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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마스 주남여사님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 복음
성경의 기록은 믿을만 한가? 공산 국가인 러시아의 사전에는 예수님이“결코 존재하지 않은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오늘날 진정한 역사 학자로서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들은 대단히 많다. 성경이나 그 밖의 다른 기독교 저술 외에 비 기독교 자료에서도 그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 A.D. 37년에 태어난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요세비우스)는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이때쯤에 예수라 하는 한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유대인과 또한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 지도자 격인 사람들의 제안으로 그를 십자가 형에 처했을 때, 처음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가 다시 사실 것과 그 밖의 수많은 기적들을 예언한 바와 같이 그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신약 성경 이외에도 예수님이 실재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게 다가, 신약에 있는 증거들은 대단히 확실하다. 우리 민족이 널리 믿고 있는 단군 신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민족에게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변함 없이 그 신화처럼 그의 자손으로 믿고 있는 삼국 유사 (A. D. 1281년 고려 충렬왕7년에 경주 사람 고승 일연(김견명)이 편찬한 사서이다. 원본 판은 현존하지 않는다)에 딱 한번 나오는『단군 신화』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보자.“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항상 뜻을 인간 세상에 두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서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 인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이르고, 이 분을 곧 환웅 천왕이라 불렀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形) 선(善) 악(惡)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되, 원컨대 사람이 되어지이다 하거늘, 한 번은 환웅이신령스러운 쑥 한 자루와 마늘 20 톨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기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참지 못하여 사람이 못되었다. 사람이 된 곰 곧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또 신단 아래서 축원하기를 아이를 배어지이다 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깐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생략)” 이와 같이 삼국 유사에 짧게 기록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신화를 민족의 사실로 인정하려 하고 있다. 이 신화는 삼국의 건국 시기에 기록된 것도 아니다. 고려 말기에 기록된 사실과 그리고 곰이라는 짐승이 변하여 사람이 된 후, 하늘에서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아 우리 민족 곧 백의 민족(또는 홍익 인간)의 조상이 되었다는 낭설이다. 이것을 믿으라는 것인가? 이것을 믿으라면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성경은 왜 믿으려 하지 않는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원전 연구가인 호트(F.J.A.Hort) 박사는 말했다.“성경은 지금까지 의존하고 있는 증거들의 다양함과 풍부함에 있어서 고대 산문 기록 중 독보적인 존재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왜 시편 기자인 다윗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그토록 즐거워했을까?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 성경은 인기가 높다. 매년 미국에서는 4천 4백만 권의 성경이 팔리고 있다. 미국의 모든 가정에는 평균 6.8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타임지의 한 기사는 최근“현대 영국 소설가들과 텔레비전의 끼워 팔기식 판매는 잊어버려라. 성경이 매년 가장 잘 팔리는 책”이라는 머릿 기사를 달고 있다. “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성경이었다. 만약 성경의 누적 판매량이 솔직하게 베스트 셀러 목록에 반영된다면,그 자리를 다른 책이 차지하는 주간은 보기 드물 것이다. 구할 수 있는 책의 영역이 해마다 점점 더 확대되어 가는 때에, 이 한권의 책이 시간이 흘려가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가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 이상하고, 아니 점점 더 신이 사라져 가는 이시대에 이해하기 힘든 일일 뿐이다. 대영 제국에서 매년 팔리는 성경과 신약성서는 거의 1백 25만 권에 달한다고 한다. 성경의 모든 판본들은 언제나 잘 팔린다. 성경협회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글쎄요, 그만큼 좋은 책이니까요?” 둘째 - 성경은 힘이 있다. 1928 년 5월, 영국의 수상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은“성경은 강한 폭발력을 지녔다. 그러나 성경은 신비하게작용하기 때문에, 그 책이 전 세계에 퍼져 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수천의 다른 장소에서 개개인의 영혼을 울려 새로운 삶, 새로운세상, 새로운 믿음,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신앙으로 인도했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성경은하나님의 힘을 싣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니 영원히 남녀노소, 빈부귀천, 직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의 말씀에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가장 미련한 사람이기 때문에 감격과 감동이 없을 뿐이다. 셋째 - 성경은 소중하다. 『인생의 의문점들』저자인 니키 컴블이 경험한 이야기이다. 약 8년 전 러시아 공화국의 일부였던 중앙 아시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어 성경과 기독교 서적 몇 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은 예배가 끝난 후 60세 가량 보이는 한 남자의 뒤를 좇아가서그에게 다가가서 성경 한 권을 건네 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리고는 자기주머니에서 분명히 100년은 된 듯한 신약성서를 꺼냈다. 책장은 너무나 닳아서 투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이 온전한 새성경책 한 권을 받았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했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고, 나 역시 러시아 말을 한 마디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끌어 안았고, 그는 기뻐서 껑충껑충 뛰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왜 그토록 인기가 많고, 그토록 힘이 있으며, 그토록 귀한 것일까? 예 수님은 그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다.”(마4:4, 신8:3) 이 말씀은 현재 시제로‘계속해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고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흘러넘치는 물줄기, 샘물의 물줄기와 같아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두 가지만 생각해 보면, ① 성경은 우리가 믿는 것(신조)의 근거이다. 만약에 성경이 없었다면 무엇을 근거하여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 따라서 성경은 바른 대상을 바르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조의 근거이다. ②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행위)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눈에 무엇이 옳으며, 어떻게 하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믿고 상고하며, 공부하면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도리어 큰 화를 당하고 말 것이다. 위대한 전도자 D. L. 무디가 지적했듯이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늘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형성되어 전해 왔는가를 수회에 걸쳐서 배워왔다. 우리 손에 들려 오기까지 이 성경은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는가? 구체적인 역사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오기까지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성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믿는 자에게 성령을 내주케 하시는 일, 그 다음으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성경을 우리 손에 들려주신 일이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내 몸처럼 사랑하자. 가까이 하자. 평생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자.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도리이다. |
2. 성경은 믿을 만 한가?
[차례] 2-1 성경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2-2 가짜 복음서들은 무슨 목적으로 생겼는가? 2-3 성경은 과학과 상반되는가?
2-1 성경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벤허와 다빈치 코드 '벤허'는 20세기에 나온 영화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다음은 그 원작에 얼긴 이야기 입니다.
벤허의 원작자 루이스 윌리스는 1827년 미국 인디애나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 성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이 되었던 그는 한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아들임을 밝히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메시아니 초능력적인 인물이니 하는 허구를 다 벗기고 순수한 인간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그의 집필 목적이었다. 그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구가 들려준"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것이다"는 비관적인 한 마디 말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으며 예수의생애를 추적하고 탐구하는 동안에 성경의 진실성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도믿게 되었다. 윌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스란히 소설의 주인공에게 투영시켰다. 1880년 출팔된 "벤허"가 바로그것이다. 이 소설은 1959년 영화화 돼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루이스 윌리스는 학문적인 양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본 인의 애초 의도는 예수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부인하고 예수가 한낱 인간임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으나, 연구과정에서 자신의 의도와다른 결과가 나오자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fact)을 그대로 수긍하는 양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40년전 조쉬 맥도웰은 그리스도교가 거짓임을 굳게 믿고 그리스도교의 거짓됨을 폭로하고자 개인적인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수백 시간 이어진 연구의 과정 가운데 의심은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근거에 대해발간한 책 <기독교의 변증>은 천만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이 두 사람과 대조를 보이는 사람이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입니다. 이 책에서 댄 브라운은 의도적으로 객관적인 사실를 비껴 다니거나 조작과 왜곡을 일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댄 브라운은 자신의 적그리스도적인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객관적 진리는 애써 피해 다니고 이미 거짓으로 입증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책을 썼던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거짓' 일색이라는 사실을 가장 장 알고 있는 이는 댄 브라운 자신이었습니다. (라은성, 차동엽 공저, <다빈치 코드의 족보> 참조)
성경은 누가 언제 썼는가?
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게 기록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올브라이트 박사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고고학에 의하면 구약전승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팔레스틴의 고고학 전문가인 넬슨 글루엑 박사도 평생 성경고고학을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개괄적으로, 혹은 세세하게 확증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예 나 지금이나 전 세계적으로 최고이 베스트셀러로 뽑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성경 안에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부터 전쟁이야기,사랑이야기, 시, 격언 등 모든 물학이 총망라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진 것일까요? 성경은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저자들이 쓴 원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고대의 모든 책들이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은 사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었기에 손으로 옮겨적었는데 이를 사본이라 합니다.
성 경은 오랫동안의 구전 전승 기간을 제외하고도, 기원전 9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까지에 걸쳐서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전 목록 확정과 편집 과정까지 합하면 약 1600년이 결려 완성된 책입니다. 이렇듯이 성경은 여러세기에 걸쳐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느님의 책인 동시에 인간의 책이기도합니다.
진실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면 성경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수 있는가? 첫째 수많은 사본의 숫자가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오늘날 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구약성경 사본은 11,000개 신약성경 사본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번역본을 합해 13,000개가넘는다고 합니다. 시이저가 쓴 갈리아 전쟁기(Gallic Wars)의 필사본의 수가 고작 10개, 타키투스의연대기(Annais)는 다 모아도 겨우 20개뿐임에 비할 때, 구약과 신약성경 필사본 수가 고대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압도적으로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명한 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갈리아 전쟁기'나 '연대기'가 시이저나 타키투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런데, 성경으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곧잘 있어 왔습니다. 사본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냉철한 판단을 할 필요가있는 것입니다. 둘째 원본과 사본의 시간 간격이 짧다는 사실이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학자들이 원본 성경과 그 사본들의 저작 연대를 비교해 본 결과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이 훨씬 더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47년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성경학자들은 구약성경 원본과 그 사본 사이의 간격이 불과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책 입니다
4 복음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약성경들은 신약 성경의 원문 기록이 완료된 후 150년경에 쓰여진 Chester BeattyPapyri에서 찾아 볼 수 있있니다. 이에 비할 때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의 '박물지'(Natural History)의 경우원본과 가장 오래된 사본간에 750년의 시간 격차가 있습니다. 역사상 사본의 권위가 가장 높은 2번째 책은 호머의 '일리아드'로원본과 사본 간에 400년의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고대의 다른 문학작품들과 비교ㅐ 볼 때성경은 원본이 쓰여진 시대와 가장 가까운 필사본을 가지고 있읍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원본의 기록과 오늘날 우리가 읽는사본간의 시간 간격이 짧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도 본문의 왜곡 가능성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원래저자들이 썼던 그 성경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통일성 이미 밝혔듯이 성경은 1,600여년에 걸쳐 40명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러나 연대가 다른 다양한 저자들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죄에 빠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구원계획"이 그것입니다. 다른 연대, 다른 지역, 다른 저자들,그리고 한 가지 주제의 완벽한 조화! 이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매거진 프로젝트 참조). 어 떤 목수 한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7명에게 테이블을 만들라는 일을 시켰다. 그는 디자인 해야 할 테이블의 각 부분을각자에게 할당했다. 한 사람은 테이블의 다리를 만들고, 또 한사람은 서랍을 제작했다. 그리고 각 부속품들을 완성하는데 일주일의시간이 주어졌다. 각각7개의 다른 부속품들이 하나의 테이블로 정확하게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이 가는가? 4개의다리 길이가 서로 다르고 서랍은 맞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2티모3,16)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통일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성경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너무나도 조화롭게 담고 있습니다.
결론 결 론적으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씁니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말씀입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것입니다"(2베드1,21) 성 경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유익합니다"(2티모 3,15-16)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페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페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것이다"(마태5,17-18)
2-2 가짜 복음서들은 무슨 목적으로 생겼는가?
또 하나의 스캔들, 유다복음서(The Gospl of Judas) 2006년 4월 9일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TV와 인터넷을 통해 <유다복음서>를 전면 공개했습니다. AD130-170 년 무렵 영지주의 한 분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다복음서>의 원래 텍스트는 그리스어로 되어있었으나, 4세기 무렵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콥트어로 번역되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다복음서>는"예수가 유다와 나눈 계시에 대한 비밀스런 이야기"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책은 '유다의 예수 배반'이 사실은 예수가인류구원이라는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유다와 모의한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인간의 구원을 이루려는 신의계획도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 제자의 배반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라은성, 창동엽 공저 <다빈치 코드의 족보> 참조)
이 책은 이미 서기 180년대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의 <이단논박>이라는 책을 통해 이단 적인 책으로 판별된 책입니다. 약 15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저술이 아니라, 1945년에 나일강 유역에서 일시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신봉자들의 저슬입니다. 그러기에 '신비한 문서'일 뿐 성서가 아닙니다. (위의 책 참조)
가짜 복음서들 1945 년 에집트에서 많은 복음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토마 복음서, 필립보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유다복음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들의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이들이 '영지주의 문서'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지주의란 인간의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전적으로 악하다는 이원론을 내세우는 종교적 신념을 말합니다. 초 세기부터 교회는 이 영지주의가 "에수는 가짜 인간일 뿐이다. 선한 존재인 신은 절대로 악에 기원을 두고 있는 육체를 지닌 인간이될 수 없다"는 허황된 사상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단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지주의 문서들은 가짜복음서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지주의 문서들은 어떤 목적으로 기록된 것일까요? 본 래 영지주의 문서들은 예수의 활동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저술 연대도 아무리 빨라도 예수의십자가 사건이 얼어난 후 대략 100년 내지 15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심지어는 4-6세기에 기록된 것들도 있습니다. 이복음서들에는 사변적 사상들이 담겨있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더라도 인간의 사색으로 충분히 얻어낼수있는 사랑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와 사도의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물론 예수의 몇몇 말씀들을빌려오긴 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상'이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독립적인 정보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진실을 왜곡시킨 종교 사상입니다. 그러기에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성경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성경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외경에도 속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위경 곧 가짜 성경인 것입니다.
영지주의 '가짜'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의 차이 신약 성서와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비교해 본 사람은 그것들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영 지주의 복음서들이 역사의 기록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역사에 무관한 데 비해, 신약은 그 자체로 철저히 역사의 기록입니다.예를 들어 루카는 역사가들이 중요한 사실들을 다룰 때 쓰는 엄밀한 방법을 사용여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문서와자료를 활용하고, 목격자들에게 세부적인 사항들을 확인했으며, 자신의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차례대로' 기록했습니다. 또한독자가 그의 글을 읽고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 그 정보에 기초애 분명한 결단을 내리도록 돕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루카가 정확한 역사의 기록자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도시, 바다 선박, 지리적 세부상항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사 람들이 검증된 역사 기록인 정경을 제쳐두고 굳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믿으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신적인존재가 되고자 하는 시대정신 때문입니다. 신적 존재에 의존하는 기도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직접 신적 경지에 이를 수있다는 사상, 다양한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구, 여권시장주의의 압력 등이 영지주의 복음서에 열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2-3 성경은 과학과 상반되는가?
둘 다 진리라면 서로 일치 다른 한쪽이 거짓일 경우에만 충돌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상충하지 않는다 성경은 과학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역사적으로 성경과 과학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 학이발달하기 전만 해도 성경으 창조이야기는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세 이후 우주 과학과 천체 이론이 소위'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되고 전개되면서, 오랫동안 종교와 과학은 원수지간처럼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결론부터 말하자면 종교와 과학은 긴 세월의 우여곡적 끝에 근래에 들어와서 화해관계에 들어섰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해서갈릴레오를 파문했던 교황청이 수백 년이 지났읍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세기 말에 공식 적 으로 사과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이로써 교회는 과학의 성과에 대해서 존중해 준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사실로 받아들여진 우주에 대한 정보가 창조 신앙에 적대적이라고 보지않습니다. 교회의 공식입장은이렇습니다.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 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목헌장 36항) 신 앙에 바탕을 둔 종교와 합리성에 입각한 과학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둘 다 진리라면 서로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다른 한쪽이 거짓일 경우에만 충돌하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진리와 상충하지 않다"라고 천명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입니다. 과 학도 신학도 모두가 하느님 안에 근거하고 있으며, 창조주이며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러기 위한 것입니다. 신학이 하는일은 과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삼라만상 곧 우주를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최종적인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입니다.
고유의 영역들 현대인은 마치 과학이 모든 지식과 정보를 준다고 믿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많습니다. 사실상 근원적 지식이 아니라 기능적 지식을 주기 때문입니다. 근원적 지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지 인간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선하고 아름다운가?' 이런 지식에 대하여는 시낙이 답변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는 과학의 영역 밖인 것입니다. 과학과 성경은 모순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닙니다. 대등한 차원으로 비교하고 다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의 영역에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약간의 과학과 더 많은 과학
과학에도 여러 수준이 있습니다. "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해서 유명해진 프랜시스 베이컨이 뼈 있는 말을 했습니다. "약간의 과학(a littlescience)이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그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게만든다." 어설픈 과학은 신앙을 해칩니다. 부족한 과학이 진리를 그르칩니다. 제대로 된 과학은 오히려 창조 신앙을 풍부하 게 해주고 이해의 폭을 넓게 해줍니다. 아인슈타인은 본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러저러한 과학적 현상이나 스펙트럼에는 관심이 없다. 형생 해봤으니까.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을 뿐이다. 나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알고 싶다. 나머지는 사소한 일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과학자로 평가받는 그는 과학을 통해서 창조주 하느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참 소중한 당신께
참 소중한 당신께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일이다. 독일의 어떤 학교 기숙사에 사이좋은 친구 둘이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는데, 유대인 친구를 공부를 하다말고 이상한 시 같은 것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었다. 그 시는 구약성서의 시편 23편으로 유대인 친구는 그것을 히브리어로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인 친구도 그 시편이 음률이 좋아서 빨리 익히게 되었고, 둘은 서로 틈틈이 그 시를 소리높여 외우곤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친구가 나치으 비밀경찰에 붙잡혀 가스실로 끄려가게 되었다. 유대인 친구는 끌려가면서 학교에서함꼐 외우던 것처럼 시편 23편을 웃으면서 소리 높여 외웠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전쟁은 계속 되었고, 독일인 친구도 결국 군인으로 징병당했다. 그러다가 전투 중에 저시아에서 연합군엑 포로로 잡 혀 총살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외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총알에 쓰러질 때 그 독일인을 가스실로 실려가던 유대인 친 구를 생각해냈다.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기쁘게 시편을 외우던 모습 [````]. 독일인인 자신에게 총을 겨눈 군인에게 마 지막으로 허락을 받고, 사랑하는 친구가 죽음의 길을 떠나며 외던 시편 23편을 조용히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평안이 그를 감싸면서 자신을 겨운 총구 앞에서도 자기도 모륵 목쇠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연합군의 러시아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같이 목소리를 높여 시편을 외 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연합군 장교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그 독일인을 풀어주라고 명령했고 사형 중지 서류에 사인을 해서 그를 풀어주었다.
"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공동번역)
참 소중한 당신! 시편 23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많이 외웠던 시편이었고, 지금 우리들도 많이 알고 있는 시편입니다. 이처럼 성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힘 그리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
4. 고통은 왜?
[차례] 4-1 하느님은 왜 악이 발생하도록 용인하시는가? 4-2 팔자를 고칠 수는 없는가?
4-1 하느님은 왜 악이 발생하도록 용인하시는가?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까닭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이 없는 하느님꼐 우리는 푸념하듯이 물음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또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의와 부조리가 자행되는 것을 묵과하시는 하느님의 처신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 다. 이럴 ㅤㄸㅒㅤ 우리는 묻습니다. "하느님 전능하신 분 맞아?",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저런 꿈직한 일이 일어나 도록 허락하시는가?" 실제로, 근세기 들어 수많은 전쟁과 학살을 지켜 본 현대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회의를 갖 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느님을 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명의 유다인이 학살되는 비극을 저지하지 않으셨는가? 왜 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극악한 폭력에 대하여 침묵만 하시는가?
이 물음을 가장 뼈저리게 던진 이들이 바로 유다인이었습니다. 나치 시대를 살았던 한 유다인(동시에 그리스 도인) 엘리 위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친 친위대가 유다인 두 명과 한 소년을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았다. 두 사람은 즉시 죽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은 반시간을 죽음과 싸워야 했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한 사람이 '신이 어디있어? 어디에 신이 있어?" 하고 물었다. 오랜 시간 후에도 소년이 여전히 올가미에서 괴로워하자 그 사람은 다시 '신은 지금 어디 있어?"하 고 외쳤다. 그러자 나는 내 속에서 한 목소리가 답변하는 것을 들었다. '신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은 저기 저 올가미에 달려 있다.' 유다인이 발견한 대답은 하느님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순간에 못 본 체하고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이 아리라는 것 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와 함꼐 고통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 엘리위젤의「흑야」를 읽으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절망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있었던 일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주여, 왜 나를 버리시 나이까』하며 절규했다.......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한계의 절정, 거기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절대적 인 것이 드러난다”
고통 받는 하느님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인간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가? 이런 어리석음이 어 디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이 왜견상의 무능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0 참조)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ㅤㄸㅒㅤ 이미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셨다는 점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실 ㅤㄸㅒㅤ 이미 인간의 '거절', '거부', '배반'을 각오하고 주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배반과 모반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무능하고 무력 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그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는 한 하느님은 그러실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속앓이를 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고통을 감내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상 그것을 박탈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으십니다.이것은 걸작(masterpiece)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자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하자 없이 완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보 시니 참좋다"(창세1,3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자유의지를 리콜(recall)하지 않으시는 것 입니다.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오스팅에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너의 허락 없이 너를 존재케 했지만, 너의 허락 없이는 너를 구원할 수 없단다."
둘ㅤㅉㅒㅤ, 사랑이신 하느님꼐서는 사랑의 속성상 '함꼐 아파하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연민을 표현하는 영어의 'compassion 이나 독일어의 'Mitleiden'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하느님께서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고통을 모르는 비정의 하 느님, 무감각한 하느님을 우리는 인격신으로,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나 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 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겪으셨던 고통 가운데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에 동참하 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구원 섭리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입니다.
사랑의 전능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어도, 자식 앞에 부모는 무력자입니다. 결국, 자식이 하자는 대로 자식의 말을 들어줍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그 자식을 부모는 여전히 사랑합니다. 당하고도 또 넘어갑니다. 하느님이 꼭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무능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 없이 무능하고 무력한 모 습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매달리신 십자가에서 세상을 능가하는 하느님 '사랑의 전능'이 드러난 것입니다. 즉 사랑 하시기에 인간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으신, 수모와 능욕조차도 능히 감당해 내시는하느님의 전능'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의 불행이며,인간의 울부짖는 소리는 하느님의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그러 므로 "왜나를 이렇게...."라고 울부짖을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4-2 팔자를 고칠 수 없는가?
예수를 만난 사람들
우리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팔자타령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은 팔자대로 살아간다' 는 운명론에 젖어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 도망 저 도망 다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 우리의 옛 속 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팔자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 이 가능하다"(마르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 분 안에서 꿈을 꿀 때, 그분은 그 소망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눈 먼' 이들은 보게 되었고, '억압받은 이들'은 해방 되었습니다.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멀쩡히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팔자'가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증인 미국에 가면 1,400개의 점포를 가진 도미노 피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타미라는 고아였습니다. 그는 미시간 주 잭슨에 있는 성 요셉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조금 자라 양부모밑에서 자랐습니다. 중학교에 갔으나 문제아로 찍혀 퇴 학을 맞아야 했습니다. 여러 번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쫓길 때 그를 사랑으로 돌봐주었던 수녀가 그에게 격려 의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큰 별을 따도록 하여라." 그는 평생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기로 결심하엿습니다. 그는 우선 먹고 살기 위하여 피자가게에 취직햇습니다.그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피자 한 개를 11초에 반죽하는 솜씨를 보였습니다.나중에 따로 피자 집을 낸 것이 성공하여 1,400개의 점 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한답니다. "그대의 생애를 하느님께 맡기고 한번 크게 승부를 걸라!"
우리는 믿음 안에서 반드시 변화와 위로와 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이른바 '운명론적인 굴레' 곧 팔자조 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도전해 보십시오. 꿈을 꾸고, 믿고, 기도하며, 날마다 무한한 가능성을 향하여 날개 짓을 해 봅시다.
참 소중한 당신께
참 소중한 당신. 도종환 님이 고난 중에 읊조린 노래하나가 가슴에 저며 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고난 저편에서 박송죽 님의 노래 '첫눈 뜬 새벽같이'도 함께 합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 어울려 품어 안은 그분의 사랑 안에 저마다 지복한 잔치마당 생명의 촉수 높은 초록빛 환희의 숨결
참 소중한 당신.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의 다채로운 용안입니다. |
2. 성경은 믿을만 한가?
2-1. 성경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벤허와 다빈치 코드
'벤허'는 20세기에 나온 영화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다음은 그 원작(原作)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벤허의 원작자 루이스 윌리스는 1827년 미국 인디애아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장성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남북 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이 되었다. 어느날 한 친구와 대화를 하던 루이스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임을 밝히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메시아니 초능력적인 인물이니 하는 허구를 다 벗기고 순수한 인간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 그의 집필 목적이었다. 그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구가 들려 준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이다"는 비관적인 한마디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으며 예수의 생애를 추적하고 탐구하는 동안에 성경의 진실성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도 믿게 되었다. 월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스란히 소설의 주인공에게 투영시켰다. 1880년 출판된 '벤허'가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1959년 영화화돼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루이스 월리스는 학문적인 양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본인의 애초 의도는 예수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부인하고 예수가 한낱 인간임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으나, 연구 과정에서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오자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을 그대로 수긍하는 양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40년전 조쉬 맥도웰은 그리스도교가 거짓임을 굳게 믿고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거짓됨을 폭로하고자 개인적인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시간 이어진 연구의 과정 가운데 의심은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근거에 대해 발간한 책 <기독교의 변증>은 천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이 두 사람과 대조를 보이는 사람이 <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입니다. 이 책에서 댄 브라운은 의도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비껴 다니거나 조작과 왜곡을 일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댄 브라운은 자신의 적그리스도적인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객관적 진리는 애써 피해 다니고,이미 거짓으로 입증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책을 썼던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거짓' 일색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댄 브라운 자신이었습니다. (라은성, 차동엽 공저, <다빈치 코드의 족보>참조)
-성경은 누가 언제 썼는가?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성경 안에는 천지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전쟁 이야기, 사랑 이야기, 시, 격언 등 모든 문학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진 것일까요? 성경은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성경 저자들이 쓴 원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고대의 모든 책들이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은 사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었기에 손으로 옮겨 적었는데, 이를 사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오랫동안의 구전 전승 기간은 제외하고도, 기원전 9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까지에 걸쳐서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전 목록 확정과 편집 과정까지 합하면 약 1600년이 걸려 완성된 책입니다. 이렇듯이 성경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의 책인 동시에 인간의 책이기도 합니다.
-진실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면 성경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첫째, 수많은 사본의 숫자가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오늘날, 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구약성경 사본은 11,000개, 신약 성경 사본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번역본을 합해 13,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시이저가 쓴 갈리아 전쟁기의 필사본의 수가 고작 10개,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다 모아도 겨우 20개뿐임에 비할 때, 구약과 신약 성경 필사본 수가 고대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명한 학자들 중 어느 누구오 '갈리아 전쟁기'나 '연대기'가 카이사르나 타키투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곧잘 있어 왔습니다. 사본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냉철한 판단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원본과 사본의 시간 간격이 짧다는 사실이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학자들이 원분 성경과 그 사본들의 저작 연대를 비교해 본 결과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이 훨씬 더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47년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성경학자들은 구약 성경 원본과 그 사본 사이의 간격이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복음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약 성경들은 신약 성경의 원본 기록이 완료 된 후 150년경 쓰여진 Chester Beatty Papyri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할 때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의 '박물지'(Natural History)의 경우 원본과 가장 오래된 사본간에 750년의 시간 격차가 있습니다.
역사상 사본의 권위가 가장 높은 2번째 책은 호머의 '일리아드'로 원본과 사본간에 400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고대의 다른 문학작품들과 비교해 볼때 성경은 원본이 쓰여진 시대와 가장 가까운 필사본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원본의 기록과 오늘날 우리가 읽는 사본간의 시간 간격이 짧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도 본문의 왜곡 가능성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원래 저자들이 썼던 그 성경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통일성
이미 밝혔듯이 성경은 1,600여년 전에 걸쳐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연대가 다른 다양한 저자들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죄에 빠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그것입니다. 다른 연대, 다른 지역, 다른 저자들, 그리고 한 가지 주제의 완벽한 조화! 이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매거진 프로젝트 참조.)
어떤 목수 한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7명에게 테이블 만드는 일을 시켰다. 그는 디자인 해야 할 테이블의 각 부분을 각자에게 할당했다. 한 사람은 테이블의 다리를 만들고, 또 한 사람은 서랍을 제작했다. 그리고 각 부속품들을 완성하는 데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각 각 7개의 다른 부속품들이 하나의 테이블로 정확하게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이 가는가?" 4개의 다리 길이가 서로 다르고 서랍은 맞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2티모 3,16)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통일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성경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너무나도 조화롭게 담고 있는 책입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2베드 1,21)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시키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5-16)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