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창고 /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 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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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소금창고’
내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우주라는 제자리로 돌아갈텐데…
내 몸은 이미 오래된 중금속
곰소로 내려가는 길에 눈이 내렸다.
눈이 사정을 두지 않고 차창으로 몰려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해대교 아래 휴게소에 내려 진정하기를
기다리다 다시 남쪽으로 내리뻗은 길 위에 올랐다.
눈보다 조명이 더 문제였다. 갓 오후인데도 어두웠다.
사진이 제대로 나올지 걱정스러웠다. 두텁고 넓게 펼쳐진
구름을 찢고 간혹 햇빛이 창처럼 지상에 꽂히기도 했다.
곰소에 당도하기도 전에 태양의 전지가 다 닳을까
염려되었다.
우리가 곰소 염전에 이를 무렵 해가 구름 뒤편에서
배회하다가 찢어진 틈으로 다시 소금밭에 각광을 쏘았다.
해가 다시 구름 뒤로 숨는 건 시간문제여서 우리는 서둘렀고,
눈발 날리는 곰소 염전을 배경으로 간신히 시인 이문재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의 시 ‘소금창고’를 붙들고 내려온 여정이었다.
◇곰소 염전 앞에 선 이문재 시인. 그는 “오늘 아침에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소금이 있었다//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 뜬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 빛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 언제나 소금이었다”
(‘혼자만의 아침’)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날 눈발이 앞을 가렸다.
곰소와 이문재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곰소는 그가 태어난 곳도 성장한 장소도 아니다.
염전이 남아 있어 내려간 것뿐이다.
정작 이문재의 고향은 서울에서 가까운 김포 검단이다.
그곳에 염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쓰레기 매립지로 변해 버렸다.
그는 김포 쪽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했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보면서 눈물을 떨구던, 그 옛날은
가지 않고 자꾸 다가와서 그는 김포 대신 남쪽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곰소 소금밭에 각광으로 꽂히는 햇빛은 사이키델릭
조명 같았다. 아직 환할 오후인데도 하늘이 사방에 커튼을 치고
빛의 무대를 연출했다. 단지 우리 때문이라면 저리 분주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어쨌든 조명은 완벽했다.
그의 시에는 소금이 제법 등장한다.
어떤 시에서는 “그러고 보면 소금은 찌꺼기”라며 “태양이
마지막까지 거두어 가지 않는/ 버림받음인 것, 잔류인 것”
(‘염전중학교’)이라고 썼는데, 또 다른 시에서는 “소금은
있는 힘을 다해 빛을 끌어안았다가/ 있는 힘을 다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면서 “단 하나의 마음으로 남는 것”
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더 나아가 “빛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혼자만의 아침’)고도 썼다.
그는 그 사실을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 뜬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고 부연했다.
곰소 염전의 소금창고는 빗장이 질러 있었는데 용기를 내어
주인처럼 문을 열어젖혔더니 소금이 있던 하얀 흔적만
잔설처럼 더러 남아 있을 뿐 창고 안은 검고 적막했다.
곰소에 빛이 내릴 때 서둘러 사진을 찍고 옛 포구로 갔다.
수상가옥처럼 바다 위에 비닐로 천막을 치고 나앉은 ‘쌍둥이
횟집’에서 설숭어를 썰어 소주를 마셨다.
“나는 역진화를 하고 있어. 뒤늦게, 80년대를 다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비닐막 너머 곰소항 부표들이 흔연히 흔들렸고, 우리는
따뜻한 안쪽에서 행복한 느낌이었다.
부채의식일까. 그는 2000년대도 다시 10년을 넘어서는데
1980년대의 아픈(복잡한) 감정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가 등단한 매체는 경희대 출신 문인들이 일구어낸 ‘시운동’
이라는 동인지였다.
하재봉이 주도했던 이 무크형 동인지는 엄혹한 시대분위기
와는 따로 논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가 입학하던 해 경희대 국문과 동기들은 특별했다.
소설가 김형경 이혜경, 시인 안재찬(류시화) 박덕규 박주택
같은 이들이 그 한 해에 집중적으로 입학했으니 특별할 만하다.
그가 ‘역진화’라고 말하는 건 정작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혹은 더 말해야 하는 진실에 대해 그가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적시한 것일 뿐이다.
단지 노동운동만 중요한 게 아니라, 또 단지 민주화만 문제
였던 시절에서 벗어났으니, 우리 사는 세상의 생태적인
문제의 현주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더불어 위기를 말하는
과정이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80년대는 전두환만 없으면 되는 줄 알았지?
그 사이에 자본주의는 전지구화가 됐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완벽하게 자본주의를 인정한 거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외면하거나 그랬다는데 그렇지 않아 보여.
19세기 후반 동학 이후 우리는 (생태의 평화를 시나브로
억압하고 파괴하는 시스템에 대한 견제 기회를) 놓쳤어.”
그는 말하자면 생태운동가, 환경주의자, 오래된 미래를
기다리는 시인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식물적인 생각과 지구생태계의 평화를 향한 지향은
가위 절절하다.
지난 번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에 모아 놓은 그의 시들은
이런 느낌을 명확하게 증거한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중금속입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지구의 가을, 부분)
그는 2006년부터 격월간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한때 스스로를 ‘녹색평론’ 서울 특파원
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열성적인 멤버이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덥석 할부로 산 적이 있는데
순전히 덤으로 주는 지구본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말 끝에 그는 메시아콤플렉스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맞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파인더 속에서
너무 근엄했고, 시종 엄숙했다.
나가 아닌 다른 사람, 더 넓게 나아가 타인 혹은 인류를
구원하거나 도와주고 싶은, 보기에 따라선 생래적인
‘황당함’이 바로 ‘메시아콤플렉스’인 것이다.
이렇게 이문재를 설명하다 보면 시보다는 또다시 80년대
처럼 이데올로기의 선전장이 될 것 같고(이번에는 녹색),
그건 대단히 재미없는 것인데, 시의 생명은 어떤 주장이나
외침보다 그 자체에 깃들인 대단히 사적인 울림과 결이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법인데, 사실 이문재의 시는
그 자체로 표창처럼 가슴에 꽂히는 명구들이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밑줄을 그어놓은 시들은 많다.
“따뜻하게 헤어지는 일이 큰일이다/ 그리움이 적막함으로
옮겨 간다/ 여름은 숨 가쁜데, 그래/ 그리워하지 말기로
하자, 다만 한두 번쯤/ 미워할 힘만 남겨 두기로 하자”
(-칸나, 부분)
“전광판이 휘황하다 저기에서/ 매일 매일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하다니”
(-어처구니, 부사성 1 부분)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농담, 부분)
“가지 않은 곳은 모두 미래다/ 그날 만나지 못했던 그 사람도/
읽지 않은 그 책의 몇 페이지도/ 옛날이 아니다”
(-샹그리라, 부분)
“그리움, 변산 앞 가을 뻘처럼 펼쳐져도 발 들여놓지 말아라,
뻘은 산 자의 자궁 아니니, 그리움 발 앞에 던져두고 썰물
밀물 건너다보아라, 하여 그 뻘 같은 그리움에서 나문재
한 포기라도 돋아난다면, 살 만하다고 하여라”
(-변산 숙모의 소리, 부분)
우리는 곰소에서 나와 부안에서 잠을 잔 뒤, 다음 날
새만금이 한창인 해창 포구 뒤쪽에 들어가 바지락죽으로
아침을 때우고 격포 채석강에 들렀다가 카페 ‘호랑가시나무’로
갔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윤지관씨의
누님이 운영하는 그 카페는 통유리창 너머 질마재를 풍경으로
거느리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시시한 이야기들이 오가긴 했으나, 이문재 시인의
표정은 여전히 근엄했고 엄격했다. 그는 의외로 술을 많이
못 마시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않는 ‘외로운’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외롭다고 두 번 정도 거듭 강조했는데, 그 상황이
하도 나와 비슷한 정서여서, 사람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할
뻔했거나 아니면 유일한 동족을 만난 건 아닌지 잠시 착각했다.
그 외로움이야말로 시의 발전소일 테고, 시를 못 써도 좋으니
늘 외롭지 않았으면 좋을 욕심도 없진 않을 테고, 그렇다고
시를 버릴 수도 없고, 이래저래 시인의 외로움은 깊어갈 수
밖에 없다. 그의 시처럼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노독)가 가장 크다.
그러니, 누구라도 와서 불 질러버려라.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 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 질러라, 불”
(-화전)
/ 세계일보 조용호 선임기자
[출처] 소금 창고 / 이문재|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