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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하나님(롬 15:10-13)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년 전보다, 아니, 1년 전보다, 세상은 놀랍게 발전되어 가는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낙심과 불안이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낙심되고 불안했으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외쳤던 것일까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 중에, 얼굴을 스치는 총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든 안전하며, 누구랑 있든 안전할까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로 인하여, 희망과 웃음보다는 절망과 눈물로, 아픔과 고통을 달래는 사람들이 많아져만 갑니다.
얼마 전, 서울 시청 앞에서 일어난 큰 사건으로 인하여, 요즈음은 1층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창가를 피하고, 안쪽에 자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길가 창가에 앉는다고 하는 것이 불안해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낙심과 불안한 상태에 있었지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잠시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 것들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서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율법의 파수자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열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율법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중압감에 눌리게 되어, 마음에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대한 열심이 커져갈수록, 마음속의 공허함도 함께 커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자신을 짓누르던 율법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이전에 자신이 자랑하던 세상의 지위와 권력과 물질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길 수가 있었습니다. 자유인이 된 그는 예수님을 따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리고, 능력을 얻고,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 기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미래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정보통신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며, 여러 가지 희망 섞인 말들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더욱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이 더욱 깊어지고, 파괴와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문제들을 보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인류의 희망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문제들을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첩첩산중입니다. 그 불가능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회복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악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막힌 담을 헐고, 원수된 자들을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사람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소망이 있다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구를 찾습니까? 낙심되고 불안할 때, 무엇을 의지합니까? 괴로울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소망을 둘 때, 그 어떤 다른 것들이, 재물이든지, 세상의 권력이든지,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빼앗아 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쉼과 평안을 주기보다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더 불안하고 초조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욥은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욥 31:24-25,28)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금이나 순금이나, 재물의 풍부함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라는 욥의 고백입니다.
하루아침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그가 가졌던 그 많던 재물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서 우리의 소망을 찾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의 삶과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땅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세상의 소망이 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시며, 하나님께서는 하신 약속을 진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고, 자비하시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에게 우리는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곳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오직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쁨과 평강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라고 말하면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한 기쁨입니다. 나의 죄가 사해지고,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러한 기쁨과 평강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어떤 일들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그가 가진 기쁨과 평화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아침에 이러한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마스턴은 3천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94%는 “밝은 미래를 기다리면서, 현재를 참으며 살아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리 멀지 않는 시기에, “뭔가 좋은 일”이 그들의 삶에서 벌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힘들 때, 미래의 소망이, 현실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도 합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삶의 활기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바라볼 소망의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를 소망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혹은 지식을, 혹은 명예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갑니까?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온갖 나쁜 짓은 뭔가를 가진 자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벌이는 추악한 짓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가지고자 원하는 것은 없을지라도, 오직 한 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소망이 예수님인 것이 분명하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평안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 참된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로마서 15:4절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성경의 위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사라져가고,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경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소망을 얻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얻은 소망은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얻은 소망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고 기록한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여기서 “견고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성취하다. 확증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하고 분명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거짓과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소망의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브라함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가장 단순한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고, “아브라함아! 네가 저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있느냐? 너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밤만 되면, 아브라함은 밖으로 나가,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두운 밤에, 빛을 내는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망을 되새겨 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슈바이쩌는 “나의 삶의 승리의 비결은 전 생애를 통해서 소망을 잃지 않은 데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어떤 일이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실망하고, 체념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소망을 잃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내 힘은 너무나도 약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더욱 잘 알게 되고, 더욱더 풍성한 소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날마다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소망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겨울 철새들은 수천 킬로, 수만 킬로의 먼 곳에서부터 날아옵니다. 우리나라에도 천수만 철새 도래지를 비롯해 여러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철새들은 자기 힘으로 날지 않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갑니다. 높은 하늘에 부는 기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새들은 기류에 몸을 맡기고, 한번 날개짓을 하면서, 수십 킬로를 날아갑니다. 기류를 이용하여, 먼 곳도 힘들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힘으로 역부족이고 버겁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전진할 수 있습니다. 힘든 일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절망이 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원하지 않는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된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시고,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소망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성경의 위로하심을 통하여,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심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소망이 더욱더 충만해지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그 어떤 거센 파도가 불어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