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의 궤적 낙화烙畵 / 변종호 (충북지부)

인두의 궤적 낙화烙畵 / 변종호  인두와 고리, 무쇠화로에 한지뿐이다. 전통을 이어가는 낙화 도구가 소박하고 단순하다. 가는 선과 점을 새기는 앵무부리 인두와 굵은 선과 넓은 채색이 편리한 크기가 다른 평인두가 전부다. 고리의 도움으로 달궈진 인두가 한지 위를 현란하게 누빈다. 종이 타는 냄새로 그림이 생성된다. 인두의 생김새와 닿는 면적, 속도와 힘의 조절로 농담濃淡이 형성되는 낙화는 400여 년 역사의 전통 회화이다. 조선시대, 비싼 지필묵을 구할 수 없는 민초들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나무토막이나 종이에 그린 것이 발전했다는 게 정설이다. 양손을 이용하여 그리며 단색으로 나타난다. 한지에 그릴 때는 인두가 오래 머물면 구멍이 나고 빨리 지나치면 색이 흐려지기에 낙화를 “태움의 미학”, “불로 새기는 예술”이라 한다. 낙화장을 찾아 충북 보은을 향했다. 절친 문인화가 청곡이 동행했다. 고희를 넘긴 장인이 반갑게 맞으며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이 고단한 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반세기를 달려온 장인이 쏟아내는 낙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 우직한 외길 인생을 가슴에 쟁여가며 마시는 커피가 달곰하다. 몰입했기에 인정받았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배고픔과 고단함이 따랐기에 지키겠다는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했다. 재주는 출중했으나 형편상 그림을 전공할 수 없었고 우연히 학원생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본 것이 입문의 계기가 된 셈이다. 낙화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을까, 회의와 고민도 많았을 테고 몇 번의 고비도 있었지 않았겠나.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라 멸시도 견뎌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족의 밥과 자식 양육이 옥죄어 관광객에게 낙화를 그려주며 30여 년 생계를 이었으리라. 전시장을 들어서다 장인의 혼이 가득 담긴 작품에 압도되었다. 이게 인두의 궤적이 맞는가, 믿기지 않는다. 보물 제199호 경주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 앞에서는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마치 잘 찍은 사진작가의 작품 같았다. 6개월간 무한 반복해 태우고 지져 화강암의 질감을 얻느라 겪었던 시행착오가 얼마였을까, 낙화임에도 자연에 풍화된 화강암의 석불처럼 입체적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것은 정점의 예술작품이었다. 무수한 선과 점, 면이 겹치며 절묘한 작품의 병풍 앞에서는 몸이 얼어붙었다. 보물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단원 김홍도와 동갑이자 조선 후기 정조, 순조 시대를 대표하던 화원 이인문의 대작이다. 폭44.1cm, 길이가 856cm이며 이것을 장인이 재해석해 일 년여 산고의 인두질로 완성시켰다. 나뭇가지며 이파리 하나하나를 원작과 똑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세필로 그려도 어려운 것을 어쩌면 무딘 인두로 저리도 섬세한 터치가 가능할까. 문외한이 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경이롭다는 찬사가 나왔다. 한지에 저렇듯 낙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신의 경지에 오른 달관한 손놀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한동안 “강산무진도”를 바라보자니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흔들리는 나뭇잎도 보였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암만 봐도 이 대작을 수많은 인두질로 탄생시켰다니 감동이다. 회화이자 공예인 낙화는 물감처럼 잘못된 부분을 덧칠하여 수정할 수가 없다. 창작보다 모작 재현이 더 어렵다는데 미친 듯 매달렸을 것이다. 벌겋게 피어오른 숯 화로 옆에서 염천에 쏟은 땀은 얼마이며, 달궈진 인두질에 굳은살이 박이고 빗나간 인두로 데인 상처도 무수했으리라. 자료에 의하면 낙화는 중국과 한국에 존재했으며 생계 수단으로 이어오다 수요가 없자 대부분 사라졌으나 장인은 인두를 놓지 않았다. 전통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낙화에 매달려 20여 년간 참고 문헌과 자료를 찾아다녔고 이를 근거로 연구한 이론으로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낙화장으로 지정되었다. 개인의 힘으로 제도권에 진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강한 신념이 일궈낸 인간승리다. 낙화장은 국내최초이자 세계유일하다. 귀중한 보석의 가치도 희소성이 아니던가. 그동안 전승자가 없어 걱정했는데 둘째 따님이 자청했다니 다행스럽고 고맙다. 젊은이 눈에도 지킬만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다만 낙화를 새롭게 재조명하고 저변의 확대와 후학양성은 필수라는 생각이다. 50여년이 넘는 인두질의 장인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이다, 일 년여 밤낮으로 몰입해 한 작품을 완성시켜 감동을 안긴 작품이 있을 리 없다. 원고청탁을 받으면 바닥난 사유의 샘을 길어 올리고 독자의 입맛에 맞추려 한 달간 전전긍긍한다. 나름 통찰의 사유를 넣고 비유로 버무려 간결하나 진솔한 문장으로 세상에 내놓고 나면 아쉬움만 남는다. 예술은 대중에게 과연 어떤 의미와 영향을 미칠까, 보고 느낀 것을 면밀히 관찰해 여러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라면 문학이나 그림도 보는 이의 해석으로 결정돼 작가로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다양성은 존재한다. 삶의 무늬를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이 그러하듯 미술 또한 고정돼 있으나 보는 사람의 앎이나 위치 각도에 따라 달리 해석되나 분명한 것은 행복과 감동에 위로와 치유를 안겨주기에 존재한다. 끊기면 다시 잇기 어려운 것이 전통이다. 경이로운 인두의 궤적인 낙화烙畵, 그 맥을 이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