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하게 성공한 사람보다는 밑바닥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다가 출세한 인생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러니까 기생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노예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와 같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 태어난 장영실이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의 치밀한 손재주에서 나왔다. 일찍부터 복잡한 기계를 잘 고친다는 소문이 동래에 쫙 퍼져 있었다. 동래에 부임했던 관료들이 장영실의 능력을 보고 서울로 올라와서 활동하다가 세종 때에 본격적으로 발탁이 되었다. 발달한 천문관측기를 보고 오라고 중국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었다.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이다. 세종은 장영실을 아주 측근에 두고 천문기기를 포함한 여러 가지 과학기계를 만드는 일을 시켰다. 간의, 혼천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일성정시의 등이다. 장영실이 제작한 최고의 과학기계는 바로 1434년에 만든 자격루이다. 아라비아와 중국의 물시계가 ‘자격루’ 라고 한다. 이번에 건국대 남문현 교수가 20년 넘게 걸려 복원한 물시계는 바로 이 장영실의 자격루이다. 조선시대 과학기계 중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가 이 자력루인 것 같다. 세종 대에 장영실과 함께 이러한 과학기술 작업에 참여했던 멤버는 이순지와 이천이다. 장영실이 실무책임자였다. 혜성과 같이 등장하였던 장영실은 임금의 가마를 잘못 만들어서 형벌을 받고 갑자기 역사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 미스터리를 추적한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라는 소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