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은 조선 세조대의 인물로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무과에 급제했던 기린아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그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여 출셋길에 올랐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일약 조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세조 말년에 남이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구성군 이준의 뒤를 이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신진세력의 약진을 고까워하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의 견제를 받았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능지처참 당하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한명회의 친구였던 장인 권남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으므로 수렁에 빠진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백성들은 남이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채 피기도 전에 꺾여버린 그의 운명을 아기장수 설화에 대입시키기도 했다. 무속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까지 했다. 그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9명의 충무공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