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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金圭植(1882 ~ 1931)】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청산리 전투 참가"
조국 독립의 꿈 품고 구국항쟁 이끈… 영원한 대한제국의 군인
청산리 대첩은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군이 거둔 최고의 승전보였다.
무려 5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부대를 동원한 일본군은 만주일대의 독립군 소탕 작전에 나섰다가 청산리에서 독립군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청산리 승전의 중심에는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있었지만 그들 못지않게 활약한 인물들도 기억해야 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경기도 구리시 출신의 노은 김규식(蘆隱 (金圭植, 1882~1931) 장군이다. 임시정부의 부주석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 선생과 동명이인이지만 우사가 펜을 든 지사였다면 노은은 총을 든 호랑이 장군이었다.
■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
김규식 장군은 1882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동 281번지(현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281-14번지)에서 김영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노은이고 별명은 호장군(虎將軍, 호랑이 장군), 금성(金星, 金成)으로 불렀다. 그는 21세가 되던 1902년에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대한제국 육군시위대 부교를 역임했다.
부교는 오늘날로 치면 육군 중사계급이다.(다른 기록에는 부위(중위)의 장교출신이라고도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른다) 그가 장교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육군연성학교의 조교로 있다가 1906년 제대해 고향 땅으로 돌아 왔다는 기록 때문이다.
즉 장교출신이라면 조교보다는 교관으로 복무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짧게 군 생활을 마쳤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제대했음에도 여전히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다. 이듬해인 1907년 일제에 의한 강제로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많은 군인들은 저항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도 전개됐다.
분개한 김규식은 강원도 철원에서 해산된 군인들을 모아 철원과 자신의 고향인 양주를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해 일본군과 4차례 접전해 큰 전과를 올리는 등 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드디어 13도 창의군이 모여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할 때 그도 합류했다.
1908년 1월 달에 시작된 서울 진공작전은 아쉽게도 총대장인 이인영 장군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지휘부의 혼선 등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선봉장 왕산 허위 부대만이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고 나머지 부대는 후일을 도모하면서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13도 창의군의 집결지인 양주 출신 김규식은 허위와 함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앞선 화력 앞에서 무참히 패배하는 의병들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는 러시아 지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려고 노력하다가 4월 인천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았으나 2년 만에 석방됐다. 이제 더 이상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김규식은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 북로군정서의 호랑이 대대장
1912년 중국 만주로 망명한 김규식의 초기 행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행적이 나타나는 것은 1919년 무렵부터이다. 즉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독립전쟁을 적극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만강 건너 만주지역에는 서일에 의해 북로군정서가 만들어 졌다. 서일은 대종교의 대종사라는 최고 직책의 종교인이었지만 종교인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총을 들고 직접 전장터에 나선 지휘관이었다.
그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영입한 인물이 김좌진이었다. 대한제국의 장교 출신인 김좌진은 이미 대한광복단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인물이었고 대종교인이었다. 그런 김좌진은 서일과 손을 잡고 북로군정서를 만들고 그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양성소를 개교했다. 김규식은 바로 사관양성소의 교관으로 등장한다.
사관양성소는 1920년 왕청현 십리평에 있었는데 서일을 따르던 많은 대종교인은 물론 만주지역의 민족의식이 각성된 젊은이들이 입학했다. 소장을 겸직한 김좌진의 지휘 하에 김규식은 이범석, 이장년 등과 함께 교관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렇게 해서 6개월 속성과정으로 배출된 학생들이 드디어 그해 9월에 첫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289명의 독립군 간부가 배출된 것이다. 이들 모두는 김규식의 추상같은 호령으로 키워진 간부들이었다. 비로소 독립군은 압록강 너머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있고 두만강 건너에는 사관양성소가 있어서 본격적인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정립된 것이다.
■ 청산리 대첩의 주역
1920년 6월에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에 크게 패한 일본은 이번 기회에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완전 소탕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없애지 않게 되면 자신들이 구상하고 있던 만주 침략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국 마적이 습격해 자신들이 피해를 받았다며 만주 침략을 개시하는 ‘훈춘사건’을 조작해 냈다. 일본군은 5개 사단으로 병력 수만 2만5천명이었고 비슷한 숫자의 관동군과 비행기까지를 동원한 입체적인 총공격이었다. 약 5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규모나 병력의 질로 봐서 이는 일개 마적단을 추적하려고 한 것이 아님은 명약관화했다.
이처럼 엄청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해 독립군 부대들은 우선 피신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지만 만주지역의 조선족들을 초토화시키는 일본군 앞에서는 맞상대를 하기로 변경했고 드디어 첫 만남이 이루어 진 곳이 백운평 계곡이었다. 이곳에서 일본군 200여명을 사살하고 천수평과 어랑촌 등 10월21일부터 26일까지의 청산리 일대에서 전투가 진행됐다.
약 1천600여명의 북로군정서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처음부터 중과부족이었지만 독립군에는 김규식과 같은 유능한 그리고 정신무장이 확실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그래서 최인걸 중대장처럼 방아쇠에 손가락을 묶고 죽어서도 총을 쏜 독립군들 그리고 주먹밥을 날라다 준 조선족 여인들까지 모두가 함께 싸운 승리였다.
청산리 대첩은 우리 측에서는 3천300명, 일본 측에는 1천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될 정도로 대승리였다. 그러나 패배한 일본군은 만주 일대의 조선 사람들에게 보복을 퍼 부었으니 그것이 조선족에 대한 대학살극인 경신대참변이다. 경신대참변으로 희생된 조선인이 3천50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는 수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 자유시 참변과 김규식의 꿈
청산리를 빠져나온 독립군들이 집결한 곳이 만주 동쪽 끝의 밀산이었다. 이곳은 일찍이 이상설이 향후 독립군 기지로 설정해 준비해둔 지역이었다.
이곳에 모인 독립군은 3천500여명으로 최강의 부대였다. 여기서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서일을 총재로, 부총재에는 홍범도와 김좌진, 조성환 그리고 실질적인 군대 지휘관인 총사령에 김규식 장군을 뽑았다. 이는 청산리를 치르면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김규식에 대한 독립군단의 평가였다.
밀산에 모인 대한독립군단은 식량과 무기 지원을 약속한 소련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소련에는 두 개의 조선인 파벌이 형성되어 서로가 자기네 편이 되어 주기를 원했다. 결국은 무력 충돌로 이어져 우리 독립군 최악의 사태인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자유시 참변으로 무참히 희생된 독립군이 900명이 넘으며 소련에 포로로 끌려간 숫자도 900명이 넘었다. 결국 자유시 참변으로 1920년대 초반의 금쪽같았던 독립군은 궤멸되고 만 것이다.
자유시 참변을 무사히 피한 김규식은 다시 독립전쟁터로 돌아왔다. 1923년 연길에서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자 군사 책임자인 총사령이 됐다. 1925년에는 북만지역에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가 결성되자 고려국민당에 가입해 군사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이 거주지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그리고 1930년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
특히 한국독립당은 김좌진 장군 암살 이후 만주지역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독립진영의 대동단결이라는 취지에서 만들어 진 정당이었다. 그러나 1931년 3월 지청천, 신숙 등과 함께 향후의 계획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동농장을 방문한 김규식은 뜻밖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사람들이 김규식 장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해 장군을 암살한 것이다. 겨우 52세였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또 민족은 그의 군사 지휘 능력이 아직 필요했는데도 불구하고. 노은 김규식. 그는 가슴에 조국 독립의 꿈이 새겨져 있는 영원한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살던 외증손의 아들이 국내에 들어와 일당 7만원짜리 막노동 현장에서 화제로 숨졌다. 장군이 목숨 걸고 되찾아 준 나라에서 중국 국적으로 후손이 죽은 나라가 광복 70주년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임형진(삼균주의연구소)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사노리(四老里, 현 구리시 사노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노은(蘆隱)이다. 아버지는 영선(永先)이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경 주명래(朱明來)와 결혼하여, 1901년 장남 현욱(顯旭), 1904년 차남 현성(顯聲), 1907년 3남 현의(顯毅), 1915년 장녀 현태(顯
泰), 1918년 4남 현륜(顯崙)이 태어나, 4남 1녀를 두었다.
1902년 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에 임명되었다. 1906년 시위대에 입대하여 부교(副校)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현덕후(玄德厚)와 양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의병장 허위(許蔿) 부대에 합류하여, 같은 해 9월부터 포천·연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양주에서 결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인영(李仁榮)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사령장(使令將)을 맡아 1,5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였다. 장단과 양주 등지를 무대로 일본 군경과 싸웠다. 1908년 6월 서울진공작전 때 허위와 함께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08년 8월 경성공소원(京城公訴院)에서 1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2년 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10년 9월 5일자로 사면되었다. 1917년 양주군 구리면 동구릉 삼림감시원을 역임하였으며, 1919년 1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조합장을 지내다가 1919년 3·1운동 전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망명 후 중광단을 토대로 설립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중광단을 이끌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선도하였다. 북로군정서의 군사력은 북간도 지역뿐만 아니라 서간도 지역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920년 8월 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弘國)·김상운(金相雲) 등과 왕칭현(汪淸縣) 서대파 십리평에 설립한 북로군정서 단기 속성 군관학교인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의 훈련 과정은 6개월 속성이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군사학·총검술 등을 교수하였으며, 축성교범 등의 교재 등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군사훈련은 구한국 군대식의 훈련을 기본으로 하고 3,000평 연병장을 만들어 사격 훈련 등의 실질적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9월 배출된 제1회 졸업생 300명 중 150명으로 지방 시찰 여행대를 조직하였으며, 나머지 150명은 새로 모집한 100명 및 사령부 경비대와 합하여 3개 연대 규모의 400명 병력 1개 대대를 편성하였다. 새로 편성된 보병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북로군정서 태극기와 장총 [판형3] |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도 주변 지형과 뛰어난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지휘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운평전투에서 펼친 활약은 어랑촌전투에서도 빛을 발했지만, 일본의 지속적인 정규군 투입과 보급선 확보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密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11월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으로 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며, 이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모장에는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이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초 연해주 이만에 도착한 독립군들은 무장해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자유시로 이동하거나 다시 만주로 귀환하였다. 김좌진·이범석과 함께 옌지(延吉)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2년 8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주간부 내에 조직된 고려부가 연해주에 산재한 ‘고려의병대’ 통일 문제를 러시아인 연해주의병대 혁명군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9월에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지도 아래 연해주고려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으며, 9월 5일 연해주 고려인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결성되었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제1본대총사령부의 총사령으로 677명의 병력을 지휘하였고, 관할 지역은 포시에트 훈춘구역이었다. 10월 연해주 백위파 잔당을 몰아내는 최후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전선에서 러시아 적군의 우수리스크를 점령 전투를 지휘하였다.
1922년 11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총사령부 편제를 개편할 때 군정위원장 최호림, 기병대장 이범석 등과 함께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 11월 15일부터 고려혁명군이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부하 200여 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무링현(穆棱縣)으로 이동하였으나, 중국 관헌에 무장해제당하였다.
1923년 초 고평(高平)·이범석과 함께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를 실시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중국 지방 관헌들의 압박으로 근거지를 헤이룽장성 닝안현(寧安縣)으로 이전한 뒤에는 부하 100여 명을 선발하여 동경성(東京城) 일대 관유지를 임대 개간하였다.
1923년 2월 노농 정부로부터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받아, 중동선 철도 및 남만주철도 연선의 친일파 및 일본 관헌을 척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60여 명으로 구성된 결사대와 모연대를 조직, 간도 및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사상 선전을 꾀하였다. 3월 5일 각자 권총 1정과 공채증권을 휴대한 결사대와 모연대를 국내로 보내 함경북도 명천군과 경성군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토록을 명령하였다.
1923년 5월 김좌진·현천묵과 함께 기진회(期進會)를 조직하고, 오성륜(吳成崙)·최웅렬(崔雄烈)·한상오(韓尙五) 등으로 암살단을 편성하여 국내에 파견하였다. 같은 해 5월 현천묵·조성환·김좌진·나중소·이장녕·이세영(李世永) 등 79명 명의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조 지지 선언문을 발송하였다. 11월에는 이범석·조성환(曺成煥) 등과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김규식 활동 보도(『매일신보』 1924.10.12) [판형2] |
1924년 10월 독립군단을 재수습하여 통빈현(同賓縣)에 본부를 두고 김좌진과 함께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총재에 현천묵이 선임되었으며, 이때 사령관에 부임하였고, 이범석은 군사부장이었다.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한독립군으로 명명하였으며, 중국 우페이푸(吳佩孚) 군벌을 상대로 군자금과 무기 구입을 도모하였다.
1925년 부인 주명래를 비롯하여 4남 1녀를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링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김좌진·김혁(金爀, 김학소)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고, 1926년 3월에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김좌진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팡정현(方正縣)과 옌쇼우현(延壽縣) 및 주허현(珠河縣, 현 尙志市)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7년 2월 신민부 내 민정파(民政派)로 구성된 고려국민당(高麗國民黨)에서 군사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고려국민당은 통빈현 소량자(小亮子)에 본부를 두고 주허현과 통빈현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9년에는 국민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이장녕·홍진·지청천·조경한·황학수·신숙 등과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를 모체로 하여 중동선 연선(沿線)의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인재 양성과 운동 자금 확충을 위한 활동에 진력하였다. 한국독립당은 강령으로 삼본주의(三本主義)의 바탕 아래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각지의 주민회를 조직화하여 일반주민을 결속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표면기관으로 1931년 2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다.
1931년 부인 주명래 등 가솔들과 옌쇼우현으로 이주하였으며, 그해 3월 한족자치연합회 본부가 있던 주허현 이붕해(李鵬海)의 집에서 신숙(申淑)·지청천 등과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백운봉·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유해는 주허현 마이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사노리(四老里, 현 구리시 사노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노은(蘆隱)이다. 아버지는 영선(永先)이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경 주명래(朱明來)와 결혼하여, 1901년 장남 현욱(顯旭), 1904년 차남 현성(顯聲), 1907년 3남 현의(顯毅), 1915년 장녀 현태(顯泰), 1918년 4남 현륜(顯崙)이 태어나, 4남 1녀를 두었다.
1902년 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에 임명되었다. 1906년 시위대에 입대하여 부교(副校)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현덕후(玄德厚)와 양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의병장 허위(許蔿) 부대에 합류하여, 같은 해 9월부터 포천·연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양주에서 결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인영(李仁榮)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사령장(使令將)을 맡아 1,5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였다. 장단과 양주 등지를 무대로 일본 군경과 싸웠다. 1908년 6월 서울진공작전 때 허위와 함께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08년 8월 경성공소원(京城公訴院)에서 1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2년 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10년 9월 5일자로 사면되었다. 1917년 양주군 구리면 동구릉 삼림감시원을 역임하였으며, 1919년 1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조합장을 지내다가 1919년 3·1운동 전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망명 후 중광단을 토대로 설립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중광단을 이끌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선도하였다. 북로군정서의 군사력은 북간도 지역뿐만 아니라 서간도 지역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920년 8월 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弘國)·김상운(金相雲) 등과 왕칭현(汪淸縣) 서대파 십리평에 설립한 북로군정서 단기 속성 군관학교인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의 훈련 과정은 6개월 속성이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군사학·총검술 등을 교수하였으며, 축성교범 등의 교재 등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군사훈련은 구한국 군대식의 훈련을 기본으로 하고 3,000평 연병장을 만들어 사격 훈련 등의 실질적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9월 배출된 제1회 졸업생 300명 중 150명으로 지방 시찰 여행대를 조직하였으며, 나머지 150명은 새로 모집한 100명 및 사령부 경비대와 합하여 3개 연대 규모의 400명 병력 1개 대대를 편성하였다. 새로 편성된 보병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북로군정서 태극기와 장총 [판형3] |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도 주변 지형과 뛰어난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지휘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운평전투에서 펼친 활약은 어랑촌전투에서도 빛을 발했지만, 일본의 지속적인 정규군 투입과 보급선 확보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密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11월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으로 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며, 이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모장에는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이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초 연해주 이만에 도착한 독립군들은 무장해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자유시로 이동하거나 다시 만주로 귀환하였다. 김좌진·이범석과 함께 옌지(延吉)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2년 8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주간부 내에 조직된 고려부가 연해주에 산재한 ‘고려의병대’ 통일 문제를 러시아인 연해주의병대 혁명군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9월에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지도 아래 연해주고려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으며, 9월 5일 연해주 고려인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결성되었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제1본대총사령부의 총사령으로 677명의 병력을 지휘하였고, 관할 지역은 포시에트 훈춘구역이었다. 10월 연해주 백위파 잔당을 몰아내는 최후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전선에서 러시아 적군의 우수리스크를 점령 전투를 지휘하였다.
1922년 11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총사령부 편제를 개편할 때 군정위원장 최호림, 기병대장 이범석 등과 함께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 11월 15일부터 고려혁명군이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부하 200여 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무링현(穆棱縣)으로 이동하였으나, 중국 관헌에 무장해제당하였다.
1923년 초 고평(高平)·이범석과 함께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를 실시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중국 지방 관헌들의 압박으로 근거지를 헤이룽장성 닝안현(寧安縣)으로 이전한 뒤에는 부하 100여 명을 선발하여 동경성(東京城) 일대 관유지를 임대 개간하였다.
1923년 2월 노농 정부로부터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받아, 중동선 철도 및 남만주철도 연선의 친일파 및 일본 관헌을 척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60여 명으로 구성된 결사대와 모연대를 조직, 간도 및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사상 선전을 꾀하였다. 3월 5일 각자 권총 1정과 공채증권을 휴대한 결사대와 모연대를 국내로 보내 함경북도 명천군과 경성군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토록을 명령하였다.
1923년 5월 김좌진·현천묵과 함께 기진회(期進會)를 조직하고, 오성륜(吳成崙)·최웅렬(崔雄烈)·한상오(韓尙五) 등으로 암살단을 편성하여 국내에 파견하였다. 같은 해 5월 현천묵·조성환·김좌진·나중소·이장녕·이세영(李世永) 등 79명 명의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조 지지 선언문을 발송하였다. 11월에는 이범석·조성환(曺成煥) 등과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김규식 활동 보도(『매일신보』 1924.10.12) [판형2] |
1924년 10월 독립군단을 재수습하여 통빈현(同賓縣)에 본부를 두고 김좌진과 함께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총재에 현천묵이 선임되었으며, 이때 사령관에 부임하였고, 이범석은 군사부장이었다.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한독립군으로 명명하였으며, 중국 우페이푸(吳佩孚) 군벌을 상대로 군자금과 무기 구입을 도모하였다.
1925년 부인 주명래를 비롯하여 4남 1녀를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링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김좌진·김혁(金爀, 김학소)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고, 1926년 3월에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김좌진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팡정현(方正縣)과 옌쇼우현(延壽縣) 및 주허현(珠河縣, 현 尙志市)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7년 2월 신민부 내 민정파(民政派)로 구성된 고려국민당(高麗國民黨)에서 군사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고려국민당은 통빈현 소량자(小亮子)에 본부를 두고 주허현과 통빈현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9년에는 국민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이장녕·홍진·지청천·조경한·황학수·신숙 등과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를 모체로 하여 중동선 연선(沿線)의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인재 양성과 운동 자금 확충을 위한 활동에 진력하였다. 한국독립당은 강령으로 삼본주의(三本主義)의 바탕 아래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각지의 주민회를 조직화하여 일반주민을 결속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표면기관으로 1931년 2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다.
1931년 부인 주명래 등 가솔들과 옌쇼우현으로 이주하였으며, 그해 3월 한족자치연합회 본부가 있던 주허현 이붕해(李鵬海)의 집에서 신숙(申淑)·지청천 등과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백운봉·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유해는 주허현 마이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