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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香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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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歌手 | |
本名 |
大鷹淑子(舊姓:山口)오오타카 요시코( 처녀 성; 야마구치) |
原文名 | |
英文名 | Shirley Yamaguchi |
别名 | 金魚美人、双面伊人 금붕어 미인, 두 얼굴의 여인 |
国籍 | ![]() |
籍贯 | ![]() |
出生 | (1920-02-12)1920年2月12日![]() ![]() |
逝世 | 2014年9月7日(2014-09-07)(94歲)![]() |
职业 | 歌手、演员、政治家 |
语言 | 汉语、日语、英语 |
宗教信仰 | 天理教 |
配偶 | 野口勇(1951-1956) 大鹰弘(1958-2001) |
音乐类型 | 華語流行 |
互联网电影数据库(IMDb)信息 |
山口 淑子 大鷹 淑子 | |
任期 1974年7月8日-1992年7月7日 | |
選區 | (全國區→) 比例代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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个人资料 | |
政黨 | 自由民主黨 |
李香蘭(1920年2月12日-2014年9月7日),出生名山口淑子(日语:山口 淑子/やまぐち よしこ Yamaguchi Yoshiko),第二次結婚後戶籍名大鷹淑子(日语:大鷹 淑子/おおたか よしこ Ōtaka Yoshiko),日本人,祖籍日本佐贺县杵岛郡北方村(現為佐贺县武雄市北方町),生于中華民國奉天省奉天市北煙台(今遼寧省燈塔市),受過正式西洋聲樂教育,是抒情女高音,擅長美聲唱法,是当时極為知名的歌手、電影演員,后擔任日本參議院參議員。2014年9月7日,因心臟衰竭在家中去世,享年94歲[1][2]。
이향란(1920年2月12日-2014年9月7日),태어날때는 山口淑子(日语:山口 淑子/やまぐち よしこ Yamaguchi Yoshiko)로 불리웠고,두번째 결혼후 호적상 이름은 오오타카 요시코이다. 일본인으로 할아버지 호적은 일본 시가현 杵岛郡 北方村(지금은 佐贺县武雄市北方町이다),中華民國奉天省奉天市北煙台(현재의遼寧省燈塔市)에서 태어나,정식으로西洋聲樂 교육을 받았는데,이는抒情女高音으로,美聲唱法이 뛰어 났었다,그는 당시에 매우 유명한歌手、영화배우로,나중에 日本參議院參議員을 지냈다。2014年9月7日,心臟衰竭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향년 94歲[1][2]이었다。
일생
淑子的祖父山口博酷爱汉学,仰慕中国文化,淑子的父亲山口文雄在满鐵會社所属的抚顺煤矿任职,举家迁往抚顺。
1920年2月12日,山口淑子出生于奉天省奉天市一個叫北煙台的村落。
요시코의 할아버지 야마구치 히로시는 매우 한학을 좋아하고 중국문화를 숭상하였고, 요시코의 아버지 야마구치 후미오는
만주철도회사 소속의 무순탄광에서 근무하여 일가족을 이끌고 무순으로 갔다.
1933年被父亲的義兄弟瀋陽銀行经理李際春将军收為義女,起中文名为李香蘭。亦為天津市長潘毓桂義女。曾以潘淑華之名義在北平翊教女子中学就學,1937年毕业。然而她從不公開自己的身世,中國人都不知她的日本血統,說得一口非常標準京片子官話的她,中國人都認為她是地道的北京人,曾患肺病,后受白俄好友柳芭·莫洛佐娃-格里涅茨(俄语:Люба Морозова-Гринец)建议,开始跟流亡奉天市(今瀋陽)的義大利女士波德列索夫(俄语:Подресов)夫人学习声乐[3]。她曾在满洲国的流行歌曲大赏赛中获得头奖。
1933년 아버지의 의형제 심양 은행장인 李際春 장군이 그녀를 수양딸로 받아들이고 중국식 이름으로 李香蘭 이라고 하였다.
또한 천진시장인 潘毓桂의 수양딸도 되었다. 일찍이 潘淑華의 이름으로 北平翊教女子中学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1937년
졸업하였다. 이후에 그녀는 자기의 신분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어서, 중국인은 모두가 그녀가 일본 핏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일단 말을 하면 매우 표준적인 북경어 관화를 하였기에 중국인은 모두가 그녀가 토박이 북경인이라고 인식하고 있
었다.일찍이 폐병에 걸렸었고, 나중에 백러시아 친구인 柳芭·莫洛佐娃-格里涅茨(俄语:Люба Морозова-Гринец)의 건의
를 받아들여서, 봉천(현재의 瀋陽)으로 도망간 이탈리아 波德列索夫(俄语:Подресов)부인에게 성악을 배웠다.
그녀는 일찍이 만주국의 유행가곡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차지하였다.
1937年,满洲映画协会(简称“满映”)成立。李香蘭进入滿洲國電影界,并成为滿洲头号女星。拍攝了多部電影,其中多以中国女子身份扮演崇尚日本皇軍的角色。[4]
1937년 만주영화협회(간칭':만영)을 설립함. 이향란은 만주국 영화계로 진출하여 아울러 만주 최고의 여자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영화를 촬영하였고 그중에 대부분이 중국여자로서 일본황군을 흠모하는 배역으로 활동하였다.
1941年1月,李香蘭至臺灣巡迴公演,當時臺北街頭處處掛起「世紀之寵兒李香蘭來臺」的廣告標語,掀起臺灣史上史無前例的追星浪潮。在臺北市西門町「大世界館」公演5天,場場客滿。觀眾見戲館人員拉起鐵門,一擁而上發生推擠,一切的騷動,都是為了看李香蘭在電影中場的30分鐘演出。[5]
1941年2月,李香蘭擔任「日滿親善歌唱大使」,前往日本東京參加2月11日紀元節的慶典大會,連續一周在東京有樂町「日本劇場」表演,節目名稱為「歌ふ李香蘭(歡唱的李香蘭)」,在日本造成大轟動。表演首日,大批歌迷湧向日本劇場,排隊購票的隊伍將日本劇場圍了整整七圈半,即所謂「日劇7圈半事件」(日劇7まわり半事件)。門票銷售一空但無法進場的大批歌迷仍包圍劇場不願離去,甚至需出動警察、消防車灑水來驅離群眾。
1941년 이향란은 대만에 순화공연을 하였는데 당시에 타이뻬이 거리 곳곳에는 [세기의 총아 이향란 대만에 오다] 라는 광고 포스터가 붙기시작하였다.
대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스타를 추종하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대북시 서문정의 「大世界館」에서 5일 공연이 있었으며 매회 만석이었다. 관중들은 공연장 직원들이 철문을 닫으려는 것을 보고는 일제히 몰려들어 서로 밀쳤는데 이 모든 소동은
모두 다 이향란이 영화 속에서 30분 간 연기하는 것을 보기위해서 이었다.
1941년 2월 이향란은 「日滿親善歌唱大使」에 임명되었고, 일본 동경으로 가 2월11일 이른바 기원절의 경축대회에서
연속 1주간 동경 유라쿠쵸의 「日本劇場」에서 공연을 하였고, 프로그램의 이름은 「歌ふ李香蘭(노래하는 李香蘭)」이었으며
일본에서 대 히트을 거두었다. 공연 첫날 많은 팬들이 일본극장을 향하여 몰려들어서, 표를 사기위하여 늘어선 줄이 일본극장을
거의 7 바퀴 반을 돌았는데 즉 이른바「日劇7圈半事件」(일본극장 7바퀴 반을 돈 사건)이다。
표가 다 팔려서 극장에 들어 갈 수 없게 된 대부분의 팬들은 여전히 극장을 둘러싸고 돌아가려하지 않았기에 심지어 경찰이
출동하기에 이르렀고 소방차가 물을 뿌려서 관중을 흩어지게 하였다.
1942年,到上海發展,以李香蘭的名字登上舞臺,為中華電影公司、中華聯合製片公司、滿映拍了經典電影《萬世流芳》並主唱電影主題曲《賣糖歌》及插曲《戒煙歌》使之紅遍全中國,跟著《夜來香》、《恨不相逢未嫁時》、《海燕》使之更上一層樓,成為與龔秋霞、周璇、姚莉、白光、白虹、吳鶯音齊名的上海灘“七大歌后”之一。
1942년 상해에 진출하여 성공하여 이향란의 이름이 유명해지자《賣糖歌》及插曲《戒煙歌》 中華電影公司、中華聯合製片公司을 위하여 만주영화공사는 전설적 영화 《萬世流芳》를 촬영하였는데 또한 영화주제곡인 《賣糖歌》과 삽입곡《戒煙歌》를 온 중국에 유행시키게 하였고,《夜來香》、《恨不相逢未嫁時》、《海燕》과 같이 더욱더 유명해지어, 龔秋霞、周璇、姚莉、白光、白虹、吳鶯音등의 같이 유명한 上海灘“ 7대 가수의 하나가 되었다.。
1943年,李香蘭再度抵臺灣演出電影《沙韻之鐘》再度掀起熱潮。《沙韻之鐘》於當年在台、滿、日、滬、華北等地上映。李香蘭回歸日本後,凡是掛上其本名山口淑子的電影,仍屢屢在臺造成轟動。[5]
1944年,李香兰在北京记者俱乐部的记者会上为演出多部媚日影片引發國人憤慨而道歉[6],并辞职离开满映。
1943년 이향란은 다시 대만에 가서 영화 《沙韻之鐘》로 다시 뜨거운 인기를 불러모았다. 《沙韻之鐘》은 그해 대만 만주 일본 상하이 화북 지역에서 상영이 되었다. 이향란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 대체로 그녀의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라고 쓰여진 영화가
빈번히 여러번 대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이향란이 북경 기자 클럽의 기자회견에서 여러 편의 일본에 아첨하는 영화에 출연하여 국민의 분개를 유발한 것에 대하여
사죄를 하고 아울러 만주영화사를 사직하고 떠났다.
1945年,李香兰在上海大光明大戲院举行个人演唱会“夜来香幻想曲”。同年第二次世界大戰結束,日本投降,满洲国解散,李香蘭被控以汉奸罪罪名被中華民國政府逮捕。但之後,經由好友格里涅茨的幫助,其戶籍謄本由北平其父母住處送到了上海[3],證明了其為日本人而非漢人的身份,而得以被無罪釋放,遣返回日。1946年2月回日本。
1947年改回原名山口淑子,於日本繼續其演藝事業,為東寶、松竹拍了一系列電影並於20世纪50年代尾到香港為邵氏兄弟有限公司拍攝電影。
1945년 이향란이 상하이 大光明大戲院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고 “夜来香幻想曲”을 불렀다. 같은 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본
이 항복하고 만주국이 해산되자, 이향란은 汉奸罪로 고발되어서 中華民國政府에 체포가 되었다. 이후에 친구인 格里涅茨의
도움으로 그 호적 등본이 北平의 자신의 부모의 거주지에서 상하이로 보내져서 그가 일본인이고 중국인이 아니라는 신분이
증명되어서 무죄로 석방될 수 있었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46년 2월에 일본으로 돌아감.
1947년 본래 이름인 야마구치 요시코로 개명하고, 일본에서 계속해서 연예 분야에서 일을 하였고,東寶、松竹를 위하여 여러 편의 영화와 아울러 20 세기 50년대 말까지 홍콩의 邵氏 형제 영화공사를 위하여 영화를 찍었다.
1951年,山口淑子嫁給了美國的雕刻藝術家野口勇,1956年离婚。1958年,山口淑子嫁給外交官大鷹弘後,冠夫姓成為大鷹淑子,並告別舞臺轉而從政。大鷹弘當時為日本駐聯合國大使加瀨俊一的秘書官、三等書記官。
1974年,山口淑子獲時任首相田中角榮的邀請,接受自由民主黨提名,參加第10屆參議院議員通常選舉,成功當選日本參議院議員;並在1980年參議院選舉及1986年參議院選舉成功連任。歷任環保政務次官、參議院沖繩及北方問題事務特別委員會委員長、參議院外務委員會委員長、自民黨婦人(女)局長。1993年11月3日,獲頒授勳二等寶冠章。政界引退后,亚洲妇女基金会的号召为人,担任该基金会的副董事长。[7]
2005年李香蘭发表长文,劝诫首相小泉純一郎不要参拜靖国神社,原因是“那会深深伤害中国人的心。”[8]
1951년 야마구치는 미국의 조각 예술가인 野口勇에게 시집을 갔으나 1956년에 이혼함.
1958년 야마구치 요시코는 외교관 大鷹弘에게 시집을 간 뒤에, 남편 성을 따라서 오오타카 요시코로 하였으며,
아울러 무대와 고별하고 정치에 종사하였다.
大鷹弘은 당시에 주 유엔 일본대사 加瀨俊一의 비서관으로 3등 서기관이었다.
1974년 야마구치 요시코는 당시의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의 요청을 받아 들여서 자유민주당의 지명을 받아서, 제10회 참의원 통상 선거에 참여, 일본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아울러 1980년 참의원 선거와 1986년 참의원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하였다. 환경보건 정무차관, 참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문제사무특별위원회 위원장 ,
참의원 외무위원회 위원장,자민당 부인(여) 국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 11월3일 훈2등 보관장을 받았다. 정계 은퇴후 아시아 부녀기금회에서 남을 위하여 호소하여 기금회의
부이사장을 담임하였다.
2005년 이향란은 긴 글을 발표하여서,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기를 권면하였는데 이유는
이것이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歌曲代表作[编辑]
李香蘭的歌曲代表作計有《夜來香》、《賣糖歌》、《戒煙歌》、《防空歌》、《恨不相逢未嫁時》、《花香為情郎》、《第二夢》、《海燕》、《不要告訴我》、《進酒杯莫停》、《三年》、《蘭閨寂寂》、《梅花》、《小時候》、《十里洋場》、《分離》、《歌舞今宵》、《只有你》、《心曲》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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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會席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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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任: 岡野裕 |
![]() 1991年—1992年 |
繼任: 野澤太三 |
前任: 上田稔 |
![]() 1981年—1982年 |
繼任: 佐佐木滿 |
첫댓글 이향란에 대한 중국의 시각
[김강현] [오전 8:43] “리샹란, 노래·연기로 관동군 사기 진작 총살 감”소문 무성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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