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오영자
내 앞을 천천히 가고 있는 차가 있다 마치 지팡이를 짚고 길을 더듬듯 천천히 가고 있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길속에 왕이 있는 것일까 차가 왕이 되는 것일까 차 속에 있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일까 왜 왕 자를 붙였을까
돈이면 모두가 좋아하는 세상에서 사장님과 사모님들은 자신을 피력하며 사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모두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뿐인가 보다
왕 자가 세상에 등장하면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왕 하느님도 우리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시겠다
- 시집『푸른 시절 안에 눕다』(시선사, 2011) .........................................................
인터넷에서 ‘초보운전 스티커의 좋은 예’라는 제목으로 떠도는 기발한 문구를 보았습니다. “할배가 운전하고 있습니다. 삼천리금수강산 무엇이 급하리…”부터 “3시간째 직진 중”이라는 웃음이 빵 터지게 하는 스티커. “왕초보, 밥하고 나왔어요”라며 자신이 주부임을 알리는 내용, “답답하시죠? 전 환장하겠습니다”며 좌불안석 초보의 심정을 고하는 문구, “좌우 백미러 전혀 안 봄! R아서 P하세요!” “마음은 터보! 운전은 초보! 건들면 람보!! 알아서 피해가쇼” “열받으면 후진합니다”라는 다소 위협적인 것까지 다양한 문구가 포함되어있더군요.
시인은 초보 중에서도 초보라는 의미로 쓰이는 ‘왕초보’라는 말의 ‘왕’자에 새삼 의구심의 제동이 걸렸습니다. ‘왜 왕 자를 붙였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왕(王)자를 유별시리 좋아하는 무의식적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양이 크다는 뜻으로 붙여진 왕버들, 왕자귀나무, 왕머루, 왕팽나무, 왕대 등의 식물 이름은 납득이 간다 치고 ‘왕짜증’이니 ‘왕따’니 하는 낱말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왕따’는 한자 접두어 ‘왕’과 ‘따’가 결합한 말로 ‘심한 따돌림 혹은 그 대상’이란 뜻이겠는데요. 최근 이런 식으로 붙인 은어나 속어를 부쩍 자주 듣습니다.
‘자신을 피력하며 사는 시대에 살고’ ‘모두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왕의 난립현상을 빚게 한 걸까요. ‘왕초’ ‘왕수석’ ‘왕회장’은 못되어도 누구라도 ‘왕고모’ ‘왕언니’ ‘왕고참’의 칭호 하나쯤은 얻어걸릴 만하고요,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다들 ‘왕초보’는 거치니 말입니다. ‘왕 자가 세상에 등장하면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왕’입니다. 실제로 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거나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왕이란 호칭을 붙이지만, ‘왕’ 혹은 ‘여왕’은 마구 갖다 붙일 수 있는 칭호는 아니지요. '끝판 여왕'은 좀 그렇고, 김연아 선수의 ‘피겨여왕’만큼 어색하지 않고 손색없는 헌사는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김연아도 ‘왕초보’시절이 있긴 있었겠지요.
권순진
How Can I Keep From Singing / Enya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