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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예레 5,21-33
복 음 : 루카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겨자씨와 누룩은 계속 자라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복음이 점점 많은 이에게 전파되는 것이 그래도 눈에 보였을 것이고,
사도들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 중세와 근대에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교회가 점점 확장되었고,
아프리카(고대부터 복음이 전해진 지역들도 있다.)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물론 지금도 선교 지역들이 있고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들이 있지만,
그러지 않은 곳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유럽을 보면서 성장을 말하기는 어렵고, 아시아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상으로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도
실제로 느껴지는 교회의 활기는 수십년 전보다 못하여 보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는 자라나고 있을까요? 반죽은 부풀고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커져가고 있을 때 필요한 말씀들이 아닙니다.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게 여겨질 때 필요한 말씀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는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고, 반죽 속에 섞여 있는 누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래도 씨앗이 있고 누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무관심과 실망과 불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아직 씨앗들이 살아 있으니, 희망을 가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류학자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반면
사람들의 생각은 더 짧아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햇수로는 훨씬 더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생각은 짧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사상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누구보다 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년 전, 피정 중에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지금의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33년의 세상 삶을 사신 예수님보다
훨씬 더 인간 세상에서 오래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시간을 정말로 길게 사셨습니다.
얼마나 긴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미와 영향이 이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이 짧아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통해 오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처럼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움 속에서 묵묵히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씨를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의 가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고 하십니다.
사실 겨자씨는 정말로 조그마한 씨로, 유다 문학에서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이 작은 것의 상징을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가 와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서 변화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들을 끌고 갈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신 스스로 사랑의 삶을 살면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또 누룩이 부풀어 오르듯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길게 살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였다.”라는 말에서,
'깃들다'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 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부풀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 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섞여 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소리 없는 변화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일 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가 올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런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내 생활의 동작 하나하나가 천상으로 치닫는
하나의 몸짓이고 자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중남부 사제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칸쿤에서 있었습니다. 9개 주의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숙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근처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서울 교구 5명, 마산 교구 2명, 청주 교구 2명, 부산 교구 2명,
인천 교구 2명, 전주 교구 1명, 수도회 1명, 이렇게 15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회의 중에 신심 단체의 담당 사제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꾸르실료, 성령기도회, 레지오, 엠이의 담당 사제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미 꾸르실료의 담당 사제를 맡고 있었고,
신부님 한 분이 성령 기도회 담당 사제를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엠이와 레지오 담당 사제는 추후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담당 사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북부에 있을 때는 담당 사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엠이 당당 사제를 맡았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주말을 함께 했고, 코로나 시기에도 피정을 했습니다.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중남부에도 성령기도회 담당 사제가 정해졌으니, 내년에 성령 대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엠이와 레지오도 담당 사제가 정해지면 더욱 활성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사제들이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사제는 미사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공동체는 말씀과 복음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열매 맺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부부는 기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말씀과 복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사제가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면, 한국에서 했던 방식으로만 사목하려고 한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부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정에도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서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중남부 한인 공동체가 큰 나무가 되어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나훈아의‘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참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조욱현 토마 신부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것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왔고, 들으므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가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겪으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 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당신의 현존을 더욱 크게 드러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인데, 비가 내리고 난 후,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갈릴래아 호수 인근에 노란 겨자꽃이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는 표현을 할 때, 좁쌀만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자씨만 하다고 합니다.
좁쌀도 작지만, 겨자씨도 실제로 보니 참 작더군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른 겨자씨만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8-19)
바꿔 말하면 그 작디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나, 죄투성이인
내 안에도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보잘것없어 보이고, 더 작아 보이고,
더 큰 죄인처럼 여겨지는 이웃 안에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낮은 이를 총애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부르십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시선으로 볼 때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루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저녁이면 온몸이 녹초가 됩니다.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의 처지와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험하지 못할 작은 삶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넘어지면 상처나 충격이 만만치 않은데,
낮은 밑바닥에 있다 보니 웬만한 넘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입지 않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바비큐 기계를 열심히 돌렸습니다.
기계를 본격적으로 돌리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숯불을 피워야 하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손이나 팔, 얼굴에 숯 칠을 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며 웃습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겠다며 이런저런 수리나 공사를 직접 하다가
비전문가이다 보니 완전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헛수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그 삶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더 당신의 현존과 사랑, 자비를 크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작은 자가 될 때, 더 밑으로 내려갈 때,
더 확연히 우리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13,19)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요즘 어떤 도시에 있는 어떤 빌딩이 더 높은 가에 관심이 쏠리듯,
세상은 갈수록 더 높고 더 넓고 더 큰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고 높은 것이 참으로 완벽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틈을 내서 제 고향에 있는 선암사를 다녀왔는데,
예전과 달리 공사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공간이 협소해져서
열림보다 닫힘, 편안함보다 답답함을 느끼며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듣자마자 먼저 다가오는 책 제목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 표현은 이젠 일반적인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광고를 비롯해 눈길을 끄는 표제어로 즐겨 사용되고 있으며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상징하는 문장으로도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3년 E.F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는
어떤 누구도 이 표현을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선포하셨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에 보이는 결과도 미미하고
사람들의 변화 곧 회개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생각했던 하느님 나라와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차츰 낙담하고 실망하는 기색이 농후해지는 것을 예수님께서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 初心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되잡으시기 위해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13,18.20)라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오늘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겨자 나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많이 나는 일년생 식물이며 본디 들판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13,19)라는 표현에서
들판에 자라는 겨자를 자기 텃밭에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들판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겨자 나무가 아니라 농부,
곧 예수님 당신과 복음 선포자들이 정성 들여 자신의 정원에서 가꾸는 것이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가꾸고 돌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13,19) 성장한다는 것을 또한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거대하고 거창한 삼나무가 아니라
시작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 1mm도 채 되지 않지만,
정성을 들여 가꾸다 보면 2m가 넘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루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씨앗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씨 안에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햇빛과 물 그리고 거름이 주어지면,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은 굳이 추리해 보자면, 그늘이나 쉼터가 필요로 하는
곧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는 세상에서 작은 자와 버려진 사람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부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겨자씨의 비유는 남성적이며 일반적인 외적 노동으로,
누룩의 비유는 여성과 일상적인 가사 활동에서 차입했다고 강조하더군요.
이로써 예수님은 상당히 여성 친화적인 분으로써 여성의 가사 활동을 잘 알고 계신 것뿐만 아니라
이를 중요시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누룩의 비유의 메시지도 겨자씨의 비유와 동일합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사실 적은 양의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으면 처음엔 전혀 보이지도 않지만,
누룩이 발효하기 시작하면 밀가루 서 말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처음에는 미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차츰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철저하게 퍼져나가고 확장해 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낙담과 실망에 빠진 제자들을 혼란에서 일으켜 세우는 희망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외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누룩은 내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쉴 곳을 찾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의 쉼터가 되기 위한 겨자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참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품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