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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일 금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 : 묵시 7,2-4.9-14
제2독서 : 1요한 3,1-3
복 음 :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늘의 묵상>
모든 성인 대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
성인은 탁월한 성덕과 영웅적인 신앙의 삶이 인정되어,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삼고자 공적으로 선포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드러냅니다.
단순해 보이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가지 색으로 펼쳐 드러나듯이,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다양하게 드러내고
특정한 요소를 돋보이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다른 한편, 성인은 주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이를 뜻하기도 합니다.
천국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는 교회가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을 뿐,
하느님께는 당신 거룩함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 넓은 의미의 성인을 기리고,
우리도 성인이 되도록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는
우리를 모두 성인으로 이끄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은 자신의 노력으로 높은 경지에 닿겠다는 야망의 표현도 아니고,
다른 죄인과 나를 구분하며, 자신을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교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니, 그분께서 반드시 완성하시리라는 믿음이고,
그분 뜻에 순종하는 겸손이며, 그분 부르심에 대한 성실하고 자유로운 협력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50년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관찰하는 종단연구
(긴 시간 동안 특정 표본을 관찰하는 연구)가 시행되었습니다.
부모가 범죄자이거나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여서
불안전한 환경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살펴본 연구입니다.
40년에 걸쳐 시행된 이 연구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양육 환경이 불안정하고 피폐했던 200여 명의 연구 대상자 중
70여 명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부모와는 전혀 다른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유년기 양육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온전한 삶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한 사람의 존재’에 있었습니다.
아이의 인생에서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했던 어른이
적어도 단 한 명은 존재했다는 사실이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는 존재이고 때로는 너무 취약하지만,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그것은 단 한 명의 영향력으로도 충분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연구였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부모 때문에, 가족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탓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왔던 유일한 한 사람을 스스로 거부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 역시 그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왜 잊어 버릴까요?
주님께서는 그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따른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모든 성인은 세상의 행복을 좇지 않고, 주님 안에서의 행복만을 좇으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목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나만을 위한 ‘누군가의 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모습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모습대로만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위한 한 사람만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잘 익어 가는 11월의 가을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축복과 자비가 잘 익어 ‘성덕’의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정녕 가을은 ‘변화의 극점’입니다.
자신을 찬란하게 꾸며오던 일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일로 ‘건너감’입니다.
그것은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나뒹구는 낙엽처럼,
매여 있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이끄심’에 끌려다니는 일입니다.
임을 찾아 바삐 달리던 일에서, 찾아 만난 ‘임과의 속삭임’으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이제는 뒹구는 낙엽처럼,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기를,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기를,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워지고서야 타인의 존귀함이 보이고,
허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자신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 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해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 안의 자신과 홀로 고독할 줄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에 힘입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에 거름으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문헌’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에서 밝히셨습니다.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9항)
오늘 말씀 전례는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입니다.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항상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유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수도규칙 4,62)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여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 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행복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교회가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을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사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사신 분들입니다”(함께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험난한 고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근원을 미래에서 찾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차지할 기회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행복 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의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자랐습니다.
저의 작품은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문학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저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준 선배, 동료, 후배 문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저를 키워준 한국 문학과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강의 수상 소감을 보면서
그의 겸손과 인품도 노벨 문학상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와 이예원’의 번역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있습니다.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500만이 넘는 가톨릭 신자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박해의 칼 아래 쓰러진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드러나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희생 그리고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모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분들만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한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본당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신앙의 향기를 전해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본당에는 지체를 이루는 봉사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은 그런 건물과 조직, 봉사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기에,
주보를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기에,
나눔과 희생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제 기억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1970년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염이 멋있었습니다. 곰방대로 담배 피우셨습니다.
제가 어렸고, 54년이 지나서인지 그 이상 생각은 잘 나지 않습니다.
작은형은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키도 컸고, 운동을 잘했던 형입니다.
구속되기보다는 자유를 좋아했던 형은 자유롭게 먼저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는 제게 신앙을 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였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저를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어머니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기여서, 어머니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남아 있는 가족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갈 겁니다.
교회가 위령성월을 지내는 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우리의 희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쉼터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 : 산상설교
조욱현 토마 신부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며,
또한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날이다.
아무리 많은 성인을 모시고 그분들을 공경한다고 하여도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그 성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성인이 되도록 결심하는 날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1절)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고서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부유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하늘나라는 이미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다.
이렇게 복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고통이 끝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슬퍼한다.’라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복음 정신으로 젖은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온유한 이들은 모욕하기보다는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타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의 영광에서 오는 자유를 얻으면,
살아있는 온유한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는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우리가 무로 사라지는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는 종말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해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 뛰어나다.
거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거지임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당신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끊고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을 의미한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본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평화는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말씀 아래
하나 되어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이들이다.
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있으며, 다툼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견디는 이들에게는
불안에 떨지 않고 그것을 견디는 은총이 주어진다.
사도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받는 박해의 복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박해는 외국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도 의로움 때문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땅에서 걸림돌에 부딪히면
하늘의 영광을 그것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참 행복”이라는 이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인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세상은 아무도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강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하늘나라를 얻는 우리, 즉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성인(聖人) 옆에 살기 힘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처럼 살짝 수준 떨어지는 수도자들끼리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옆에 살다가 과로사한다!”
따지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백 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도 결코 바오로 사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가였습니다.
넘쳐나는 뒷골목 청소년들, 산업화의 착취물로 이용당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을 많이 잘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 돈보스코가 전혀 다른 장소인 두 곳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 돈보스코와 함께 사목했던 제자들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상상이 쉽게 갑니다.
저는 늘그막에야 철이 들어 요즘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음 할 일,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태안에 있었는데, 오후에는 서울에 찍고 저녁엔 대전 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간 게으름 피운 것을 반성하며 뛰어다니니,
다른 형제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분들도 성인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게 다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 번째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 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 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것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은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신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인들에 대한 특별한 공경은
이스라엘의 성인들에 대한 관행이고 교회로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의 키드론 골짜기에는 성인들의 무덤이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들은 예언자들의 무던을 만들고 성인들의 묘비를 꾸민다.”(23,29)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성인이라고 공경한 사람들은 먼저 순교자들이었씁니다.
신앙인들은 꽃과 향료를 들고 그들의 무덤을 찾아가,
그곳에서 꽃과 향을 드리고 준비해 온 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순교자들이 죽은 날을 탄생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으로 참다운 생명에 태어났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火葬을 하지 않고, 땅에다 묻는 土葬을 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땅에 묻히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도 땅에 묻혀서
大地에 심어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인이라면, 오늘은 諡聖의 절차를 거친 이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교회 초기부터 오랫동안 시성절차 없이
각 지역신앙인들이 성인을 정해서 공경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허락한 자들만 성인으로 공경하라는 지시는
1171년, 그러니 12세기에 처음으로 내려졌습니다.
절대군주로서 로마 교황의 입지가 교회 역사상 가장 강화되었던 時期입니다.
諡聖式이라는 儀禮가 나타난 것은 1588년의 일입니다.
루터로 말미암은 교회공동체의 분열이 발생하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트렌토공의회가 열린 후의 일입니다.
오늘의 시성식 절차는 1917년 敎會法典의 반포 후에 생겼습니다.
그러나 4세기 말 안티오키아교회의 달력에 모든 성인의 축일이 11월 1일로 기재된 것을 보면,
모든 성인의 축일은 교회가 오래전부터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이 축일이 죽은 모든 이들의 날과 분리된 것은 11세기 후의 일입니다.
연옥에 대한 믿음이 교회 안에 보편화되면서,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과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날이 분리된 것입니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마태오 복음서가 전화는 행복선언을 들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 선언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세의 십계명과 같은 수준에 놓기 위하여, 모세가 십계명을 산에서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이 부분을 예수님이 평지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모세의 십계명을 대신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원칙들, 즉 通念들이 있습니다.
재물은 정직하게만 모으면 多多益善, 곧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지위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높은 사람은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준 만큼 나도 그 사람을 위해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당연히 미워합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하고, 성공은 칭찬을 받으며, 실패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승리는 자랑스럽고 패배는 부끄럽습니다.
그런 통념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분리해 놓고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흔히 종교들도 그런 우리의 통념들을 성취시켜 주는 하느님인 양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앙 역사 안에도 그런 우리의 통념이 만든 언어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의 많은 身分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立身揚名인 양 인식되기도 하고,
하느님이 주신 재물이라고 포장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 상주고, 악한 사람 벌준다는 賞善罰惡의 교리도
그런 우리의 통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통념들을 넘어서
우리와 전혀 다른,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자는 운동입니다.
오늘 행복선언이 나열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통념에서는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린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예수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사악한 일을 당하는 사람‘,
이 모든 이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복음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우리의 통념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 선언을 하느님과 연결하지 않고, 행복의 이유를 찾으려 하면, 해석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닌 질서 안에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역사 안에 베풂과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들을 많이 발생시켰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충실하였던 성인들은 우리의 통념들을 따라 살지 않고,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하느님의 질서를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베풂, 자비, 사랑, 용서 등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면서 기리는 분들도 많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질서를 힘겹게 살고 가셨습니다.
그분들이 겪었던 아픔, 그분들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질서와 통념을 넘어선 새로운 삶의 모습이었으며,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역사 안에 실천하며 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사실을 기억하고 긍정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