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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13
모르고 하는 일도 잘하는 일이 될 때가 있고, 잘하는 줄 알고 하는 일이 그릇될 때도 있습니다. 몸에 익으면 잘잘못을 구분하지 못한 채 몸이 가는 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종교적 행위도 다르지 않아서, 문 걸어 잠그고 성전에서 치러지는 일이라고 저절로 다 거룩해지는 건 아닙니다. 공주야! 교회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받아주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 교회가 앞서서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를 낸다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집이나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Sometimes what you don't know and do is good, and sometimes what you think you're good at and what you do is wrong. When you're used to it, you can't distinguish between wrongs and follow it as you go. Religious activities are no different, so locking the door and being held in a temple do not automatically make you holy. Princess! The church is being criticized by society. The church should be a space that accepts anyone in the world and recognizes who they are. If the church takes the lead in voicing discrimination and hatred, the house where all people pray will be reduced to a house where they sell or a den of a rob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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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신다. 당시엔 합법적으로 허용된 일이었지만 예수는 그 일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잘못을 탓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욕망이 득실거리는 장소로 타락한 성전과 그 성전 체제를 통해 권력과 부만 누리려고 하는 성전 관계자들을 책망하신 상징적 행위였다. 이 성전 체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폭로하고 성전 체제의 종말을 선고하신 선지자적 행동이었다.
They drive out those who trade and those who exchange money in the temple. Although it was legally permitted at the time, Jesus did not blame him for turning his father's house into a selling house, but rather a symbolic act of reproaching the temple, which has already fallen into a place full of human desires, and those who seek to enjoy power and wealth through it. It was a visionary act that revealed that God's will could not be fulfilled under this temple system and sentenced the end of the templ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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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성전의 시효는 다 되었고,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실 것이다. 건물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라는 말씀은 예수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되실 것이라는 의미다. 이제 예수 안에서 제사 제도가 다 성취되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드러날 것이다. 성전이 했던 속죄의 역할도 예수께서 제사장과 제물이 되어 하실 것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의 화해와 교제가 이루어질 것이다.
The statute of limitations of the visible temple has expired, and Jesus himself will become a temple. The word to rise again in three days means that Jesus himself will die and be resurrected in three days to become a temple of God. Now all the sacrificial systems will be fulfilled in Jesus, and all the revelations of God will be revealed in him. The role of the temple's atonement will also be made by Jesus as a priest and an offering, and reconciliation and companionship between God and his own people will take place in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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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을 보고 믿는 유대인들이 생겼다. 하지만 예수는 그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그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려 하지 않으셨다. 이는 그 믿음이 예수께서 기대하신 믿음이 아니요, 예수는 누구를 의존하여하나님 나라를 증언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이 복음이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 땅에 증거 될 때는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In Jerusalem, there were many Jews who saw and believed in Jesus' many targets. But Jesus did not entrust himself to those Jews. He did not try to achieve your will through them. Because that belief is not the faith Jesus expected, Jesus does not have to rely on anyone to testify to God's country. In the future, when Jesus ascends to heaven and this gospel is evidence in the land of the Gentile beyond the borders of Palestine, he will seek those who truly believe in the Lord, not see and believe in the tar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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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인도하셨던 성전 만들긴 어디서(공동체)실행해야 합니까?
우리 교회는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한 성전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성전으로서의 교회, 성전으로서의 삶, 우리는 무엇을 하는 성전인가?
Where (community) should I go about making the temple you led me to?
Isn't our church on the path of a temple that has been reduced to a house of business?
Church as a temple, life as a temple, what do we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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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배경(13)
상인을 내좇음(14-17)
a.예수가 상인을 내쫓음:14-16
b.제자들의 반응:17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의 응답(18-25)
a.부정적 반응:18-21
b.제자들의 반응:22
c.긍정적 반응:23
d.예수의 응답: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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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유월절이(13a)
가까운지라(13b)
예수께서(13c)
예루살렘으로(13d)
올라가셨더니(1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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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안에서(14a)
소와 양과(14d)
비둘기파는 사람들과(14c)
돈 바꾸는 사람들의(14d)
앉은 것을 보시고(1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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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15a)
양이나 소를(15b)
다 성전에서(15c)
내어 쫓으시고(15d)
돈 바꾸는 사람들의(15e)
돈을 쏟으시며(15f)
상을 엎으시고(1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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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16a)
이르시되 이것을(16b)
여기서 가져가라(16c)
내 아버지의 집으로(16d)
장사하는 집을(16e)
만들지 말라 하시니(1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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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17a)
성경 말씀에(17b)
주의 전을(17c)
사모하는 열심이(17d)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17e)
기억하더라(1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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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18a)
유대인들이 대답하여(18b)
예수께 말하기를(18c)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18d)
무슨 표적을(18e)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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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대답하여(19a)
가라사대 너희가(19b)
이 성전을 헐라(19c)
내가 사흘 동안에(19d)
일으키리라(1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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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가로되(20a)
이 성전은(20b)
사십 육년 동안에(20c)
지었거늘(20d)
네가 삼 일 동안에(20e)
일으키겠느뇨? 하더라(2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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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는(21a)
성전 된(21b)
자기 육체를 가리켜(21c)
말씀하신 것이라(2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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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가운데서(22a)
살아나신 후에야(22b)
제자들이(22c)
이 말씀하신 것을(22d)
기억하고(22e)
성경과(22f)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22g)
믿었더라(2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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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에(23a)
예수께서(23b)
예루살렘에 계시니(23c)
많은 사람이(23d)
그 행하시는(23e)
표적을 보고(23f)
그 이름을 믿었으나(2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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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 몸을(24a)
저희에게(24b)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24c)
이는(24d)
친히 모든 사람을(24e)
아심이요(2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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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친히 사람의(25a)
속에 있는 것을(25b)
아시므로(25c)
사람에 대하여(25d)
아무의 증거도(25e)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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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바꾸는 성전_a money-changing temple_
헐어 버린 성전_a demolished temple_
다시 짓는 성전_a re-built templ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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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해방과 기쁨이 사라진 성전에 대해 파국을 선언하신 것을 목도하고 있나이다. 동시에 사흘 동안에 일으키시는 사건을 통해서 내 부끄러운 모습을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주의 열심을 믿습니다. 오늘 다시 주님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점검하고 주의 임재를 누리며 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Is he witnessing the declaration of catastrophe for the temple where the liberation of salvation and joy have disappeared? At the same time, I believe in the hard work of the Lord who said he would correct my shameful appearance through events that took place for three days. Today, I will check the new relationship again in the Lord and enjoy the presence of the Lord. Help me.
2026.2.5.thu.Clay
신학 비평//
요 2:13–25에 대한 큰 흐름 파악은 매우 정확합니다. 성전 정화 사건을 단순한 “상업 행위 금지”가 아니라 성전 체제 자체에 대한 선지자적 심판 선언으로 읽은 점,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를 부활-예수 자신이 성전이 됨-제사·속죄·계시의 완성으로 연결한 점은 요한복음 신학의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습니다. 특히 상징 행위’로서의 성전 정화 해석은 공관복음보다 요한복음에 훨씬 잘 맞아요.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율법 위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왜곡한 구조’에 있기 때문이죠. (합법 ≠ 거룩 제도 ≠ 하나님의 뜻)
1. 성전 신학 = 나 – 성령 – 통치
성경적 성전은 단순히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며, 그 임재가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가 삶을 통치하는 구조입니다. (성전 =임재 → 질서 → 통치" 구조)가 이렇게 재배치됩니다. 예수가 내 안에 통치 하는 구조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
2. ‘나’(주체)와 성전
플라톤: 영혼이 육체를 통제
데카르트: 생각하는 주체(cogito)
칸트: 도덕법칙을 내면에 둔 자율적 주체
공통점: 나’는 자기 안에 기준을 둔 자
3. 성전 신학의 ‘나’
성전 신학에서의 ‘나’는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기준이 아니라 <거처>입니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머무름>의 자리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주체(subject)가 아니라 장소(topos) 혹은 사건(event)에 가깝습니다 ‘나’는 통치의 원천이 아니라 통치가 발생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적 ‘나’는 성령의 임재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입니다.
하이데거...인간은 “존재가 거하는 자리(Dasein)”
레비나스...타자의 임재 앞에서 주체는 무너짐
미셸 푸코...주체는 권력의 장 안에서 형성됨
4. 성령-내재성 철학과 사건
스피노자: 신은 세계 안에 내재
들뢰즈: 초월 없는 생성의 흐름
화이트헤드: 세계는 사건들의 과정
성령은 외부에서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움직이게 하는 힘이며 규칙보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분으로 성령은 법(law)이 아니라 생명(breath)이고, 성령은 칸트적 의무가 아니라 니체적 충동도 아니며 존재론적 방향성(teleology)입니다. 즉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살아가게 되는가?입니다. 성전 신학은 자율적 주체 대신 ‘임재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를, ‘강제적 통치’ 대신 ‘내면화된 생명의 질서’를 제시합니다.
5. 성령 = 통치의 방식
폭력-강제가 아닌 내면화된 질서로 푸코가 말한 통치성(governmentality)과 연결됩니다. 성령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리게 만듭니다. 세상의 통치는 주권이 밖에서 강제-법: 처벌로 유지-권력: 위계로 작동하지만, 성전 신학의 통치는 바깥에서 오지 않고 임재에서 흘러나옵니다. 만약 성전이 무너지면 폭력적 통치가 등장해 우상과 공포가 질서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a. 아감벤: 법 없는 통치, 예외 상태 b. 한나 아렌트: 권력은 함께 있음에서 발생 c. 폴 리쾨르: 상징이 인간 행동을 형성) 성전은 권력이 아니라 의미가 통치하는 공간입니다.
6. 성전 신학의 존재 구조
나 = 거처 (존재론)...나는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자리)이고
성령 = 임재의 사건 (내재성)...성령은 나를 통해 질서를 만들며
통치 = 의미에 의한 질서 (정치철학)...그 질서는 강제가 아닌 자유로 통치합니다.
7. 요한복음 2장과의 연결: 통치의 중심이 건물 → 몸 → 관계로 이동
성전 정화 = 잘못된 통치 방식의 폭로
성전 파괴 = 제도 통치의 종말
사흘 만에 일으킴 = 새로운 존재 질서의 탄생
몸이 성전 = 통치의 장소가 개인으로 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