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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활동지원사 권리를 찾아서(전국활동지원사노동조합)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연재> 11. 국립재활원에서 자립생활 교육을 받다.
코난 추천 0 조회 123 14.11.05 12:4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장애인의상패션쇼...

 

2001년 6월 초에 재활병동에서 퇴원을 하고, 일주일쯤 집에서 있다가 6월 중순에 다시 국립재활원 기숙사에 들어가 3개월 동안 자립생활 프로그램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서 했는데 나는 교육을 받기 전에 미리 선생님께 서울에 올라온 취지를 말씀드렸다. 그래서 초등학교 일일교사나 장애인의상패션쇼 같은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 사유서를 써서 선생님께 드리면 자립생활 교육을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볼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자립생활 교육을 받다가 6월 말쯤 장애인의상패션쇼에 참가할 장애인들이 연락을 받고, 서울시청 별관 강당에 모였다. 대략 20명 정도였는데 주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많았다. 모두 모이자 간단히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각자의 컨셉을 정해 컨셉에 맞는 옷의 치수를 쟀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모여 입장순서를 정하고, 2~3일 동안 동선을 돌며 워킹(?) 연습을 했다.

 

그리고 2001년 7월 4일,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분수대 공원에서 오후 7시에 장애인의상패션쇼 행사가 시작 되었다. 행사 시작 전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조금은 썰렁할 줄 알았는데 행사가 시작되자 고건 서울시장도 참석하고, 무대 주변에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그리고 취재를 하기 위해 공중파 방송과 기자들도 많이 와 있었다.

 

7시에 1부 행사로 풍물수화공연과 장애여성극단의 퍼포먼스공연이 열렸고, 8시에 본 행사인 장애인의상패션쇼가 열렸다. 패션쇼 전 무대 뒤 대기실에는 분장과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여기저기 취재기자들과 인터뷰도 하느라 분주 했다.

 

2001년 7월4일, 세종문화회관 뒤 분수대공원에서 열린 장애인의상패션쇼

 

그리고 드디어 무대에 오를 순간이 왔다. 나는 우연찮게도 참가자 중에 대표 모델이 되어 모델 오미란씨가 내 휠체어를 밀며 무대에 올랐고,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의 박수 소리와 수많은 카메라의 플래시를 받았다. 오미란씨는 내 휠체어를 천천히 밀며 무대를 돌았고, 뒤이어 다른 모델들도 하나둘씩 무대를 돌았다. 관중들은 장애인 모델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박수를 쳤다. 그리고 마지막 장애인 모델의 워킹(?)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를 했고, 그렇게 장애인의상패션쇼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참여한 행사였지만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행사였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께서 “TV를 보다가 장애인의상패션쇼를 보게 되었고, 감동을 받았다.”며 "패션쇼에 참가한 사람 모두를 청와대로 초청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그래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청와대에 가서 이희호 여사님과 오찬도 하고, 함께 대화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찍게 되었다.

 

청와대에서 이희호 여사님과 장애인의상패션쇼 참가자들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

 

무더운 8월, 자립생활 교육 일과를 마치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장애인이동권연대라는 장애인운동단체를 알게 되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는 2001년 1월 22일, 시흥시에 있는 오이도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장애인 노부부가 만든 지 6개월도 안된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갑자기 추락하여 한명은 사망하고, 한명은 중상을 입는 사고가 나면서 중증장애인들의 이동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교통수단이나 편의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지하철을 타기위해 설치된 리프트도 안전규정에 맞지 않아 고장이 빈번했고, 그로인해 사고도 수시로 일어나 어쩔 수 없이 이용한다면 목숨을 걸고 타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중증장애인들이 방 안이나 시설에서 밖을 나서지도 못한 채 살다보니 이 문제가 부각되지 않다가 오이도역에서 노부부 장애인의 리프트 추락사고로 인해 크게 부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장애인이동권연대가 결성 되었고, 2월부터 중증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1인시위를 시작으로 “장애인과 함께 버스타기”와 “장애인과 함께 지하철타기” 등 방 안에서만 살았던 중증의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기위해 이동권운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4월 초에 국립재활원에 입원해 9월 중순 퇴원하기까지 6개월 동안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이동권운동을 하기위해 버스나 지하철을 탄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한 번도 타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도 없었고,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콜택시도 서울시에 사는 장애인만 이용이 가능해 나는 오로지 택시를 타고 돌아다닐 수밖에 없어 한 달 택시비로 수십만 원을 써야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장애인 이동권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장애인이동권연대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다. 혜화동에 도착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작은 공간에 많은 장애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흰 머리카락이 많고, 꽁지머리를 하신분이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분은 중증장애인을 위한 노들야학의 교장선생님이자 장애인이동권연대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경석 선생님이었다. 나는 박경석 선생님을 만나면서 그동안 몰랐던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인 운동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8월 중순 서울역 광장에 천막농성장이 설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장애인이동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서울역 천막농성

 

그리고 2001년 8월 29일, 대학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제 4차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 이동권 운동을 한다기에 아침 일찍 혜화동으로 갔다.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벌써 많은 중증의 장애인들과 시민단체, 대학생들이 있었고, 로터리 주변에는 만약을 대비해 경찰과 전경들이 출동해 있었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자 집회가 시작 됐고, 한사람씩 돌아가며 장애인의 현실과 이동권에 대하여 발언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시내버스가 도착하자 비장애인들이 휠체어를 들어서 하나둘씩 장애인들을 시내버스에 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러 대의 시내버스에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나누어 타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 도착해 다시 내려 집회를 이어갔다.

 

2001년 8월29일, 장애인이동권연대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

 

집회 도중에 멀리서 장애인이 탄 마지막 시내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러자 한순간 집회현장에 긴장감이 돌았다. 서서히 시내버스가 세종문화회관 앞 정류장에 도착하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일제히 버스를 빙 둘러 쌓았고, 시내버스 안에서는 타고 있던 비장애인 승객과 운전기사 모두 버스 밖으로 내리게 했다. 그리고 승객이 모두 내리자 장애인이동권연대 대표인 박경석 선생님이 버스 안에서 홀로 남아 쇠사슬을 꺼내어 버스와 몸을 연결해 묶었고, 버스를 빙 둘러싼 장애인들도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연결해 꽁꽁 묶었다.

 

그리고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버스점거농성이었다.

 

세종문화회관 앞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점거한 장애인이동권연대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발칵 뒤집혔고, 잠시 후 대규모의 전경과 경찰특공대가 출동했다. 경찰은 불법시위라며 해산하라고, 계속해서 경고방송을 했다. 잠시 후 버스점거농성 소식을 들은 방송사와 기자들도 와 취재를 하였다. 경찰은 여러 차례의 경고방송에도 장애인들이 해산하지 않자 경찰특공대에게 해산작전을 지시했다. 그러자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장애인들은 쇠사슬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경찰특공대는 절단기로 몸에 묶은 쇠사슬을 끊어 장애인들을 하나둘씩 밖으로 끌어내었고, 여기저기서 끌려 나가지 않으려는 장애인들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들려왔다. 나도 저항(?)하려고 했는 데 전신마비장애인의 특성이 근육의 힘이 없는지라 저항 한 번 못하고, 휠체어 채 번쩍 들려 나왔다.

 

2001년 8월29일, MBC 9시 뉴스에 보도된 장애인이동권연대 버스 점거농성

 

끌려 나온 장애인들은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꼼짝을 못했다. 잠시 후 버스 주변이 정리되자 박경석 선생님만 버스 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경찰은 급작스러운 사태가 벌어 질 수도 있어 바로 진압을 안 하고,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박경석 선생님과 협상을 했다. 협상은 4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길고 긴 협상 끝에 박경석 선생님이 버스에서 내리며 중증장애인들의 버스점거농성은 해산되었다. 그리고 농성에 참가한 사람 중에 85명이 경찰에 연행 되면서 그 날의 집회는 끝이 났다.

 

그 이후에도 장애인이동권연대 운동이 있을 때면 계속 참가를 했고, 평소에는 국립재활원에서 자립생활 교육을 받았다.

 

자립생활 교육,

 

자립생활 프로그램 교육을 받는 사람은 뇌병변장애인 15명, 하반신마비 척수장애인 15명, 전신마비 척수장애인 10명 등 총 40명이었고,  장애의 특성에 따라 3개반으로 나뉘어 교육을 받았다. 교육생들은 모두 생활관에서 지냈고, 나도 간병인 아저씨와 함께 생활관에서 지내며 3개월 동안 여러 가지 교육을 반복해 받았다. 교육은 주로 재활운동, 의료상담, 자립생활 이념, 음악치료, 문화활동, 초빙강좌, 한글 문서작성, 도자기 만들기, 음식 만들기, 사회활동 체험하기, 동료상담 등 이었다.

 

국립재활원, 생활관과 교육동을 오가며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선진국의 자립생활 정책을 도입하여 국립재활원에서 처음으로 하는 교육이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자립생활과는 조금 다른 교육이었다. 물론 꼭 필요하고 좋은 교육도 많았지만, 중증의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사회활동을 하며 혼자서 자립을 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이 중요했다. 아무리 중증의 장애를 가졌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권리였다.

 

그런데 국립재활원에서 받는 자립생활 교육은 선생님이 교육을 하는 도중에 가끔씩은 “중증의 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그래서 “도움을 받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뉘앙스로 교육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그럴 것이 국립재활원에서 자립생활 프로그램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기존에 혼자서 활동할 수 있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훈련을 교육 하다가 직업훈련 교육이 장애인고용촉진공단으로 넘어가자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찾은 게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자립생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다보니 자립생활 교육은 무엇보다도 인권, 선택, 결정, 자율성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데 직업훈련 교육생을 다루듯이 자꾸 통제를 하고, 낮은 존재로 인식하는 듯 했다. 그래서 한 번 선생님과 작은 다툼이 있었다.

 

오후 5시면 대부분 교육이 끝나서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생활하는데 저녁 9시만 되면 군대에서 취침점호를 하듯이 방 정리를 깨끗이 하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문 앞에서 선생님이 점호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처음 몇 주는 참고 넘어갔는데 하루는 “청소가 불량하다. 점호시간에는 떠들지 말아라.” 등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지적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이런 점호는 받지 않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점호시간에 방 정리도 안하고 휴게실에서 혼자 TV를 봤다. 같이 교육을 받는 동료들은 선생님이 오면 혼난다며 계속해서 나를 만류 했지만 나는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런 군대식 점호는 부당하니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간병인 아저씨와 함께 뉴스를 봤다.

 

잠시 후 선생님이 점호를 하러 왔는데 내가 휴게실에서 TV를 보는 모습을 보고, “지금은 점호시간이니 빨리 가서 문 앞에 있어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에게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 날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뉴스를 보는 것도 중요하고, 자립생활은 자율성과 책임이 중요한데 이곳이 군대도 아니고, 또 다 큰 성인들인데 이런 식으로 통제 받는 점호는 앞으로는 받을 수 없다.”라고 조목조목 반문했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잠시 고민하시더니 교육생 모두 휴게실로 모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었는데 모두가 “이런 방식의 점호는 싫다.”라고 말하니 선생님도 “잘 알겠다. 앞으로는 점호시간에 자유롭게 행동 하는 것은 좋지만, 인원 수는 체크해야 하니 기숙사만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차하면 한바탕(?)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도 문제라 생각했는지 좋게 넘어가서 다음날부터는 인원 수만 체크하는 자유로운 점호로 바뀌었다.

 

아무튼 이때부터는 아니지만 나는 일찍부터 선생님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받으라는 자립생활 교육은 안 받고, 허구한 날 사유서를 쓰고, 장애인단체를 돌아다니며 행사나 장애인운동을 하러 다니니 좋아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방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 기회가 아니면 중증의 장애인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립회관,

 

9월 초쯤, 광진구에 있는 정립회관을 찾아 갔다. 정립회관은 소아마비협회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인데 일본에서 자립생활센터 소장을 하고 있는 중증의 장애인이 직접 와서 “일본의 자립생활 정착 과정”을 강의 한다고 해 가게 되었다.

 

광진구에 있는 정립회관 

 

차에서 내려 강당에 들어가니 많은 중증의 장애인들이 강의를 들으려고 모여 있었다. 잠시 후 나보다 더 장애가 심한 중증의 장애인이 컴퓨터로 하나하나 사진을 보여주며, 자립생활의 시초부터 일본에 자립생활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강의 했다. 중증의 장애인들은 일본에서 자립생활이 어떻게 확산되고, 정착?는지 진지하게 강의를 들었고,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이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이념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62년 호흡기계 소아마비장애를 가지고 있는 중증장애인 에드 로버츠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버클리 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 당시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중증장애인들은 대부분 장애인시설에 수용되어 살았다. 그러다보니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중증의 장애인이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에드 로버츠는 중증의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대학에 입학해 교육 받을 권리가 있다며 버클리 대학에 입학신청을 했고, 버클리 대학은 에드 로버츠가 편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대학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병실을 마련해 주었다.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창시자 에드 로버츠

 

1979년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에드 로버츠는 “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그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가장 잘 알 수 있다.”라는 모토로 중증의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립생활 센터를 최초로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자립생활 이념은 일본으로 확산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99년도가 돼서야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이념이 알려지면서 2001년부터 하나둘씩 자립생활 센터가 생기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며칠 후에 2박 3일 동안 “동료상담” 교육을 받기위해 다시 정립회관을 찾게 되었다. 기존의 장애인들은 주로 전문가라는 심리상담사, 의사, 사회복지사, 복지전문가 등 비장애인에게 장애문제와 심리를 상담 받았다. 그러나 중증장애인인 에드 로버츠가 말했듯이 “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장애인을 가장 잘 알 수 있다.”라는 말처럼 아무리 전문가라 하여도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아니라면 장애인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전문상담교육을 이수하고,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상담을 하는 "동료상담"이었다.

 

동료상담은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나뉘는데 나는 기초과정을 교육 받았다. 일본 같은 경우는 국가에서 인증하는 자격시험이라 동료상담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복지관이나 자립생활 센터에 취업해 동료상담가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동료상담 교육을 받은 동료상담가는 있지만 정부의 인증제도가 없어 아직까지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동료상담 교육 중에 장애로 인해 살면서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서로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기초과정에 참여한 장애인이 대부분 선천성 장애를 가진 뇌성마비장애인과 소아마비장애인이었다. 그 사람들은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살다보니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한 뇌성마비장애인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30년 가까이를 세상을 그리워하며 방 안에서만 살아야 했던 과거를 담담하게 얘기 했다. 사연을 들을 때마다 모두가 공감되어 눈물을 흘렸고, 동료상담이 왜 필요한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2박 3일의 동료상담 교육을 마치고, 국립재활원으로 돌아왔는데 어느새 자립생활 프로그램 교육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일정을 접고 자립생활 교육만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자립생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교육생들은 강당에 모였고, 3개월 과정의 교육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하며 수료식을 했다. 그리고 수료식이 끝나자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끝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 같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었던 6개월, 이 사회에서 전신마비장애인으로 살기위해 노력했던 나의 서울 유람기는 그렇게 끝을 맺고, 다시 이천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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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1.05 20:40

    첫댓글 흥미진진 하네요. 계속 읽게되는 마력이 있는 글입니다.

  • 14.11.08 14:58

    좋은 글입니다 ㅜㅜ 많은걸 느끼게되구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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