human history, Jesus came to the earth and cannot speak about God without going through him. How did life enter the world of death? Has anyone seen God? Can he represent without looking? What is the means by which God revealed himself? From what is our faith seen? What would I invest to ow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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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존재한 말씀과 하나님(1-2)
말씀으로 인한 창조(3-4)
참 빛 예수의 성육신과 요한(5-8)
a.참 빛과 사람들의 반응:5
b.증거자 요한:6-8
세상에 임한 빛에 대한 두려움(9-13)
a.세상에 임한 참 빛:9
b.부정 반응:10-11
c.긍정 반응:12-13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14-18)
a.예수의 성육신과 요한의 증언:14-15
b.성육신으로 인한 결과: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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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1a)
말씀이 계시니라(1b)
이 말씀이(1c)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1d)
이 말씀은(1e)
곧 하나님이시니라(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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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2a)
태초에(2b)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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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3a)
그로 말미암아(3b)
지은바 되었으니(3c)
지은 것이(3d)
하나도 그가 없이는(3e)
된 것이 없느니라(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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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4a)
생명이 있었으니(4b)
이 생명은((4c)
사람들의 빛이라(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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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5a)
어두움에 비취되(5b)
어두움이(5c)
깨닫지 못하더라(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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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서(6a)
보내심을 받은(6b)
사람이 났으니(6c)
이름은 요한이라(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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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7a)
곧 빛에 대하여(7b)
증거하고(7c)
모든 사람으로(7d)
자기를 인하여(7e)
믿게 하려 함이라(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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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8a)
이 빛이 아니요(8b)
이 빛에 대하여(8c)
증거 하러 온 자라(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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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빛(9a)
곧 세상에 와서(9b)
각 사람에게 비취는(9c)
빛이 있었나니(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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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10a)
세상에 계셨으며(10b)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10c)
지은바 되었으되(10d)
세상이 그를(10e)
알지 못하였고(1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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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땅에 오매(11a)
자기 백성이(11b)
영접치 아니하였으나(1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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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자(12a)
곧 그 이름을(12b)
믿는 자들에게는(12c)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12d)
권세를 주셨으니(1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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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13a)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13b)
사람의 뜻으로(13c)
나지 아니하고(13d)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13e)
자들이니라(1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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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14a)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b)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14c)
아버지의 (14d)
독생자의 영광이요(14e)
은혜와 진리가(14f)
충만하더라(1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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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15a)
그에 대하여(15b)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1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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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에 말하기를(15d)
내 뒤에 오시는 이가(15e)
나보다 앞선 것은(15f)
나보다 먼저(15g)
계심이니라 한 것이(15h)
이 사람을(15i)
가리킴이라 하니라(15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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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16a)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16b)
은혜 위에 은혜라(1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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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17a)
모세로 말미암아(17b)
주신 것이요(17c)
은혜와 진리는(17d)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7e)
온 것이라(1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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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하나님을(18a)
본 사람이 없으되(18b)
아버지 품속에 있는(18c)
독 생 하신 하나님이(18d)
나타내셨느니라(1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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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태초부터 계신 말씀과 생명의 빛_
Jesus, the light of the word and life that has been there since the beginning of time._
참 빛을 거절한 세상과 영접한 자녀_
a child exposed to the world who refused to be true_
예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전_
a temple full of grace and truth, Jesus._
생명이요 참 빛 되신 주님, 이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이미 창조를 계획하시고 진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말씀이신 당신(j)을 통해 만물이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을 배웁니다. 자기다움은 자기 본분을 지키며 살아갈 때 유지 되는데 참 빛이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지다가 이제는 밝히 비춰졌건만, 어두움 때문에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인류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부디 내 안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과 함께 해 같이 떠오르게 하옵소서.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인간 예수를 통해 시공간으로 나타났나이다. 광야나 산속, 이 세상 너머의 어떤 곳에서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찾는 일은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불의한 현실을 변화시키고, 그를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내 주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Life and true light Lord, not only did you plan and proceed with creati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is world was established, but you also learn that all things are being created through you (j), who is still the Word. Self indulgence is maintained when you live by protecting your duty, and true light has been passed down through the prophets and is now illuminated, but please take pity on the image of mankind that cannot benefit from the darkness and let it rise with the light. God's glory and grace have emerged in time and space through human Jesus. It is not the gospel to find his glory and grace in the wilderness, in the mountains, or anywhere else in the world. Only God can save the world by intervening in history and changing the unrighteous reality and meeting those who seek him. Come here, my Lord Jesus, our King.
2026.2.1.sun. Clay
신학 비평 1//
아주 밀도 높은 텍스트입니다. 이미 설교·주석·신앙고백의 층위는 충분히 갖추셨고, 이것을 태초에 존재한 로고스(예수)의 객관적·중심적 구원이 가능한가?”라는 전제를 놓고 칭찬보다는 긴장, 확신보다는 검증 쪽에 무게를 두겠습니다. 태초의 로고스는 과연 ‘객관적 중심’으로 구원할 수 있는가?
1. 요한복음 1장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본문이다
요한복음 1장은 명백히 고기독론(high Christology)이다.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고-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이시다. 여기까지는 정통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로고스가 “객관적 중심”으로 굳어질 때 발생한다. 예수가 이미 모든 것을 구원했고 역사는 단지 그 구원의 전달 과정이며 인간은 그것을 인식하거나 거부할 뿐이라는 도식은 복음이 사건이 아니라 체계로 만들 소지가 다분합니다.
2. 로고스는 헬라 철학의 ‘객관적 이성’인가?
요한이 “로고스”라는 말을 썼을 때, 그는 이미 헬라 세계의 언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a. 로고스 = 질서, 이성, 우주적 원리 b. 스토아적 로고스 = 세계를 관통하는 합리성dlsep 요한은 이것을 전복합니다. 그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말씀=로고스=예수의 도식이 탄생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비평적 질문이 생깁니다. 로고스가 다시 초월적 객관성의 중심으로 복귀해버린다면 성육신은 정말 전복인가, 아니면 일시적 방문인가? 만약 예수가 이미 완성된 진리-이미 닫힌 의미-이미 결정된 구원이라면, 그의 성육신은 위험을 감수한 사건이 아니라 계획된 시연에 불과해집니다.
3.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말의 철학적 긴장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구절은 종종 이렇게 오해됩니다. 생명은 예수 안에 저장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전달받는 존재다. 그러나 요한의 문법은 다릅니다. 생명은 관계적 사건-하나님–말씀의 관계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닫힌 실체가 아니라 발생 중인 것입니다. 생명은 “객관적 소유물”이 아니라 말씀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하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로고스가 객관적으로 보유한 무엇이 아니라 로고스와의 접속 사건입니다.
4. “빛이 왔으되 깨닫지 못하더라”의 의미
이 구절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문장을 잘못 읽으면, 세상은 본질적으로 무지하고 교회는 이미 빛을 소유한 집단이며 역사는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적 우월성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1:9) 빛은 이미 모든 인간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거절은 무지가 아니라 관계의 실패입니다. 세상은 빛을 ‘못 본 것’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인 겁니다.
5. 객관적 중심 구원의 한계: 구원은 자동화될 수 없다
만약 예수가 태초부터 모든 것을 규정한 중심이고 그의 구원이 이미 객관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인간의 응답은 부차적이고-선택적이며 사실상 장식품이 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끝까지 이것을 거부합니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는”(1:12) 여기서 영접은 지적 동의 no-교리 수용 no-제도 가입 no 존재의 방향 전환입니다. 구원은 로고스의 객관성만으로 성립하지 않고 반드시 주체의 균열과 이동을 요구합니다.
6. 성육신은 ‘중심의 하강’이지 ‘중심의 확장’이 아니다
당신의 글에서 가장 강력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광야나 산속, 이 세상 너머에서 영광을 찾는 일은 복음이 아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급진성이 드러납니다. 성육신은 신적 중심이 인간에게 확장된 것이 아니라 신적 중심이 자기 위치를 포기한 사건입니다. 로고스는 더 이상 “객관적 중심”이 아닌 그는 상처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오해받고-거절당하고-죽임당합니다. 객관적 중심은 죽지 않고 사건만이 죽습니다.
7. 결론: 태초의 로고스는 ‘객관적 중심’이 아니라 ‘역사적 균열’이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자면, 태초에 존재한 예수(로고스)의 객관적·중심적 구원은 가능한가? 아니다, 그대로는 불가능합니다. 가능해지는 순간은 오직 하나입니다. 로고스가 객관적 중심이기를 포기하고 역사 속에서 거절당하는 사건이 될 때. 요한복음 1장은 절대적 중심의 선언이 아니라 그 중심이 육신이 되어 흔들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설명이 아니라 만남이며, 체계가 아니라 응답입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세상을 위에서 통제하는 객관적 원리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절당하면서도 끝까지 관계를 요청하는 하나님의 자기비움이 아닐까.
신학 비평 2//
<객관적 중심적 구원>의 개념 정리를 하고, 태초 이후에 탄생한 예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창조 행위를 했는가가 질문의 관건입니다. 다윗도 시편에 예수가 내 후에 오시는 분인데 이미 그(J)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자가 무엇이관대...<지연>과 연결할 수 있을까?
1. <객관적 중심적 구원> 개념 정리
객관적 중심적 구원이란, 구원이 ① 특정 역사적 사건 이전에 ② 우주적 중심에서 ③ 인간의 응답과 무관하게 이미 성립해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인식·수용만 하면 된다는 구원 이해입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1) 객관성: 구원은 인간 주체의 내적 변화 이전에 이미 성립 2) 중심성: 구원의 근거는 역사 속 예수 이전, 태초의 로고스에 있음 3) 비대칭성: 하나님은 행위자, 인간은 수용자 이 개념은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요한의 태초의 로고스-히브리서의 영원한 대제사장에서 강력한 성서적 근거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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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개념 자체가 이단적이거나 비성경적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해석의 방식’으로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객관적 중심이 역사와 관계 이전의 완결된 실체로 이해될 때 성육신은 전달 수단이 되고 십자가는 연출이 되며 인간의 응답은 장식이 됩니다. 그래서 정통 신학은 항상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구원은 객관적이되, 사건적이어야 합니다
2. “태초 이후에 탄생한 예수가 태초에 창조 행위를 했는가?”
이것이 질문의 정중앙입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동일성’이 아니라 ‘관계적 동일성’입니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만물은 그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1:14에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창조에 참여한 말씀=역사 속에서 탄생한 예수는 동일한 주체입니다. 하지만 동일성의 방식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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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일성을 이렇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태초에 예수라는 인격이 수염 달고 천지를 만들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 태초에 하나님의 자기 표현, 자기 소통, 자기 지연된 현존으로서의 말씀이 있었고 ✔ 그 말씀이 역사 안에서 예수라는 인격적 사건으로 도래했다. 동일성은 실체 동일성이 아니라 자기 계시의 연속성입니다.
3. 다윗의 고백: “내 주여”의 시간적 역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도 이 구절을 사용하셨죠. 여기서 충격은 이것입니다. 다윗 이후에 태어날 메시아를 다윗이 “내 주”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시간의 역설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메시아는 역사적으로는 ‘후에’ 오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이미 중심에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예수의 생물학적 탄생을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로 수렴되는지를 본 것입니다. 예수는 시간 속에서는 ‘지연된 미래’지만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는 이미 ‘결정된 중심’입니다.
4. “사람이 무엇이관대”와 로고스의 지연
시편 8편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인자"입니다. 히브리어 ben adam은 단순히 인간 일반이 아니라 대표 인간, 관계적 인간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2장은 이 시편을 예수에게 적용합니다. 시편 8편의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는 인간성입니다. 여기서 ‘지연’ 개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그 통치는 즉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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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8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그에게 복종한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고” 통치는 약속되었으나 지연되었습니다. 이 지연의 자리에서 인간은 실패했고,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역사는 고통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는 태초부터 계획된 중심이지만 그 중심을 즉각 행사하지 않으셨고 인간의 시간 속으로 <지연>되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기로 태어나고-배고프고-오해받고-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이 지연이 없다면 성육신은 사랑이 아니라 강압이 됩니다.
5. 객관적 중심적 구원은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다만 완결된 실체로 이해될 때는 불가능합니다 객관적 중심은 태초의 계획-역사의 방향-의미의 수렴점으로만 유지되어야 합니다. 예,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인격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로고스로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시간을 앞질러 이미 그를 “내 주”라 불렀고, 시편은 인간 일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열린 인간성을 노래했습니다. 예수는 태초부터 중심이었으나, 그 중심을 즉시 행사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 속으로 ‘지연되어’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 <지연>이 곧 사랑이며, 그 <지연> 속에서만 구원은 사건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