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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다섯째 주일)
무덤에서 생명으로
겔37:1~14; 롬8:6~11; 요11;25~27,38~44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소위 “마른 뼈 환상”입니다. 바빌론 포로로 가 있던 예언자 에스겔은 바빌론에서 하나의 환상을 봅니다. 그것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힘줄이 뻗고 살이 입히고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마침내 주님께서 보내신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 다시 살아나, 엄청나게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이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절 가까이서 때때로 이 본문을 보게 되는데, 사실, 이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본문 몇 개를 꼽으라면 꼽힐 정도로, 그 이미지가 강력한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환상을 보고 난 에스겔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낼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라가 망해서 바빌론에게 끌려가 포로로 가 있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강력한 말씀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에도 이에 못지 않는 강력한 본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7가지 세메이온(이적) 가운데 마지막 세메이온이 나옵니다. 세메이온이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상징으로 보여주는 기적을 세메이온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세메이온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던 사건”이었다면, 이제 마지막 세메이온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인 오늘의 본문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한 말씀을 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손발이 천으로 감겨 있는 채로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두 이야기 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옮겨지는, 하나는 환상이고 또 하나는 기적 사건(세메이온)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삶 가운데에는 여러 차원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차원의 삶(생명)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육체의 죽음은 가장 일차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만 죽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육체가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혼과 영을 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차적인 기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상한다거나 약해진다고 할 때 정신과 마음까지도 상하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만일 육체가 죽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마음, 또 실체가 그렇게 분명히 잡히지 않는 혼과 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육체의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정신의 죽음, 마음의 죽음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정신의 죽음이나 마음의 죽음도 몸의 죽음 못지않게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 사실이지요.
오늘 에스겔의 환상은 정신적인 혹은 마음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혼과 영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망해서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지금부터 2천 4,5백년 전이니까, 이때만 해도 한 인간은 개인이나 개체보다는 속해있는 집단,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라고 하지요.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은 곧 망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닉짜르누 라누>인데, 직역하면, “우리자신에게서 끊겨졌다, 생명에서 잘려나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우리가 멸절되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게서 잘려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진 것, 본체에서 잘려나간 것도 죽음인 것이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까? 잘려나가지 않고 붙어있는 것입니까? 생명에 붙어 있나요? 그 생명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중에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계3:1~2)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보이는 몸”은 살아있지만, 우리의 “보이지 않는 몸”은 진정 살아있는가요?
사실 우리는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한 질문인 줄은 압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끌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몸의 생명은 너무나 분명해서 충분히 경험되지만,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자주 소홀해지기 일쑤고, 그러다가 어떤 증상이 드러나게 되면, 그때에야 마음을 쓰는 척하지요. 그러다 증상이 완화되면 다시 소홀하게 되고, 많은 경우 만성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잘 감지되지 않는 혼과 영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 즉 육신의 몸부터 정신과 마음의 몸, 또 혼과 영의 몸은 늘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육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가 있고, 정신과 마음의 몸이 보내는 신호가 있으며, 또 혼과 영의 몸이 보내는 신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통증으로 올 수가 있고, 피곤함과 무력감, 생기 없음으로 올 수도 있고, 무의미함과 공허감, 불안과 우울함, 혹은 어떤 중독증상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지금 가까이 다가온 문제들에 적절히 대처하라는 싸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들은, 그 증상을 빨리 없애려 하지 말고, 일어나는 일의 액면만 보지 말고, 표층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일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라고, 조언합니다.
오늘 에스겔이 본 환상은 분명히 겉에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하거나 결정짓지 않고 그 이면을 들여다 본 결과입니다. 그가 먼저 본 것은 하얗게 드러난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런 뼈들이 골짜기에 가득 널려 있었다는 것이 그가 본 절망이요 죽음입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그러나 에스겔은 거기서 모든 것을 결정짓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 뼈들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뼈들마저 생기를 불어넣어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에스겔은 그것을 강력한 환상으로 보았지만, 아마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기적적으로 마법처럼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의 회오리 앞에서 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용기, 그리고 그런 마른 뼈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인내,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주시는 성령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마른 뼈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오늘 에스겔의 본문은 우리가 진정 마음을 열고 보려고 하면, 우리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이 일이 에스겔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은 매시대마다 이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이런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비전, 이 환상은 지금 당장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버리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우리의 보는 눈을 바꾸어 낼 수는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비전, 이 환상의 눈으로 여러분 자신을 깊게 바라다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일터와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른 뼈를 직시해 보시고, 여러분이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망했다”라는 말을 하더라도, 여러분의 판단과 생각 넘어, 주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서 일하시는 놀라운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줄이 뻗고, 살이 입히고, 살갗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되는 비전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 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이 마음이 닿는 모든 곳에서 그런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비전이 우리의 의식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1963년 워싱턴 링컨 기념관 앞에서 I have a dream이라고 외쳤던 한 흑인의 외침이 오늘 흑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자녀와 우리의 미래의 출발선입니다.
우리가 오늘 또 보게 되는 살아남도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이 전하는 나사로의 살아남입니다. 요한복음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사건 자체, 죽은 몸의 소생 자체를 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몸의 살아남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의 전조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라버니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마르다에게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너무 교리적인 눈으로만 보지 맙시다. 그래서 이 말씀이 기독교를 믿어야 영원히 산다는 기독교의 “프로파간다”라고만 생각하지 맙시다. 그렇게 보기에는 이 말씀은 너무나 크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과 마음을 넘어, 우리의 혼과 영까지도, 아버지께로 왔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하는 우리의 원천,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본향이 우리의 바탕이며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바탕, 아버지를 보여주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동굴로 된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막아놓았던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신성한 빛이 캄캄한 동굴 속의 썩은 시체 위에 비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빛은 너무 강력해서 조그만 갈라진 틈 속으로도 들어가 비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썩고 냄새나는 죽은 것을 살려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에게 조그만 틈이 있다면 들어와 비칠 수 있습니다. 내 삶이 갈라지는 것이 두려워 나의 모든 틈을 돌로 막아 놓았다면, 오히려 그 뚫린 틈으로 그리스도의 빛이 비칠 수 있도록 그 장애물들을 치워놓아야 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혹[난관]은 영적 잉태가 될 수 있는데, 그래서 새로운 탄생과 신비적 재탄생으로 이끌 수 있다.”
마침내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자 죽었던 나사로가 천으로 온 몸이 감긴 채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고, 사망에서 나오고, 과거에서 나오고, 낮은 의식에서 나오너라! 이 외침은 “빛이 있으라” 하시던 하나님의 외침과 비슷합니다.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 모든 속박과 집착과 착각에서 풀어주어 참된 자유인이 되어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한 번에 깨달아 알기에는 너무 크고 깊습니다. 단지 우리 각자의 수준에서 알아듣게 되겠지요.
사실 부활이요 생명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바탕이시라는 비이원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엄청난 것이지만,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것을 그리고만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함정일 것입니다. 나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일 수 있도록 장애물 하나, 돌맹이 하나 치우는 것이 우리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정성과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돌맹이 하나 치우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마다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기억하고 힘입어, 많은 생각들을 놓아두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일, 그분을 지향하는 일, 이것이 돌맹이 하나 치우는 일이 됩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니, 살아계심을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기를 빕니다. 그런다면,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생명의 주 하나님, 오늘 우리의 죽어있는 자리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음을 더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