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에서 현경이 소리치자 문 안쪽에 쭈그려 앉아있던 지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하지만…사람들을 만나고 싶지않아."
현경은 그런 지수를 이해하기가 힘든 눈치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너무 활발해서 조울증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는데 요즘 들어 지수는 부쩍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다. 심지어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냈던 죽마고우 현경조차 만나기를 꺼려했다. 이러니 현경이 이해 못하는 것도 당연할 따름이었다.
"야, 한지수! 안 나오면 우리 오빠한테 끌고 간다!"
”내가 미쳤어? 나가면…나가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수는 한참동안 망설여 현경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현경은 자기가 잘 만들어진 인형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인형은 움직이지를 못하니까.
"너 왜 그래? 일년 전에 머리 다친 부작용이 지금 나타나는 거냐?"
"그럴지도 모르지."
지수는 애매모호한 대답과 함께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문을 조금 열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현경은 문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현경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수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 지수는 당황해서 손을 뺐다.
"그런데 어, 어디 가는데."
"벌써 까먹었어? 오늘 Pc방에 일 나가는 날이야."
현경은 지수의 손을 다시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Pc방까지 가는 내내 지수는 현경에게 끌려갔다.
"네, 시, 십번으로 가세요."
지수가 더듬거리며 들어오는 손님에게 자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지수의 얼굴이 상기 된 걸로 봐선 부담이 큰 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으, 미치겠다. 왜 지수 너한테는 편한 거 시키고 나한테는 육체노동이야!"
현경은 음료수 박스를 두 개나 들고 지수에게 괜히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현경아, 그럼 나랑 바꿀래?"
"됐다. 그 가녀린 팔 부러질라."
현경은 장난스레 웃으며 음료수 캔을 자판기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지수는 차라리 무언가를 분주히 나르는 게 났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 지는 오래 였고 가슴이 자꾸만 뛰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또 한 손님이 들어왔다.
"후불, 인터넷."
"네, 삼번, 자리로 가세요."
그 20대 중반의 남자손님은 자리로 가지 않고 지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꽤 예쁘게 생겼네."
마우스를 쥔 지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수는 다시 한번 그 남자손님에게 자리를 말했으나 그 남자는 가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지수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미친 놈."
그리고 지수는 쓰러져버렸다. 현경이 놀라서 달려왔지만 지수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남자는 당황해서 Pc방을 급하게 나갔다. 현경은 Pc방을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에 가운데 손가락을 한번 펴 들어 보이고는 지수를 흔들었다.
"여긴 어디지?"
지수가 깬 곳은 병실이었다.
"우리오빠 병원이야. 니가 쓰러졌을 때 타이밍을 맞춰서 오빠가 들어왔었거든. 그때 오빠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면 여기 있을 리는 없지."
"뭐?!"
현경의 말에 천장만 멀뚱히 보던 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지수를 보고 깜짝 놀란 현경은 그녀를 다시 눕히려 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누워있는 게 좋아."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경이 반갑게 맞았다. 현경의 오빠, 현진은 현재 정신과병원을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 현진 이야.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도 돼. 하긴 뭐, 나이도 같은데 그냥 반말 막 해라. 그럼 어디 지수상태 좀 볼까?"
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지수는 조금 안심이 되는지 다시 누웠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해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니?"
"일주일 전부터."
"그래, 지수야. 왜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선생님 제 병명이 뭐지…요?"
존댓말은 영 내키지 않던지 지수는 어설프게 말끝에 ‘요’를 붙여가며 말했다. 현진은 지수의 물음에 뜸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음, 더 상담해봐야 알겠지만 내 생각에는 대인 공포증 같구나. 그리고 그냥 반말 써도 돼."
"네."
현진은 장난스레 얼굴을 찡그렸다. 왜 존대로 대답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시큰둥했다. 현진은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게 났다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현경은 지수 옆에서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한달 동안 치료를 해봤지만…”
현진은 말을 다하지 못했지만 지수는 현진이 하려는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모든 치료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지수는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진 적이 많으니까.
현진은 주머니를 뒤져 실이 달린 추를 꺼냈다.
"나도 이거 써본 적은 없어. 하지만 원인을 알아내야 할 것 같아서. 너와 상담하는 동안 원인이 될만한 구실거리를 찾지 못했거든.”
현진이 지수에게 시도하려 하는 것은 최면이었다. 지수는 약간 걱정되는 눈빛으로 추를 바라봤다. 추는 천천히 흔들렸다.
"자, 그럼 시작한다. 이 추에 정신을 집중하세요. 눈이 감기고 몸이 나른해져 옵니다."
추가 흔들렸다. 추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지수의 눈은 감기고 있었다. 결국 지수의 눈은 완전히 닫혔다.
"자, 이제 당신의 과거로 갑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을 꺼내세요.”
지수는 먼지바람이 날리는 운동장에 서있었다. 운동장 구석에는 왠 여자아이 한명이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지수는 아이를 달래주려 했지만 보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먼지바람이 잠잠해지자 여자아이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여자아이는…지수 바로 본인이었다. 지수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지수는 왜 우냐고 묻고 싶었다.
그 순간 어린지수 또래의 아이들 대 여섯 명이 나타났다.
“야, 청소 다 했어?”
어린지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게 죽으려고! 빨리 하란 말이야!”
남자아이 하나가 어린지수의 손을 발로 밟았다. 여자아이 하나는 어린지수를 마구 꼬집었다. 하지만 어린지수는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어린지수를 바라보는 지수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배경이 교실로 바뀌었다.
교실 안에는 선생님과 어린지수 단둘만 있었다. 아니, 보이지는 않지만 지수까지 포함하면 셋이었다.
“지수는 참 귀엽구나.”
어린지수의 담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어린지수의 표정은 불쾌해보였다. 담임은 어린지수에게 인형을 하나 주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내팽개쳤다. 담임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렸다.
“어차피 너와 나 단 둘이야!”
담임은 어린지수에게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 들린 소리는 어린지수의 비명소리가 아닌 난데없는 쾅 소리였다. 지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녀의 눈 앞에는…머리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담임과 모서리에 피가 묻어있는 교탁, 그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린지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지수야, 지수야!”
지수의 귀에 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지수야, 괜찮니? 역시 무리였나 보구나. 누워서 좀 쉬렴.”
지수는 그런 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현진은 자기얼굴에 뭐가 묻었나 생각하며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으나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지수야?”
“당신, 현경이와 원래는 나이가 같다고 했지? 쌍둥이라서 현경이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 뿐이라고 했지?”
현진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의 말에는 한기가 묻어있었다.
“그럼…됐어.”
지수는 순식간에 현진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현진은 꼼짝도 못하고 목을 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목을 조르는 지수의 힘은 비정상이라 해도 될 만큼 셌다.
“난 아직도 날 괴롭혔던 이들 다 기억해. 일년 전에 교통사고 탓에 기억을 잃어버렸지. 그런데 이번에 그 기억을 다 찾은 거야. 우리 반 애들은 날 심심할 때마다 괴롭혔어. 선생님이라는 작자는 무관심의 극치였고. 그 작자가 관심 있는 거야 날 어떻게 하면 먹을까 정도 였겠지.”
현진은 발버둥을 쳤지만 비정상적인 그녀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현진의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지수의 말이 들어왔다.
“난 선생님을 죽인 후 반 애들도 차례차례 죽였어. 그런데 못 죽인 녀석이 단 한명 있었지. 3학년 8반 30번…이 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