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영봉 산행기
날씨를 확인하며 다시 북한산 산행에 나섰다. 어제 오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제는 지인을 만나러 이천 신둔도예촌을 다녀왔다. 가보니 새로 지은 200호 정도의 도예촌이 형성되어 있있다. 그런데 그곳은 과거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쌀이 생산된 곳이라고 했다. 말을 들으며 하필 그런 곳을 개발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의 고향이 그랬던 것처럼 전국에 자연이 개발로 사라지는 곳이 많다. 북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개발로 변화될 염려를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산우이역에 하차해 우이천을 건너 포장길로 들어섰다. 우측에는 계곡 따라 늘어선 음식점 들이 보였다. 거기서 송추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 우이령이다. 평평한 흙길을 가다 12시 27분 용덕사 표지판을 보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육모정을 지나 영봉으로 오르는 코스이다. 이쪽에서도 여러 차례 올라갔던 곳이라 가는 길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불수사도북 종주 때도 이 길을 지났다.
잠시 후 광덕사 담장 옆을 지났다. 철조망 옆을 지나다 보니 계곡 옆으로 바듯한 터에 놓인 큰 한옥이 보였다. 광덕사를 지나 완연한 산길을 올라갔다. 길에 눈이 쌓였지만 아이젠은 차지 않은 채 조심조심 올라갔다. 이리저리 에두르며 길을 올라가다보니 전에 보았던 큰 바위가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르는 것이 퍽 오랜만이지만 그처럼 아는 지형이 이정표처럼 드문드문 눈에 띠었다. 길이 멀지만 영봉을 오를 때는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거쳐 가지 않고 늘 이 길을 택했다.
오르막길을 묵묵히 올라가 12시 56분 육모정 고개에 도착했다. 정자 이름은 있지만 건물은 세워져 있지 않다. 내가 처음 다닐 때부터 없었는데 예전에는 육모정이 있었을 것 같다. 옆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니 지나온 길과 영봉까지 가야할 길의 거리가 각각 1.3km였다. 거기서 뒤를 돌아보니 상장능선이 차단목에 막혀 있었다. 그렇게 막아 논지가 오래 되었는데 언제 개방을 할지 알수가 없다.
예전에 그 안으로 조금 들어가 북한산 정상 풍경을 그리다가 해가 저물 무렵 아예 송추 쪽으로 종주해 넘어간 적이 있었다. 상장능선은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 북동쪽에 외엽처럼 멀리 감싸고 있는데 예상보다 거리가 멀고 암릉길이 험했다. 더욱이 길이 잘 눈에 띠지 않아서 난감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 무렵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종주 등을 하며 산을 많이 다니던 때라 머뭇거림이 없었다.
상장능선을 뒤로하고 우이능선을 따라 영봉으로 향했다. 오늘은 영봉에서 보이는 북한산 정상을 그리려고 이 길을 택했다. 육모정 고개에서 영봉을 가려면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그 봉우리들은 자체 경관은 특별할 것이 없지만 뒤돌아 보이는 풍광이 좋다. 상장능선과 도봉산 전경이 훤칠하게 보인다.
가는 도중 몇 번 급경사진 암릉을 지났다. 아이젠을 차지 않은채 가다 보니 그런 곳을 지날때는 더 조심하게 되었다. 아이젠을 차고 걸으면 발바닥에 이물감이 생기고 바위에 긁히는 느낌이 전달되어서 웬만하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며 걸으려고 한다. 더욱이 아이젠을 찬채로 눈 없는 흙길을 걷게 되면 길이 패여나가 자연이 훼손된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군 겨울철에는 시야가 막힘없이 트여나가서 잎이 무성한 계절에 대할 수 없던 시원한 눈 멋을 안겨준다. 그리고 싸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산세의 구조와 지형도 낱낱이 드러나서 산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험한 암릉길이 많은 북한산에서 눈길을 지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처럼 겨울산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다.
길 주변의 나무에 떨궈지지 않은 나뭇잎이 앙상히 달려 바람을 맞고 있었다. 단풍잎 같았다. 미라처럼 바짝 매마른채로 겨울을 나는 그 잎들은 때로 추상화같은 조형적인 맵시가 느껴진다.
잠시 후 영봉을 앞두고 막바지 고개에 올랐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육모정 고개에서 가까운 이웃처럼 보이던 도봉산이 멀리 보였다. 그리고 산세가 깊게 느껴졌다. 경사가 급한 암릉을 지나다 보니 위쪽에서 한 분이 내려와 옆으로 지나갔다. 뒤돌아보니 인수봉 안부 일선사에 계신 얼굴을 아는 스님이어서 인사를 했다. 전에 도선사 주차장에서 하루재로 오르는 도중 그 분이 많은 짐을 지고 오르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나도 화판을 들고 오르던 중에 인사를 나누어 그 분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택견의 고수라는 예기를 들었었다.
1시 38분 영봉에 도착했다. 앞쪽 정상부가 훤히 트여 바라보였다. 그 풍광에서 큰 산세의 위용이 느껴졌다. 여기도 북한산에서 손꼽히는 경관가운데 한곳이다. 오른쪽 바로 위쪽 정상으로 가서 사진을 찍은 다음 다시 내려와 그림을 그리려고 앞이 잘 보이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판에 종이를 붙이는 사이 젊은 여성분이 그 바위에 올라와 사진을 찍었다. 내가 여기서 그림을 그리려 한다고 하니 반가워하며 자신도 회화 전공자라고 했다. 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 하자 찍어주고 나서 자신도 찍어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그림을 그리다보니 육모정 쪽으로 하산하는 줄 알았던 그녀가 바로 위쪽의 정상을 갔다 내려오면서 그림을 보다 “그 새 많이 그렸네요” 하면서 백운대 정상으로 향했다. 걸음에 자신감이 느껴졌지만 눈길이라 염려가 되었다.
앞에 보이는 풍광이 거대한데다 그림의 주 소재인 인수봉의 바위결 인상을 살리기 위해 신경을 쓰다보니 평소보다 그리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올라올때는 맑고 온화한 날씨였는데 시간이 지나는 동안 흐리고 기온이 떨어져서 옷을 껴입는데도 오래 앉아 있자니 추위가 몰려왔다. 한 남자분이 지나다 추워보이는지 핫팩을 쓰겠느냐고 물었지만 사양을 했다.
한참 지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인수봉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림을 마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상을 가볼 생각이었는데 흐리고 기온이 많이 내려가서 여의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4시 50분 하산을 시작해 일단 깔딱고개로 불리는 하루재로 내려섰다. 도선사쪽에서 백운대를 오를 때 늘 지나던 고개이다.
하루재에 도착해 백운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도선사 방향으로 내려섰다. 아까 만난 여성분이 잘 내려가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야 어느 곳에서건 늦어도 내려갈 수 있지만 북한산을 많이 다니지 않은 사람은 험한 눈길을 지나기가 쉽지 않다.
산길 종착지점을 지나 도선사 주차장으로 나오니 버스가 한대 서 있었다. 도선사에서 신도들을 위해 운행하는 차이다. 그 버스를 타고 북한산우이역 근처로 내려왔다. 차에서 내려 돌아보니 다시 북한산 정상부가 멀리 올려 보였다. 내려오면서 그 모습을 그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금새 어두워져서 전철을 타고 귀가 했다.
2025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