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인생고를 여의는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안락스러운 안락법문安樂法門이 부처님 법문의 요체要諦입니다. 헌데 그러한 안락법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명심無明心을 밝지 못하는 즉 말하자면 삿된 견해를 떠나는 그러한 무명심을 떠나지 않고서는 안락스러운 그런 경계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즉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정견正見인가. 바른 견해인 것인가 하는 정견에 대한 확신을 우리가 개념 파악을 해 두어야 됩니다. 역시 이 정견正見이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법이라던가, 또는 성자들의 말씀은 모두가 다 정견입니다. 정견이고, 우리 중생들이 상식적으로 옳다고 하는 그런 것은 사실은 정견이 못 됩니다.
가령 우리가 지금 내 몸이 지금 이대로 있다, 또는 내 몸 밖에 있는 대상적인 물질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있다 이런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식적인 견해에서는 옳다고 긍정이 되나 정견에 비추어 봐서는 정견은 못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라는 것이 있다 하는 관념 이것은 사실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 불교에서 일반사람들이 납득을 못 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른바 무아無我 아닙니까. 무아無我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내가 없다는 무아란 말입니다. 내가 분명히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의 삿된 견해로 있다고 하니깐 인생고人生苦가 생긴다 말입니다. 그 어째서 없는 것인가?
가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철두철미 과학적인 동시에 또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입니다. 철두철미 과학적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대로 말씀하신 법문이란 그런 뜻입니다. 그러고 철두철미 철학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참다운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런 것을 밝혀있는 가르침이 이른바 참다운 철학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존재의 실상,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 불교는 현대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가장 위대한 존재론存在論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보통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박한 우리 상식으로 뭣이 있다. 나는 '나'대로 있고, 너는 '너'대로 있다. 또 대상적인 이 현상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대로 다 실존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이른바 우리들의 잘못 보는 하나의 망상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유위법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있다고 보는 그런 법이 유의법입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있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 유위법有爲法이지요.
더 깊이 말하면 '나'라는 존재가 있고 또 동시에 '나'라는 주관이 분명히 있으니깐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는 객관적으로 우리가 보는 환경도 모두가 다 우리가 보는대로 그대로 다 존재한다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여기 탁자는 탁자 그대로 존재하고 여기 컵은 컵대로 있고,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볼때는, 이것은 우리 인간의 주관에 비추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 탁자가 있고 컵이 있는 것이지, 그 원소차원에서만 생각해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각 원소로 다 구성 안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세밀한 정밀현미경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 금쪽같이 아끼는 내 몸뚱이도 각 원소로 다 구성되었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기도 내내야 수분이나 수소나 산소나 질소나 그런 것이 없는 공기가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공간도 내내야 그런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으로만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주관이나 객관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이런 도리가 이른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가 있다고 보는 모든 것은 결국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헛깨비요 다 그림자와 같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것을 수긍을 잘 못합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면, 인간정도의 무명無明때문에, 인간정도의 업業 때문에 그렇단 말입니다.
우리가 가령 과거 숙세宿世에 보다 더 잘 닦아서 천상天上만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는 또 어떻게 볼 것인가. 경經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천견수사유리天見水思琉璃 인견수사수人見水思水라, (귀견수사화鬼見水思火 어견수사실魚見水思室이라.) 이것은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그런 법문을 한문으로 말한 것인데 천견유리天見琉璃라, 하늘 천天자 볼 견見자 하늘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마시는 물을 아주 영롱한 유리로 본다 말입니다. 천견수사유리天見水思琉璃 인견수사수人見水思水라, 사람 인人자 볼 견見자 물 수水자 말입니다.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이니깐 물로 보지 않겠습니까.
요즈음 어느 분이 책을 한부 보내주셔서 봤는데,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물방울을 아주 그 정밀한 사진기로 찍이서 물방울이 어떤 모양인가. 즉 말하자면 물방울이 아주 기기묘묘한 모습을 여실히 찍은 사진이어요. 일본사람이 찍었는데 (주: 2001년 에모토 마사루, 일부 논란이 있음) 그런데 그 물방울도 같은 물방울도 우리가 성을 내서 보면 물방울의 모양이 좀 일그러지고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물방울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방울이 아주 정확하니 그야말로 바람직하니 훌륭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현대물리학이나 과학이라 하는 것은 차근차근 부처님 가르침을 증명해 들어갑니다. 우리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물질은 없고 다 마음뿐이라는 것이 일체유심조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상식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도저히 긍정을 못 합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이 현상이라는 것은 우리 눈으로 상식적으로 보는 대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현상 모두가 꼭 그야말로 몽환포영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꿈이요 헛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은 거란 말입니다.
인생의 고통이라는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바로 보고서, 꿈으로 보고 허깨비로 보고 환영으로 그림자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괴로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나'라는 존재도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깐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니깐 아, 나를 누가 조금이나 헐뜯다거나 훼손을 시키면 그냥 또 성내고 우리가 불행을 느끼지 않습니까.
허나(그러나) 그 무아無我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란 것이 사실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더러는 방편으로 말씀하신 가르침이 있지만, 또 방편 속에도 사실을 사실대로 항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어째서 없는 것인가? 내 몸뚱이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각 원소로 구성되어 있단 말입니다. 산소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원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우리 몸뚱이가 있겠습니까. '나'라고 생각하는 우리 마음은 또 어떤 것인가.
우리 마음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여실히 말씀하시듯이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하고 또 의욕도 하고 우리가 느끼고 분별하고 우리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어떻게 느끼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분별하는가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금생에 이렇게 배우고 저렇게 배우고 분별지식이 거기에 더 보태어 지겠지요, 이런 것이 결국은 지금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같이 분석적으로만 본다고 하더라도 내 몸뚱이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또 내 마음이란 것도 '나'라고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내가 아닌 것을 구태여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데서 인생고人生苦가 있습니다. 인생고난이 있습니다.
내 아들이나 내 딸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나도 내 것이 아닌데 내 아들이나 내 딸이나 내 남편이나 내 아내가 내것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대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란 말입니다. 내 재산 내 집도 이것이 참다운 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톨릭)에서도 신부나 수녀가 있고, 또 불교에서도 비구 비구니가 있지 않습니까 가장 기독교를 잘 믿는 사람들이 오로지 믿는 이른바 계층이 신부 수녀 아닙니까. 또 불교도 가장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믿고자 해서 승려가 돼서 비구 비구니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그와 같이 세속을 떠나서 독신생활로 사는 것은 어째서 그런고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가족이나 모두가 다 내 재산이나 명예나 이런 게 사실은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것이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있고 공산주의 운동이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맑스주의도 갖다가 칼맑스나 레닌이 경제학經濟學이론을 세우고 아주 여러 가지 어려운 말을 많이 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상의 근거가 모두가 다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유물론唯物論)에 의해서 다 그렇습니다. 아, 물질이 본래는 없는 것인데, 있다고 생각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즉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의, 그 무지무명無知無明의 근거에다가 두고서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것이 온전히 될 수가 없습니다. 될수가 없기 때문에 소비에트에서 그렇게 70여년 동안 공산주의가 득세했지만은 결국 허물어지고 무엇이 남았습니까.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도 부처님 가르침을 내가 무던히 믿고 기도도 잘 모시고 참선을 하고 그런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또 실질 생활을 보면 유물주의자, 아, 내 집도 절대로 내 것이고, 내 남편도 절대로 내 남편이고 나한테 있는 것이 모두가 이것이 절대로 내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것이 부처님 사상이겠습니까.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 속스러운 속물근성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내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찾아보나 과학적으로 보나 철학적으로 보나 어떻게 보나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단지 다만 업 따라서 나 같은 존재가 잠시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그것도 우리가 바로 못 보는 우리 속된 눈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정견正見이라, 정다운 바른 견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견해, 성자가 만상萬像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그런 견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생겨났거니 내일 죽을 수도 있고 모레 죽을수도 있고 또 어떻게 여러 인연들도 해서 우리가 잘못 얽혀가지고서 나쁜 병에도 걸리고,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인과因果의 법칙으로 해서 그것이 꼭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가지고서 우리 스스로 업을 지어서 그렇게 받는 것인데 누구한테 원망할 것도 없고 한恨할 것이 없어요. 우리가 바른 견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심각하니 인생을 괴로워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바른 견해일 것인가. 그 열반경涅槃經에서 삼수도하三獸渡河라, '삼수도하'란 것은 세 짐승이 물을 건너간단 말입니다. 물을 건너가는데 그것은 이른바 3차원이기 때문에 인생의 보는 견해를 세 짐승이 물을 건너가는데 비유를 한 것이어요.
그래서 그 토끼란 놈은 가벼우니깐 물을 건너갈 때 둥둥 떠서 건너가겠지요. 그것은 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법의 표면만 다 그렇게 잠시간 알고 가는 것이지, 법의 깊이를 모른다 말입니다. 그러고 또 그다음에 그보다 덩치가 더 큰 말이란 놈은 좀 무겁고 덩치가 크니깐 표면만 떠서 가다가 몸이 물 속에 잠겨서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말은 보다 더 인생에 대한 견해가 더 깊어서 가는 그런 것에 비유가 되고, 또 코끼리란 놈은 덩치가 훨썩 크고 무게도 무거우니깐, 그 강의 물의 바닥에 발을 딛고서 뚜벅뚜벅 물 속을 건너간단 말입니다. 그 세가지 견해가 우리 인생에도 그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식적으로 그냥 물질은 물질대로 우리가 대상적으로 밖에다가 보는 데로 있다. 또 내 몸뚱이나 무엇이나 모두가 다 일반 소박한 생각대로 그대로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은 마치 토끼란 놈이 가볍게 물을 건너가는 그런 피상적인 아주 표면적인 그런 견해에 불과하고 또 조금 더 깊어져서 모든 것이 다 인연에 화합 따라서 인연이 모아서 되어간다는 그런정도는 즉 말하자면 말이 물을 건너가는 정도이고 또는 깨달아서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을 실상을 깨달은 뒤에, 우리가 깨달은 뒤에 이른바 실상관實相觀 모든 것의 바른 견해는 코끼리란 놈이 강의 바닥을 뚜벅뚜벅 딛고서 가는 그런 것의 비유같은 법문이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코끼리같이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실상을 깨달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또는 부처님 가르침은 어떤 것을 가르켜서 깨달은 가르침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그 철학적으로 가장 훌륭한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나의 참나는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또 모든 것의 참다운 그러한 성격은 무엇인가 즉 이런 거란 말입니다.
이걸 가르켜서 불교 말로 제법실상諸法實相 그래요. 제법실상이라, 제법실상이라는 것은 제법은 모든 법을 제법 그럽니다. 모두 제諸자 법 법法자. 이것이나 저것이나 선이나 악이나 모든 존재의 법을 제법 그러는데 우리 중생들은 그 제법의 차이만 알았지 말입니다. 제법의 그대로 모두가 다 실다운 것이라는...(기침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위에 있는 문들을... 작은 문들이 지금...) 그런 모든 법이 그와 같이 모든 법대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제법 그대로 모두가 다 실상 참다운 진리 아님이 없다는 그런 뜻이 제법실상입니다.
따라서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부처님의 대승경전은 대체로 제법실상諸法實相 도리를 말씀해 있어요. 번뇌煩惱가 즉 보리菩提다. 또 생사生死가 즉 열반涅槃이다, 그런 말씀들은 모두가 다 제법실상에 온 그런 말씀입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은 죽고 사는 이 중생세계가 생사하는 그런 세계 아닙니까. 헌데 죽고살고 하는 그런 것도 역시 그 바닥에서 참다운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이것도 진리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 죽음이 있고 삶이 있고 생사가 있는 것이지, 보다 더 근원적인, 이른바 영원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사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몇십 년 살고 늙어지면 당연히 그때는 생로병사가 있어서 죽음에 이르고 그러지 않겠는가. 허나 근원적인 그 진리적인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죽음이 본래로 없습니다. 죽음이. 우리 생명이라는 것은 죽음이 없습니다. 자기의 친한 아주 귀여운 자식이라던가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헤어진다라던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별도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겉만 보니깐 그러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본래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우리 생명자체는 본래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거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는 모두가 다 근본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眞如 진리의 불성佛性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궁극적인 근원이 무엇인가. 내 몸의 궁극적인 근원도 내 살덩이라던가 내 뼈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근원은 똑같이 이것도 역시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입니다. 아무리 못생기고 잘생기고 그런 것도 우리 중생의 차별 눈으로 봐서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것이지,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각 원소차원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역시 산소나 수소나 뭐다 그런 것이 자기 구성요소라고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어떤 것인가. 그런 것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아주 정밀현미경으로만 볼 수가 있는 그런 소립자 요새 물리학에서는 가장 미세한 물질을 소립자 그래요. 쪼개고 쪼개고 더 쪼갤 수 없는 그런 것이 소립자입니다. 중성자 양성자 전자 그런 것이 소립자에요. 그래서 물리학적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는 결국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립자는 또 어떤 것인가. 소립자 그것은 따지고 보면 그것이 물질이 아니어버린다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 중성자나 양성자나 전자나 그런 것은 시시각각으로 생겨나고 없어지고 생겨나고 없어지고 또는 서로 바꿔지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 물질의 가장 미세한 것이 그래요 지금. 그 물질의 가장 미세한 것이 따지고 보면 결국은 종당에 가서는 물질이 안 되어 버린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그런 정도까지는 생각을 좀 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물질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으시지여. 내가 지금 끼고 있는 다이아반지나 모두가 다 그런 것도 영구히 있는 것이 아니어요. 순간순간 다 마멸되어 있고 다이아몬드도 내내야 하나의 탄소가 결합되어서 다이아몬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것(물질) 때문에 망상하고 우리 생명을 낭비할 사실은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깐 꼭 정견正見을 가지어야 되어요. 정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이아몬드도 실상이 아닌 것이고, 금도 실상이 아니고 오직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그 불성佛性만이 모든 존재의 실상입니다. 우리 마음의 실상이고 몸의 실상이고 이 공기나 모든 원소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립자나 그런 것도 역시 모든 실상은 다 불성입니다. 불성이니깐 깨달은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미운사람 고운사람 이것이나 저것이나 공기나 뭣이나 모두가 불성뿐입니다. 공기도 불성이고,
그러니깐 부처님 가르침에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우주가 모두가 다 법계라, 진리세계뿐이란 말입니다. 진리의 세계. 우리 불자님들 염불도 하고 또는 화두공안도 의심도 해서 공부를 하시고 그러시지요. 제가 인제 잔말을 너무 많이 해버리면 저한테 한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다 못합니다. 그러니깐 대충대충 줄여서 얘기합니다만,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망한 견해, 정당한 견해가 아닌 허망한 견해는 꼭 떠나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견해, 내 몸뚱이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소박하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런 것도 역시, 그 뜻을 새겨서 잘 좋은 뜻으로 말하면 좋은데, 좋은 뜻도 모르면서 갖다가 덮어놓고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면 우리 눈으로 보는대로 모두가 옳다는 긍정이 되어버리겠지요. 산도 공이요, 물도 공이요 내 몸도 공이요. 다 공입니다. 허망한 공입니다.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이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뜻은 바로 제법공諸法空 뜻입니다. 모두가 비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서 허망한 아까 말마따나 소박한 그런 상식으로 봅니다. 소박한 상식 이것은 실질적인 지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과학적이고,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의지하는 바에는 아까 말씀드린 바 우리 인생고人生苦를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 모두가 다 비어있다는 그런 견해가 되어야 정견正見이 되어요. 정견이 말입니다. 사실은 정견이 바른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상식적으로 눈에 안 보이니깐 정견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과학이라 하는 것은 어디가(어디에)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면, 모두가 나누고 쪼개고 하다가 종당에는 다 비어버린다, 그렇게 과학이 되어야 과학의 본의本義가 있어요. 그러고 그 비지 않은 물질적인 세계는 사실 물질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은 원래 없다는 것은 지금은 물리학도 증명을 다 하고 있어요. 아까 말씀마따나 쪼깨고 쪼깨고 하면 물질은 어디 간 도리가 없단 말입니다. 중성자가 되고 양성자가 된다 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금방 생겨났다가 없어졌다가 생겨났다가 없어졌다가 그래가지고서 결국은 존재성이 없어요.
그러면 그 실상이 무엇인가 그런 물질의 가장 미세한 소립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리학은 모릅니다. 어째 모르는고 하면, 물리학은 무슨 질료, 즉 말하자면 무슨 엉터리가 있어야 분석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텅 비어버리니깐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물리학의 공로는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그런 소식을 증명하는데 가서 물리학의 공로가 있어여.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다 비었다는데까지만 가면 세상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사실은 빈 것이 참 말로 빈 것이 아니라, 시간성 공간성 물질적으로만 없는 것이지, 그 빈 그자리는 참다운 생명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다시 불교적인 말로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 충만해 있습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기독교도 순수한 그러한 예수님 가르침을 그대로 받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뿐입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하나님뿐입니다. 힌두교도 그래요. 힌두교는 내내야 바라문교 브라흐마를 믿는 것 아닙니까만 힌두교 교전도 보면 우파니샤드Upanisad나 그런 교전을 보면 주위에 모두가 다 바라문뿐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바라문이라는 하나의 영원적인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내내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부처님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런 말씀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가끔 제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기억하실란가 모르겠지만(심진여자心眞如者 대총상법문체야大總相法門體也) 대총상법문이라, 대총상법문은 무엇인고 하면 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대승의 가르침을 갖다가 믿게 하는 그런 이른바 논저 아니어요. 마명대사馬鳴大師라고 대승불교의 할아버지 같은 분이어요. 헌데 그분이 낸 것이 대승기신론인데 대승의 그런 신앙을 내게 하는 그러한 가르침이 모아 있는 경전이 대승기신론인데, 대승기신론의 있어서 역시 대승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보는 허망한 세계가 아주 아무것도 없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허망한 것의 그런 실상實相, 허망한 것의 참다운 성품性品이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불성의 세계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물질이 허망하다라는 그런 것을 참말로 깨달으면 그때는 이른바 불성세계가 나오는 것인데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고 염불念佛을 하고 기도를 많이 모시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치로는 좀 들어서 납득이 될 수가 있겠지요. 아, 모두가 다 분석하고 분석하면 다 허망한 것이고, 허망한 세계를 또 깊이 들어가면 그때는 불성이 나오겠구나 그런 것을 우리가 유추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으나 우리가 실지로 그 불성을 보지 않고서는 그때는 긍정이 안 가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을 우리가 실지로 체험해야 할 것인데, 그런데가서 우리가 참선을 하고 기도를 또 오랫동안 모시고 한적이 있어요. 그건 어째서 그런고 하면, 우리 업장業障이, 우리 업이 버릇이 되어서 있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버릇, 또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버릇 때문에 우리가 이치로는 부처님 말씀이나 성자의 가르침을 듣고서 '아, 모두가 다 허망하구나' 허망하지 않는 또 무엇인가 있어서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이구나, 이렇게 이제 알듯말듯하게 긍정을 하시겠지요. 허나(그러나) 그 불성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 자리는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됩니다. 생각생각에 우리 업장을 녹여버려야 업장이 녹인만치 그때는 차근차근 불성이 빨리 비추어온단 말입니다.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의 광명光明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별명도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무량광불이라. 우주에 끝도 갓도 없는 하나의 광명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또는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갓도 없고 한계도 없는 그런 광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그런 수명이라던가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 우주에 충만한 하나의 광명인 것이니깐 우주에 충만하니깐 그때는 내 몸에도 충만해 있겠지요.
이 공기 속이나 물속이나 어느 속에나 아까 말씀드린 다이아몬드 가운데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쇳덩이속이나 납속이나 모두가 다 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한말로 말하면 모두가 다 불성佛性으로 되어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어디에만 귀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그걸 못 가지면 굉장히 섭섭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만 그러나 (불성이) 어디에나 다 있다고 생각할 때는 섭섭히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다만 문제는 우리 마음을 닦아서 우리가 불성하고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들은 열심으로 화두를 참구를 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그때는 자동적으로 우리 본래면목인 진여眞如하고 하나가 됩니다. 염불 좋아하는 사람들은 염불을 또 열심히 해서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 없이 열심히 해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서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고 그래놓으면 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의 훤히 빛나는 부처님의 광명이 차근차근 자기한테 비추어 온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또 우리가 진여불성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말은 쉬워도 그것이 쉬울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자꾸만 쓸데없는 의심을 품습니다. 성인들 말씀을 다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우리가 진리로 가는 길을 이렇게 말씀을 하셨건만 우리 중생들은 업장業障에 가렸기 때문에 자꾸만 허망한 생각으로 해서 쓸데없는 의심을 품습니다. 우리는 본래가 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으로 됐습니다. 머리카락으로부터서 발끝까지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습니다. 이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우리가 잘못 살다가 형무소에 들어가서 지금은 교도소라고 그럽니다만 교도소에 들어가서 감옥살이를 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도 다 진여불성은 충만해 있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과거 전생에 복을 못지어서 형무소에 가서 4개월 남짓 살았어요.(주: 1968년 가까운 권속이 목불상을 옮겨온 사건으로 누명을 쓰심) 그때 있어보니까 참선하기가 그렇게 좋아요. 참선하기가. 이런 세속에 있어놓으면 여러 가지 잡음이 많은데, 누가 통 간섭 안 하니깐 오로지 혼자만 있으니깐 공부하기가 얼마나 참 좋은줄 몰랐어요. 그래놓으니깐 우리가 공부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손해가 조금도 없습니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본래가 모두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가 내 부처를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우리 공부입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공안이나 우리가 불경을 보는 것이나 우리가 그러한 성자의 말씀을 봄으로 해서 우리 업장을 녹이고, 우리 마음을 그때그때 분열을 시킨데서 결국은 차근차근 하나로 우리 마음을 모은다 말입니다. 어디로 모은가 하면 우리 본래의 자리로 다 모읍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가 그런 범부인지라 본래의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허망한 것을 자기라고 안단 말입니다. 우리는 눈을 똑바로 뜨고서 우리 흐리멍텅한 마음 우리 흐리멍텅한 눈으로 해서 그 아닌 것을 기(옳다)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주변에 있는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도, 가령 우리가 남한테 저 사람 못살고 불쌍하니깐 내가 좀 베풀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서 남한테 베푸는것은 그건 진리에 입각한 베품이 못 됩니다. '나'와 '남'의 구분을 둔다는 것은 벌써 그것이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데, 저사람과 '나'와는 본래 하나인데, 이렇게 하나의 그런 진리 입각은 일원적인..(일원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원으로 보고 다원으로 보고 나누어서 쪼개서 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삿된 견해입니다.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를 다 하나의 진리(하나의 도리)로 본단 말입니다. 미운사람 고운사람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기 때문에, 남한테 베푼다 하더라도 하나라고 보고 베풀어 줘야 이른바 법에 맞는 불교 말로 세간적인 법이 아니라 즉 말하자면, 불교 법에 맞는 합법적인 하나의 보시란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보시란 말입니다. 이런 보시를 가르켜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상을 두지 않는 보시란 말입니다.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선禪이라는 것은 참선이나 선을 말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참선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참선하고 일반공부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고 하면 참선공부는 그냥 바로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는 공부입니다.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말입니다.(불리자성不離自性)
우리 중생들의 보통공부는 본체를 여의고 상대적인 문제를 가지고서 그때그때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인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이 아미타불이 저 밖에 계신다. 우리가 기도를 모시고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우리한테 가피를 주신다, 이런 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고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은 내 몸뚱이 나도 역시 내 본신本身도 본래가 아미타불이고 천지우주 모두가 다 아미타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을 해야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 공부가 돼요. 그래야 염불선念佛禪(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된다 말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아이, 그 부처님이 저만치 밖에 있다가 우리가 부처님을 애쓰고 외이면 부처님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주신다 보호를 주신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하면, 그런 염불도 염불선이라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염불선이라는 것은 선 자체가 상相을 떠나서 그 본체 본래의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그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선禪 이라고 합니다.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들어도 가령 무자 화두를 든다고 하더라도 덮어놓고서 무無무無하고 의심하고 있으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됩니다. 내 마음을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내 본래생명자리 본래생명자리는 바로 불성자리 아닙니까.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 화두를 들면 훌륭한 화두공안선이 되는 것이고,
염불도 내 몸이나 내 마음이나 모두가 본래로 부처다, 또는 일체존재가 다 똑같이 한결로 다 부처님 생명 하나 뿐이다, 이렇게 해서 차별분별을 떠나서 나무아미타불 하면 바로 훌륭한 염불선이 됩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밖으로 관세음보살을 구하지 않고서 우주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 우주에 가득차 있는 부처님의 그런 자비 지혜를 안 떠나고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외이면 그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참선參禪이 됩니다.
그러니깐 모두가 다 그래요. 가령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때는 구태여 일부러 부처님이라고 이름을 고쳐서 할 필요가 없이 '오! 주여 하나님이시여'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라는 개념자체가 우주의 본래면목을 의미하고 참다운 진리를 의미할 때는 그것도 훌륭한 참선입니다. 우리가 꼭 참선은 불교에만 있고 다른데는 없다 우리가 이렇게 한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어디까지나 진리 일원론一元論, 불성 일원론, 일원적인 모두가, 이렇게 쏠려가고 저렇게 쏠려가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원적인 진리일원론에 입각해야 이른바 부처님 뜻이 되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 마음도 빨리 모아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삼동결제三冬結制가 며칠 임박해 있어서, 선방에서는 비구선방이나 비구니선방이나 공부할려고 부단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몸도 다스리고 준비를 합니다만, 우리 재가불자님들도, 우리가 공부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방법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재가불자님들도 내내야 최고 지상의 목적인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지상명령입니다. 아무때 되어도 부처가 되어야 됩니다. 부처가 안 되면 그때는 다시 또 사람으로 왔다가, 사람 가운데도 또 잘못 살면 다른 동물로 갔다가 말입니다. 또는 더 나쁘게 살면 그때는 지옥도 가고, 이렇게 뱅뱅도는 것이 우리 중생놀음 아닙니까. 우리가 중생놀음은 가급적이면 한 발 두 발 이상 물러나야 됩니다.
천상도 삼계 28천이라, 욕계欲界 6천상, 또 색계色界 18천 무색계無色界 4천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합하면 천상도 28천이 있습니다. 28천도 업 따라서 업이 무거우면 그때는 아래 층에 가 있고 업이 가벼우면 차근차근 그때는 높은 천상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천상 가운데도 욕계 천상도 미처 못 가고 지금 사람의 경계에 여가(여기)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제일 좋은데다, 이렇게 대저 맞추는 사람도 있고 자기 아내도 있고, 자기 남편도 있고 재산도 있고 자기 좋은 아파트도 있고 이래놓으면 거기에 집착할 수가 있겠지요 허나 그런 것은 별로 자랑거리가 못되어요.
천상이라는 것은 훨썩 더 그 신묘한 음악도 저절로 우러나오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광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천상에 높은 천상에 올라갈수록 광명은 더욱더 빛납니다. 그러기에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것은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극락세계 이름이 광명정토이어요. 산이나 냇이나 모두가 하여튼 찬란스러운 광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리 인간이 사는 것이 지지리도 못나서 있는 것이 별로 좋은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들도 사바세계娑婆世界에다가 애착愛着을 집착을 두지 말으십시오. 다만 아들이나 딸이나 남편이나 동기로 생각하고 음식 함부로 자시지 말고 채식하고 적게 자시고 하면 몸도 마음도 훨썩 깨끗해지고 빛도 터지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제일 우리가 살기 좋은 법문입니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이래야 성불도 빨리 되고 그와 동시에 다른 몹쓸병이 덜 생긴다 말입니다. 얼마나 지금 무서운 세상입니까. 조금.. 살다가 갖다가 누가 암에 걸려서 죽는다 말입니다. 암 같은 것도 그런 것도 역시 다 원인이 있습니다. 성을 많이 낸단던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을 못 가져서 물질에 얽매인다 말입니다.
마음을 틀어버리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일체가 유심조라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마음뿐이고,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유물론자 아닙니까. 우리 불교인들은 유물론唯物論 을 극복해야 됩니다. 물질은 원래 없는거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소박한 상식으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몸도 있고 내 남편 몸도 있고 금도 있고 은도 있고, 내 패물도 있고 이런 것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마따나 같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성불의 동지, 성불의 길동무로 알고서 우리가 제일 쉬운 공부, 제일 쉽고도 빠른 공부가 염불念佛공부입니다. 그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염불은 차원이 낮은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것이지, 화두공안도 의심하고 또 무슨 다른 명상도 하고 이래야 차원이 높지 않은가 그렇지가 않아요. 그 순수한 순선純禪시대의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까지도.. 우리가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천착을 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분들이 모두가 다 염불선念佛禪이어요.
염불念佛은 무엇입니까. 생각 염念자 부처 불佛자. 부처는 무엇입니까. 부처를 생각한다는 것은 부처는 내 본래면목이고 모든 존재의 근원이 부처아닙니까. 모든 존재의 근원이 부처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가 부처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도 본래로 부처고 본래부처를 갖다가 또 동시에 같은 우주에 충만한 부처를 생각해서 우리 목적도 내내야 성불 아닙니까. 부처가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염불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영생의 영원히 죽지않는 우리 생명의 본체이니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그래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 수壽자를 넣어서 무량수라, 그 아미타불의 생명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자체란 뜻으로 해서 무량수불입니다. 또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고 그래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어요. 그 무량수경無量壽經(제2절 미타성불과 극락정토의 장엄)에 보면 아미타불의 별명이 한도 끝도 없다고 그래서 무변광불無邊光佛 청정해서 조금도 오염이 안 된다고 그래서 청정광불淸淨光佛 그 광명소리가 한도 끝도 없어요. 모두가 다. (십이광불十二光佛) 우리가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방편을 그렇게 참 감사하게 감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 생각을 이렇게 하고 있으니깐 그와 같이 그런 무명심無明心을 없애고 밝은 쪽으로 성불쪽으로 우리를 이끌려고 그런 방편을 다 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사실 모든 수행법이 그 가운데가 다 들어 있어요. 수능엄경首楞嚴經(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에도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憶佛念佛이라, 만약 중생의 마음에 부처를 생각하고 또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간다고 생각할 때는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금생이나 내생에 결정코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요새 세상이 하도 그냥 험악하고 여러가지 혼란스러운 것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텔레비전도 안 보고 신문도 안 봅니다만, 어디 호텔이나 가서 어떤 경우에 누가 돌려서 더러 텔레비전 같은 것을 얼핏 보는 수가 있어요. 참 그야말로 딱한 일입니다. 우리네 어린애들이나 젊은친구들이 저걸 보고서 마음이 어떻게 될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란 이런 정보의 홍수 가운데에 살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정보의 홍수 가운데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꼭 철저한 가장 정확하고도, 또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수행방법으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 수가 없어요. 참다운 삼매가 들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삼매에 들려면) 우리 마음이 한가지에다가 오랫동안 모아 있어야 됩니다. 일념一念으로 해서 마음이 통일되어 있어야 우리 업장을 녹이고 우리가 이른바 성불成佛도 하고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할 것인데 이 정보의 홍수라는 것은 자꾸만 우리 관심만 끌어간다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가운데서 현대사회에서 바로 산다는 것이 쉽지가 않고, 우리네 사랑하는 자녀간들을 바르게 키운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모범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철저해서 아까 말씀마따나 재가불자님들이 선방에서 오래 정진을 못 하신다 하더라도 집안에서 다만 조석朝夕으로 1시간씩이라도 꼭 앉으셔서 우리 마음을 부처님한테 모으셔야 됩니다. 그 생활이 가장 행복스러운 생활이고 또는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내려온 우리 업장業障을 녹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 해서 모든 그런 선신善神들, 우리 주변에는 나쁜 악신惡神도 많이 있고 선신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런 선신들이 그 기운 따라서 우리 주변에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나쁜 그런 이른바 악질적인 나쁜 신들은 우리한테 접근을 또 못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물질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 납득을 못 합니다. 그러나 우주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부처님의 기운 정신 기운으로 우주가 꽉 차 있는 것이고, 사실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우리의 하나의 심성心性이고, 마음이고 우리 영혼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이것은 없습니다. 물질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물질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현대물리학도 증명을 합니다. 따라서 지금 현대정밀물리학도 물질이 없고 다 있는 것은 결국은 다 알 수 없는 순수한 생명뿐이다. 이런 것이어요.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1941)은 현대 프랑스에서 유명한 철학자고 그럽니다. 베르그손도 역시 순수 지속이라, 우주에는 순수한 생명만 지속이 되어 있어요.
우리 중생이 보지를 못하고 상식이나 소박한 생각으로 보는 것이니깐 물질이 있고 내 몸뚱아리가 있고, 그와 같이 우리가 고집합니다만 우리가 바로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사실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건강한 그러한 비결이 됩니다.
부처님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하고 또는 우리를 영생의 해탈解脫로 인도하는 그러한 생명자체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念만 해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업장이 시시각각으로 끊어지고, 동시에 우리 건강으로 보나 우리 집안으로 보나 또는 모든 선신들이 자기를 돕는다는 그런 가호加護쪽으로 보나 최상의 생활입니다.
올 겨울에 부지런히 공부를 하셔서, 올 겨울에 틀림없이 견성오도見性悟道를 다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정도는 가 두셔야 또 빨리 성불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20021120 광륜사 동안거 결제법회 청화큰스님 법문
첫댓글 기존 텍스트가 없는 법문으로 유튜브 영상법문 작업으로 녹취를 하였습니다.
자막본 영상은 아침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근념하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