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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월 4일(水) 立春 (음력 1월 10일)
[1989년] 재야운동가 함석헌씨 별세
← 함석헌 선생.
종교인이자 재야 민권운동가인 함석헌 옹이 1989년 2월 4일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함옹은 우리시대 대사상가였으며, 재야로 호칭되는 민권운동그룹의 상징이었다. 길고 흰 수염과 백발, 두루마기-고무신으로 표상되는 함옹의 외모는 인권-평화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정열, 탁월한 문장력-웅변술과 함께 그에게서 이 시대의 대표적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느끼게 했다.
함옹은 고난과 굴절의 한국 근대사가 전개되기 시작한 1901년 3월,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거쳐 정주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본으로 유학해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일본에서는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 문하를 드나들며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모교인 오산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친구 김교신이 주재하던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훗날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게재)를 연재했다. 우리 역사를 고난과 구원과정으로 해석한 이 책은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42년 5월 ‘성서조선’의 필화 사건에 연루돼 1년간 복역했으며 광복 후 북한이 공산 치하에 들어가자 1947년 3월 월남했다. 1948년부터 서울 YMCA 강당에서 성서읽기 강좌를 개설한 함석헌은 1956년 장준하가 주재하는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사회활동의 전면에 부상했다. 그는 톨스토이에게선 보편적 휴머니즘을, H G 웰스에게선 역사적 낙관주의를, 간디에게선 비폭력 평화주의를 수혈받았다. 훗날 1950~60년대의 사상계에 실렸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한국 기독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의 명논설과 군정반대, 월남파병반대, 한일 굴욕외교반대, 삼선개헌 반대 등 끊임없는 저항운동은 모두 ‘자유인’의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
[1971년] 롤스로이스사(社) 파산
← 롤스로이스 운전수가 롤스로이스사(社)의 파산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를 읽고 있다.
영국 자동차 품질의 상징인 롤스로이스사(社)가 '커다란 국가적 비극'이란 정치적인 표현처럼 1971년 2월 4일 파산 선고를 받았다. 록히드 항공사의 새로운 트라이스타 여객기를 위한 제트엔진 개발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회사는 발표했다. 영국정부는 롤스로이스사의 제트엔진 사업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콩코드 초음속 정기 여객기를 위한 엔진의 개발을 포함한 거대한 국제적 계획와 국가 방위를 위한 것이라고 재빨리 발표했다.
이 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항공기 생산으로 자동차 부분은 롤스로이스사 총 매출액의 5%만을 차지하고 있어 파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자동차인 롤스로이스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롤스로이스사의 엔진은 영국의 군 및 상업용 항공기 대부분에 장착하고 있으며 롤스로이스사는 록히드사에 공급할 새로운 제트엔진 생산계약을 너무 낮은 가격으로 체결하여 몰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
[1789년] 미국 초대 대통령에 조지 워싱턴 선출
←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1789년 2월 4일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775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아메리카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뽑혔다. 그는 영국군과의 여러 차례 격전 끝에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 장군을 항복시켜 사실상 전쟁을 끝냈다. 1787년 그는 버지니아주 대표로 연방정부 헌법 제정을 위한 필라델피아 모임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제헌회의를 이끌면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으며, 결국 1789년 2월 4일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첫 내각의 국무장관에 토머스 제퍼슨, 재무장관에 알렉산더 해밀턴, 국방장관에 헨리 녹스, 법무장관에 에드먼드 랜돌프를 임명했다. 1792년 워싱턴은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제2대 대통령에 또다시 선출되었다./브리태니커
[1945년] 연합국, 얄타 회담 개최
← 루스벨트(1937)
1945년 2월 4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의 패배와 점령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최고 인민위원이 참석했다. 주요 회담결과로 독일 영토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점령하고, 독일의 군수산업은 폐쇄 또는 몰수하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얄타 협정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되었지만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브리태니커
[1906년]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출생
← 본회퍼
1906년 2월 4일 태어남 / 1945년 4월 9일 죽음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거든, 욕망과 지위에 의해 이리저리 끌리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워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하게 하고, 그대가 찾은 목표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는 이와 같은 훈련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 디트리히 본회퍼(1936)
본회퍼는 히틀러에 항거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다. 튀빙겐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베를린대학교에서 교회를 사회학적·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한 논문 <성도의 교제 Sanctorum Communio>(1930)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29년 바르셀로나에서 독일인 교회의 부목사로 일한 뒤 교환 학생으로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쌓았다. 1931년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대회에 참석했고 독일의 고조된 민족주의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컬 활동에 가담했다. 1935년부터 독일 고백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를 책임지고 경건 훈련을 지도하는 한편, 히틀러 정권에 저항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정권은 그에게서 교사 자격을 박탈했고, 후에는 강연과 집필을 금지했다. 1939년 유니온신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다시 독일로 돌아와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 1943년 본회퍼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국가사회주의가 붕괴하기 직전 처형당했다.
[1941년] 반체제 시인 김지하(金芝河) 출생
← 1970년 7월 담시 <오적> 사건 법정에서 시인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주간 김동성(왼쪽부터)씨가 재판을 받고 있다. 이 필화사건을 계기로 김지하씨는 국내외에 ‘반독재 저항시인’으로 떠오르는 한편, 박정희 정권의 표적으로 낙인찍혔다.
1941. 2. 4 전남 목포~.
1970년대 반체제문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본명은 영일(英一), '지하'는 필명이다.
원주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다닐 때 4·19혁명, 6·3사태 등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197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담시(譚詩) 〈오적 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다음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석방된 다음달에 다시 체포되었다. 전세계의 주목 속에 오랜 재판과정을 거쳐, 앞선 무기징역에 다시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6년간의 옥살이 끝에 정권이 바뀌자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뒤로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면서, 그리스도교사상·미륵사상·화엄사상·선불교·기(氣)철학 등의 여러 사상들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명사상을 펼치거나, 그에 따른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다. 시에서도 정치적 경향의 시보다는 주로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담시와 서정시를 쓰고 있다.
[1976년] 제12회 동계올림픽 개막(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제12회 동계 올림픽경기대회(The 12th Olympic Winter Games)는 1976년 2월 4일부터 15일까지 개최, 37개국에서 1,123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제9회 동계대회 개최지인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12년만에 다시 개최되었다. 원래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환경파괴를 우려하는 현지주민의 여론에 굴복하여 인스브루크로 변경되었다. 개회식에서는 2번째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여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2개의 성화대가 세워졌다. 참가선수의 25%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약품복용 규정을 까다롭게 조사했다. 이로 인해 소련의 한 동메달 리스트는 IOC에서 금하는 감기약 복용 사실이 드러나 동메달을 반환해야 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아이스하키팀은 전체 선수가 약을 복용한 것으로 간주되어 경기몰수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단 1개의 세계신기록도 나오지 않아 동계대회 무용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경기는 7개 종목, 37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는데, 서유럽 선수들이 스키 알펜 종목을 석권하고 동독이 썰매 종목에서 강세를 보인 반면, 나머지 종목에서는 모두 소련이 휩쓸었다.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아이스댄싱에서는 소련이 금·은메달을 획득했다. 서독의 R.미터마이어 선수는 스키 여자알펜 3종목을 모두 석권하여 3관왕이 되었고, 소련의 G.쿠라코바는 여자 크로스컨트리 릴레이에서 최종주자로 우승하여 스키 여자 노르딕 종목에서 첫 4관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남녀 선수 3명이 출전했으나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는데, 이영하 선수가 스피드 스케이팅 5,000m에서 11위를 차지하여 대회 참가 이후 입상권에 가장 근접한 기록을 남겼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13개의 소련이 차지했고, 동독(금메달 7개)·미국(3개)·노르웨이(3개)·서독(2개)이 그 뒤를 이었다. /naver
[1948년] 실론(스리랑카), 영국으로부터 독립
16세기부터는 유럽 열강의 침입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우선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해안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1602년에는 네덜란드인이 침입하여 포르투갈인을 몰아냈고, 1795년에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1815년에는 캔디에 근거를 둔 마지막 신할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 자본은 인도로부터 타밀족 노동자를 이주시켜 플랜테이션을 경영하였으며, 그 결과로 신할리와 타밀 민족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한편, 유적 발굴 등에 따른 불교 르네상스가 신할리족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인도의 민족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작용하여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도 민족해방운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1948년 2월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독립을 인정하였다. 독립 후에도 영국의 지배력은 상당히 남아 있었으며, 총독의 임명권도 영국 국왕이 보유하고 있었다. 1972년에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개칭하여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가 1978년에 현재의 국명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으로 바꾸었다. 1985년 수도가 이전되어 콜롬보 외에 정치적 역할을 하는 수도로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가 있다. /naver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정상 얄타회담 개최
← 얄타 회담 중 삼국(미국,소련,영국) 수뇌자
1945년 2월 4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의 패배와 점령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최고인민위원이 참석했다. 주요 회담 결과로 독일 영토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점령하고, 독일의 군수산업은 폐쇄 또는 몰수하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얄타 협정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되었지만,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브리태니커
[1938년] 히틀러, 전군통수권 장악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P.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스가 승리, 제1당이 되었고 1933년 1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2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억압하고 반대파에 대한 대탄압을 강행하였으며, 이어 총선거에서 승리한 뒤 의회에서 전권위임법을 성립시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듬해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리로 취임하였다. 1935년 베르사유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병역의무를 다시 도입하여 군비확장에 의한 실업극복에 성공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독일 민족 생존권수립의 정책을 폈는데 1935년 자르의 영유권 회복,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같은 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yahoo
[1906년] 미국의 천문학자 톰보(Tombaugh, Clyde W.) 출생
← Tombaugh compared his photographic plates using this blink comparator.
톰보 [Tombaugh, Clyde W., 1906.2.4~1997.1.17]
일리노이주(州) 스트리터 출생. 1929년 애리조나주 로웰천문대의 보조연구원으로 일했고, 1943년 애리조나주립대학 전임강사를 거쳐, 1946년 애버딘탄도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이어서 1955년 뉴멕시코주립대학 천문대연구원을 거쳐, 1961년 교수가 되었다. P.로웰의 추정자료를 토대로 하여 해왕성 궤도 밖의 행성을 탐사하던 중, 1930년 2월 사진관측을 통하여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명왕성이라 명명하였다. 그 밖에 여러 소행성과 은하들을 발견하였고, 외부은하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저서로 《지구의 소위성 탐사 The Search for Small Natural Earth Satellites》(1959) 《우주항공의학 강의 Lectures in Aerospace Medicine》(1960, 1961) 《해왕성 너머의 행성 탐사 The Trans-Neptunian Planet Search》(1961) 《명왕성 The Planet Pluto》(1980) 등이 있다. /naver
1902년 미국 비행가 린드버그 (Lindbergh, Charles A.)출생
← Charles Lindbergh with the Spirit of St. Louis 1927
1902. 2. 4 ~ 1974. 8. 26
1924∼1925년 텍사스 육군비행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26년 세인트루이스∼시카고 간의 우편항공기 조종사가 되었다. 1927년 5월 20∼21일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號)’를 타고, 뉴욕∼파리 간의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처음으로 성공, 소요시간 33시간 30분으로 오티그상(賞)을 수상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후 프랑스로 건너가, 생리학자 A.카렐과 협력하여 장기(臟器)를 몸 밖에서 산 채로 보존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와 카렐의 공저인 《장기배양(臟器培養):Culture of Organs》(1938)은 이 공동연구를 보고한 것이다. 그후 귀국하여, 1939년 육군성에 배속되었다. 1941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의 입장을 취해 해임당했으나, 미국 참전 후 민간에서 전쟁에 협력하고, 1954년 D.D.아이젠하워에 의하여 미국 예비 공군준장으로 임명되었다. /naver
[2007년] 발레리나 박세은, 로잔발레콩쿠르 그랑프리 차지
← 박세은이 스위스에서 보여준 고전 발레 '지젤' 중 한 장면.
발레리나 박세은(18.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예비학교)양이 4일(현지시각) 스위스에서 폐막한 로잔발레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지난해 USA발레콩쿠르(잭슨 콩쿠르)에서 금상 없는 은상을 받았던 박양은 이로써 세계 4대 발레콩쿠르(로잔, 잭슨, 불가리아 바르나, 모스크바) 중 두 봉우리를 정복한 최초의 한국 발레리나로 기록됐다./조선
[2007년] 제주에 '한국판 폼페이 유적'
지난 2006년 발굴됐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105 일대가 5,000여년 전 화산 폭발로 덮였던 ‘한국판 폼페이유적’임이 확인됐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은 4일 “하모리에서 1.5km 떨어진 송악산 화산 분출에 따라 하모리 일대를 1m 정도 덮은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화산 분출로 나오는 고체 물질들) 토양을 방사성 탄소연대측정한 결과, 약 5,200년 전에 화산이 폭발했음을 미국 ‘지오크(Geochron)연구실’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재단은 또 “화산쇄설물 바로 아래 층에는 신석기시대 토기 조각과 어패류 등 당시 신석기인들의 생활을 증명하는 유물과 식물 화석 등이 잘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분석 결과 ‘하모리 신석기인’들은 눈알고둥과 개울타리고둥, 명주고둥 등으로 조개탕을 끓여 먹었으며, 물고기는 능성어와 감성돔, 참돔을 즐긴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2002년] 전 KNCC 총무 김관석 목사 별세
1970∼80년대 우리 사회 민주화와 개신교 연합 운동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김관석 목사가 2002년 2월 4일 별세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김 목사는 영생중학교를 다닐 때 세례를 받았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권유로 동경신학교에 진학했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학도병에 징집돼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광복 후 한신대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에 편입했다. 졸업 후 은사인 김재준 목사를 모시고 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던 김 목사는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기독교서회에 참여하면서 개신교 연합운동에 종사하게 됐다.
1952∼54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후에는 기독교서회 주간으로 기독교 출판에 전념하게 됐다. 1968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로 선임됐다. 그는 격동의 시대였던 1970년대를 거치며 만 12년간 재임하면서 3선 개헌 반대, 유신헌법 철폐 운동 등을 이끌었다. 소탈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던 그는 정부의 압력 속에서도 개신교계와 재야를 연결하고 국제적인 지원을 끌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조선
[1977년] 국문학자 양주동 별세
자칭 ‘인간 국보 제1호’로 자처했던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가 1977년 2월 4일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학문과 재주, 익살과 술로 점철된 고달픈 삶을 마감했다.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였고, 수필가이자 재담가였다. 평생을 구두 한벌 허름한 옷으로 만족해하고, 신문구독료 방범비조차 갖가지 사유를 붙여 내지 않았던 구두쇠였지만, 민족적 자각에서 어문학 연구의 길로 들어선 이래 향가연구에 빼어난 업적을 남긴 불세출의 학자이자, 기인이었다.
양주동은 1903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황해도 장연의 누이댁에서 성장했다. 중동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양주동은 1937년 돌연 국학자로 변신해 ‘청구학총’ 제19호에 ‘향가의 해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본인 학자 오구라 신페이의 권위에 도전, 학계를 놀라게 했다. 오구라는 향가 해독이 전무하던 시절에 ‘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를 발표함으로써 국학계의 권위 있는 학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의 해독은 정확성과 문학적 감성, 논리의 완벽성에서 오구라의 그것을 압도했다.
양주동은 1942년 육당 최남선이 "앞으로 1백년 뒤에 남을 책은 오직 이 한 권 뿐이다"라고 극찬한 ‘조선고가연구’를 내고, 1946년 ‘여요전주’를 발간하며 최고의 국학자로서의 반열에 올라선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타고난 입심으로 재직중이던 동국대는 물론 여러 대학과 방송에서도 언제나 인기있는 재담가였다. /조선
[1974년] 미국 신문왕 허스트의 손녀 패트리샤 허스트 유괴
← Patricia Hearst from a Symbionese Liberation Army publicity photo.
미국의 신문왕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이자 신문재벌 랜돌프 허스트의 셋째 딸인 19살의 패트리샤가 1974년 2월 4일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한 아파트에서 미국의 과격 도시게릴라 단체 공생해방군(SLA)에게 납치됐다.
2월 12일 "캘리포니아주의 모든 빈민층에 1인당 70달러분의 식량을 지급하라"는 이들의 요구조건에 허스트가는 200만달러 규모의 빈민지원계획을 추진하면서 9만여개의 식량상자를 빈민들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4월 3일 "식량배급은 사기"라며 허스트가를 비난하는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트프가 SLA의 전투복을 입은 패트리샤의 사진과 함께 허스트가에 배달되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후 패트리샤는 SLA와 행동을 함께 하며 ‘타니아’라는 가명으로 샌프란시스코 은행강도에도 가담했다.
결국 그녀는 사건발생 1년 7개월이나 지난 1975년 9월19일에 체포됐지만, 법원은 은행강도사건에 대해서는 패트리샤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 아닌 것으로 판결, 21개월만 옥살이를 했다. /조선
[1969년] 아라파트 PLO 의장 취임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Arafat, Yasir, 1929~2004)가 PLO, 즉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스라엘과의 8일 전쟁에서 패한 뒤 산발적인 활동을 펼치던 팔레스타인 저항단체들은 이때부터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이후 PLO가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93년 9월에는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평화협정을 체결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6년 1월 대통령선거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됐고 2004년 11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YTN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과학기술분야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에 산업기술개발과 기술지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1966년 2월 4일 발족됐다. 이후 화학연구소, 해양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등 대부분의 정부출연 연구소가 KIST에서 분리돼 독립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파병의 대가로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미국 바텔연구소를 모델로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부는 해외에서 유학중이거나 자리를 잡고 있던 우리 과학자들을 유치, 당시 대학교수 월급의 세배를 지급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았고 박대통령도 불시에 KIST 연구원들을 방문해 사기를 북돋아줬다. /조선
[1913년]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 어머니' 로자 파크스(Parks, Rosa) 출생
← Rosa Parks riding a Montgomery, Ala., bus in December 1956, after the Supreme Court outlawed segregation on buses.
1913. 2. 4 ~ 2005. 10. 24
로자 리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1913년 2월 4일 ~ 2005년 10월 24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가이다. 이후 미국 의회에 의해 그녀는 "현대 민권 운동의 어머니"라 칭송되었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382일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아갔다. 이 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 민권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위키백과
그 밖에
1995년 조선일보,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전 개막
1995년 최희용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4년 일본, 자체 개발한 대형로켓 발사에 성공
1987년 과학기술원 윤한식-손태환 박사팀, 최강력고분자알로이섬유 세계 최초 개발
1987년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사망
1980년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 취임
1980년 경부고속전철 건설 발표
1976년 록히드 사건 발생
1975년 정부, 북한의 KBS-TV 전파방해 경고
1974년 문공부, 헌법 긴급조치 비난한 일본 아사히신문 수입허가 취소
1969년 헤이그주재 중국대리대사 미국 망명
1966년 일본 여객기 동경만에 추락, 133명 사망
1964년 키프러스 반미사건 발발
1958년 국무회의. 원자력원 설치안 의결
1957년 미국, 영국, 프랑스 통독문제 토의
192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황색인종 배척법 제정
1842년 덴마크의 비평가 조지 브란데스 출생
1688년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마리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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