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 가이치 (曾田嘉伊智) 씨 같은 일본 사람도 있습니다.
그 분은 1867에 태어나 방탕한 생활로 소일타가 자유중국 거리에서 술에 취해 쓸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한국국적의 의인을 만나 길거리에서 구조된 후, 자신이 여관방에 드러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추후 여관방 주인의 말을 인용해 언급하였다.
이래서 동인에게는 의인의 나라인 한국에서 1921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숫자인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시다가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었다. 일본에 가서는 일본이 불법적인 야만행위를 그만두라고 시위를 벌리면서 오매불망 한국을 못 잊고 있었다.
한경직 목사에게 초대되어 한국으로 와, 자신이 키웠던 한국의 고아들과 함께 1년여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1962년 94를 일기로 순종하신 일본인이었다. 동인이 무덤은 사회사업을 하셨으나 먼저 순종하신 일본인 부인과 함께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고이 묻혀있는 유일한 일본인 부부 이셨다. 이때는 6.3데모다 뭐다 하여 반일데모가 그칠 날이 없었다.
오늘, 경건한 마음으로 양화진에 들어섰다. 문병록 대사님의 초청으로 갔다. 가보니 대사출신으로서 착하디 착하다는 임대택 목사 등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모였었다. 그리고 11.15. 에 있을 임 목사님의 외교관 출신들로부터 거둘 헌 옷, 헌 가방, 헌 구두 모으기는 집 없는 천사들에 크나큰 자선행위라고 입을 모았다.
양화진이라고 하면 모르는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양화진이란 절두산과 붙어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역이었다. 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서울의 합정역 근처이다. 그래서 가 봤더니 모인 분들 대부분이 기독교 교인이었고 그곳에 누워계신 대부분의 분들도 우리나라 역사 책에서나 봄직한 대한매일신보의 베델 씨, 성경번역에 공이 크신 레이놀즈 선교사, 한국의 독립을 위해 진력하신 헐버트 선교사, 배재 학당을 세우신 아펜젤러 선교사, 연세대를 세우신 언더우드 일가,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을 일으킨 에비슨 일가 등 대단한 분들의 묘소가 있었다.
모든 분들 앞에 모자를 벋었다. 당시로서는 허허 벌판이고 야만인이나 살던 한국 땅을 이렇게 만들어주어 고맙다고!
특히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다가 한국인끼리인 혈육항쟁인 6.25를 보고 어땠을까 하는 심정으로 가이츠 씨 앞에 나는 모자를 들고 섰다. 왠지 마음이 푸근하였다. 동인 내외분이 돌아가셨음에도 풍기는 인상은 나에겐 한국인 같았다. 아니 그렇게 내 자신이 느껴졌는지 모른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유럽에서도 국경이란 개념이 옛날과 같이 엄연히 존재하는 장벽이 아니고, 독. 불과 같이 한 집안 같기 때문에 우리도 이 소다 가이치 씨처럼 생각하여야 한다. 일본인이면 어떻고 중국인이면 어떠한가? 우리도 빨리 유럽이나, 북미처럼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의 꼼수를 과감히 버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인류공동체를 위해 우리도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
어느 사회나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은 소다 가이치 씨 같은 넓은 마음의 좋은 사람들만 쫓아가도 지금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는 백인사회를 따라 가야 한다. 한- 중 - 일은 문화가 같고 피부색이 같지 않은가? 이것이 국제화 시대에 대한민국이 갈 길이다. 저 NIC 4개국 중에서도 한국이 가장 개인소득이 낮은 이유는 국수주의 때문이다’
이렇게 되 뇌이면서 나는 소다 가이찌 씨의 묘역을 떠나 에비슨 씨 묘역으로 돌아갔다. Atlanta 총영사 당시 이들 3세들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였다. 에비슨 씨 부인 계의 손자뻘 되던 당시의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였던 P씨의 이야기였다.
‘한국이 갚겠다고 한 후진국에 대한 지원으로 일부 선진국의 정책이 전환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한국 같은 나라가 바람직스럽게도 저렇게 앞에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