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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에서의 창의적 선교와 그 돌파
- 초이발산을 중심으로 -
발제자: 연경남선교사(GMS)
■ 머리말
창의적 선교란1) 종교비자를 주지 않는 지역에 있는 선교사의 사역 혹은 종교비자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이 충족 안되서 종교비자를 받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의적으로 종교비자를 안받고 다른 종류의 비자를 받은 선교사가 시도하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모든 선교 사역을 의미한다.
우리 부부는 2010년에 몽골 울란바타르에 들어와 몽골 교육 NGO에서 한국어 교사 비자를 받고 2013년에 동몽골 초이발산으로 이주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몽골의 경우 종교비자가 없는 선교사는 현지 실정법상 전도, 설교, 목회 등 종교행위를 전면에 나서서 할 수 없다. 만일 비자 목적 외에 이런 행위를 전면에서 하다가 공공기관에 적발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밀고나 투서를 당하면 이민청의 조사를 받고 범법 행위자가 되어 권고추방 혹은 강제 추방을 당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지역 초이발산의 경우, 선교사 비자 즉, 종교 비자를 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예컨대 시내 중심가에 한국의 이단인 "구원파" 교회가 크게 서있고 한국에서 온 사역자부부가 공개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고 있으며 몰몬교 선교사들이 정복을 갖추어 입고 짝을 지어 전도하는 것을 보면 종교비자를 안준다는 것도 절대 불가한 일이 아닌 듯 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후진국이 그렇듯 많은 돈을 들여서 뒷거래를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결국 지역의 담당 공무원이나 기관장들과 결탁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현지인을 부정부패의 길로 내모는 범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칫하면 도리어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접근해야한다.
아무튼 선교하는데 있어서 종교비자가 없다고 낙심하고 포기할 일이 아니다. 모든 법에는 돌파할 틈새가 있고 관용의 여지가 없지 않다. 지역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하면 실정법을 준수하면서도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존재한다.
초이발산의 경우, 외국인이 스스로 믿는 종교의 자유는 보장해준다.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선교하는 일이 아닌 한 종교 예식 참여는 가능하다. 따라서 종교비자가 없더라도 주일에 현지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교회에 가서 주도적으로 목회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밖에서 전도를 하면 안되지만 교인으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기 때문에 선교사는 바로 이 틈새를 잘 활용해야 한다.
선교사는 선교를 하는 게 목적이지 자신이 주도적으로 목회를 하거나 설교를 하는 게 주목적은 아니다. 창의적 접근지역의 선교사는 이런 의식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만일 선교사가 교회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목회를 하거나 설교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분이라면 창의적 접근지역의 선교사로 있을게 아니라 종교비자를 받는 자유로운 국가나 자유로운 지역으로 옮겨서 선교해야 한다.
우리 부부가 종교비자가 아닌 한국어 선생 비자를 가지고 초이발산에서 존재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내용을 나름 “창의적 선교”라고 칭하며 그 시작과 과정과 앞으로의 꿈을 간략하게나마 함께 나누고자 한다.
■ 들어가는 말
1. 초이발산 소개
초이발산은 울란바타르에서 약 670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몽골의 21개의 도(道) 가운데 하나인 더르너드(DORNOD)도의 도청소재지이다. 더르너드 도는 몽골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도로서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동쪽으로는 중국 내몽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경도시이다. 초이발산 중심에서 러시아 국경까지는 약250킬로미터이고, 중국 국경까지는 약130킬로미터 이다. 러시아와 중국의 두 나라와 국경지역이다 보니 방첩활동이 매우 강한 지역으로서 외국인 관리청이 별도로 존재하여 상시 통제를 하고 있고 외국인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주의와 경계를 많이 하는 지역이다.
더르너드 도의 인구는 약 8만명이고 도청소재지인 초이발산의 인구는 약4만명이다. 더르너드 도의 면적은 대한민국 남한의 면적보다 조금 넓다. 우리 대한민국 5천만명이 사는 영토에 더르너드 도는 8만명이 살고 있으니 1사람이 사용하는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상상이 잘 안된다. 그리고 외각으로 나가면 수 십 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거의 사람이 보이질 않는 광활한 땅이다.
더르너드 도는 수도 울란바타르가 멀기 때문에 비교적 가까운 중국 내몽골로 물건들을 사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대부분의 물품들은 중국산이다.
2. 초이발산과 도내 교회들
초이발산 시내에는 5개의 복음적인 교회들이 있다. 대부분 장년 교인이 20명 ~ 50명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도 정부에서 교회 허가를 받은 교회는 1개 교회이다. 현지인 목사는 3명으로서 동부지역 타 도에 비하면 목사 숫자는 많은 편이다. 목사들이 맡고 있는 3개 교회외에 나머지 2개 교회중 1개교회는 신학을 하고 있는 전도사가 맡고 있고 1개 교회는 나이가 많은 노인부부가 맡고 있다.
초이발산 시 외에 기타 솜(우리나라의 면 정도의 마을) 에 있는 교회로는 볼강 솜에 교회 1개, 차강어워 솜에 교회1개, 바잉올 솜에 교회 1개, 바잉동 솜에 교회 1개, 다시발바르 솜에 교회 1개, 이렌차오 솜에 교회 1개 등 6개 솜에는 교회가 있다.
아직 교회가 없는 솜은 바양투멩, 초이발산 솜, 고론자르갈, 훌룬보이르, 세르겔렝, 마타드, 할흐걸 7개 솜이다.
3. 초이발산에서 창의적 선교의 당위성
종교비자가 없는 선교사는 직접적으로 선교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창의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창의적 접근지역의 선교사는 1차적인 신분이 비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에 1차적으로는 그 비자 목적에 부합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회기 때 순조롭게 비자가 연장되어 선교지에 계속 거주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선교사로서 그림자처럼 수행해야 할 종교적 임무가 있다. 다시 말해서 표면적으로는 비자 목적대로 활동을 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선교지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도록 각종 종교 일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나름 창의적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4. 초이발산에서의 창의적 선교 방법
1.1 한국어 교실 개설
우리 내외는 한국어 선생 비자를 받아서 2013년에 초이발산에 들어왔다. 비자는 울란바타르에서 받아서 초이발산으로 파송하여 초이발산에 개인 한국어 오피스를 개설하는 형식이다. 한국어 오피스는 한동안 렌트해서 사용하다가 파송 노회에서 아파트 작은 평수를 구입해주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초이발산에는 외국인 이민청이 별도로 있어서 울란바타르에서 비자를 받았어도 다시 이곳에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주해서 처음 심사를 받을 때 유의할 일이 있다. 초이발산 내 거주하는 현지인과 동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 때 가능하면 지역의 목사, 장로등 종교인들과 동행하지 않는 게 장기적인 면에서 좋다. 왜냐하면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교회 관련 종교인들을 아는 경우가 많고 그로인해 한국어 교사라는 신분을 이용한 기독교 선교사가 왔다고 하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기존에 친분을 쌓아둔 지역의 중견 공무원을 대동하여 이민청에 가서 심사를 받으니 한결 절차가 수월했다.
혹여 초이발산의 어느 학교와 연계해서 학교 한국어 선생으로서 사역을 할 수도 있지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일례로, 어느 해에 코이카 대원 한 분이 초이발산의 어느 학교에 와서 근무하다가 얼마 안되서 초이발산을 떠난 경우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중년의 그 분은 코이카 대원이지만 기독교인 이었다. 코이카는 종교와 관계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주중 일과중에는 전혀 종교활동을 안하고 그 대신 토요일과 주일 등 휴일에는 자유롭게 교회도 가고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학교 교장이 자기를 호출하더니 토요일과 주일에 무엇을 하고 어디를 방문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보고를 하라고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래야만 하느냐? 휴일에는 자유가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 학교에서 비자를 받고 있는 이상 외국인을 감독하는 게 자기 책임이기 때문에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전후좌우 상황 설명을 듣고 보니 만일 누구라도 초이발산의 한 학교에서 비자를 받으면서 틈틈이 선교사역을 병행하겠다는 생각은 실정법으로도 불가하고 현실적으로도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사실 이주 초기에 한 학교와 연계해서 한국어 교육을 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학교 교장을 만났더니 만나자 마자 대뜸 우리 학교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 학교 정문을 고쳐줄 수 있느냐? 컴퓨터 교실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 하고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해왔다. 우리부부는 할 수 없다고 하니까 코이카는 다 해주던데 당신들은 어느 단체인데 왜 못해주느냐고 해서 우리는 코이카 가 아니다. 라고 하고 그 자리를 나온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받은 교훈은 초이발산의 한 학교에 소속되어 사역하는 것보다 개인 오피스를 통해 사역하는 것이 선교사로서 더욱 운신의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이발산에서의 한글 교실은 매우 인기가 좋다.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학교 선생님들, 가정 주부들, 한국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위한 단기코스 회화반 등 관심 있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우리는 한국어 교실을 통해 수백명에게 초급과정을 가르쳐 내보냈다.
1.2 한국어 교실의 복음 전파 효과
한국어 교실을 통해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효과는 크지 않다. 한국어 수업 시간에 종교 교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한글 교육 교재를 통해서 “교회” “예수님” “구원” “믿음” “십자가” 등등의 단어들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복음전도 라고 말하긴 어렵다.
만일 수업 시간에 종교 이야기를 한다면 곧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모집도 안될뿐더러 추방의 사유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 숫자 공부를 할 때 60이라는 숫자의 발음이 예순이지만 발음상 예수라는 단어와 비슷하다보니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수업 시간에 전도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은 할 수 없지만 학생들과의 사귐과 친밀도가 깊어진다면 개인 혹은 소수의 학생들을 특별하게 집으로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는 접촉점이 될 수 는 있다
우리도 그러한 초대 방식을 통해서 어린이들과 청소년 몇 명에게 복음을 전한 경우가 있다.
사람들을 가정에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정기적으로 그런 모임을 갖는다든지 아니면 사적이 아니라 공적인 모임이 된다든지 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어 교실이 직접적 전도의 장이라고 주장하긴 어렵지만 선교사가 가르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한국어 교실을 통해 다각도로 전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1.3 한국어 교실을 교회로 옮겨 이동 교육
한국어 교실을 오피스에서만 하지 않고 토요일과 주일에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다. 토요일에는 어린이와 청소년 모임이 오전11시에 있기 때문에 성경 교육이 끝난 후 오후 2시부터 한국어 교육을 한다. 그리고 주일에는 예배 후에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한다.
이미 믿고 있는 어린이나 청소년 및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이 선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냥 단순한 외국어 교육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한국어로 인한 미래의 꿈,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준다는 면, 그로인해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 교회의 한국어 통역을 양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재 양성의 장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하는 한국어 교육이 교회를 돕고 인재를 키운다는 점에서 일면 선교적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초이발산 부근 인구 약 2,000명쯤 되는 한 무교회 마을에 교회를 세웠다. 한국의 한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세울 때도 역시 한국어 교실이 큰 역할을 했다. 수년전부터 전도를 해 오던 현지인 장로님부부가 약 10여명의 장년들을 모아서 셀 조직을 만들어 놓았는데 비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틈틈이 관리하던 마을이다. 우리 부부도 그 마을을 지나다니면서 수년간 기도한 곳이다. 장로님 부부를 만나게 되어 그 마을에 대한 비전을 나누며 방문의 횟수가 더욱 늘어났고 갈 때마다 장로님부부는 성경 교육을 했고 우리 부부는 한국어 교육을 했다. 작은 마을에 한국인 부부가 오가다 보니 마을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왜 이 마을에 오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현지인 장로님은 성경을 가르치고 우리들은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왔다고 하자 긍정적으로 호응을 받은 점들은 한국어 교육이 가진 대단한 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마을에 세워진 교회에서 한국어 교육을 할 때 시간이 되는 학교 선생님들이 한국어 수업에 참여했고 후에는 그 마을 학교에 1일 축구교실 혹은 1일 탁구 교실을 열어주어 교회가 그 마을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한국어 교육과 스포츠가 보이지 않는 큰 역할을 했다.
2.1 유소년 축구 클럽
유소년 축구 클럽은 우리 부부의 사회적 공신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한국어 교실은 개인 오피스로서 우리 부부의 사회적 공신력이나 관계망을 넓혀주기에 부족한 면이 있었다. 초이발산에서 우릴 만나는 사람들은 늘 묻는다. “어디에서 근무하고 무슨 일을 하냐고”
개인 오피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말하면, 큰 신뢰를 보이지 않고 어디서, 어떤 단체에서 왔으며 매월 월급은 어디서 받느냐고? 궁금한 게 해소되지 않아서인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는 사회적 공신력을 확보해주는 어떤 기관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초이발산 사회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스포츠위원회의 사회적 위상이 매우 높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라는 기관보다는 스포츠위원회의 기관이 우리의 활동을 더욱 원활하고 유연하게 해 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유소년 축구 클럽에서 일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문의했다.나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축구부에서 선수로 선발되어 전국대회 예선에도 나가는 등 기본기는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체육위원회에서 실시하는 간단한 면접과 실기테스트는 무난하게 통과하였고 그 후 한국어 선생과 초이발산 유소년 축구 클럽의 지도자 일을 병행하게 되었다.
초이발산 유소년 클럽은 도내에서 공인된 클럽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적으로 회원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회원들은 나이 별로 늘 초과되어 많이 찾아온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클럽에 찾아오는 아이들의 수준은 거의 초보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몽골 어디나 그렇듯이 구기종목중에 농구를 1순위로 선호하고 그 다음은 배구 그리고 그 다음이 축구이기 때문에 운동신경이나 재능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농구나 배구에 집중되어 있어서 축구는 기본기 훈련을 많이 해야만 했다.
사실 유소년 축구 클럽은 선교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단순히 수단화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몽골 FIFA에서 실시하는 지도자 연수에 참석해서 그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그리고 몽골 지도자들보다 더 연구하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축구 클럽의 수준을 올리는데 열심을 다하였다. 그 결과 전국대회에 나가서 어린아이들이 동메달을 받기도 했고 도내 축구의 관심이 고조되다 보니 초이발산 청년 팀이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함께 일하는 초이발산 축구 감독들에게 여학생 축구팀을 만들자고 건의했고 받아들여져서 여학생 팀을 만들어 1년동안 지도하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2019년에 여학생 축구팀이 첫 출전하여 전국대회 4강에 오르기도 했다. 2018년에는 초이발산 유소년팀 19명과 함께 한국의 유명 클럽팀인 서울 금천 축구클럽에 초청받아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한국의 도움을 받아서 유소년 축구대회를 개최하여 초이발산의 축구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는데 미력하나마 일조하고 있다.
2.2 유소년 축구 클럽의 선교적 기능
유소년 축구 클럽의 선교적 기능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문적인 스포츠선교사가 아니고 창의적 선교의 도구로서 유소년 축구 클럽을 활용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 클럽에서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몽골 법에서는 16세 이하 어린아이들에게 종교를 전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신앙은 기독교라고 밝히는 데까지만 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체육위원회 사람들은 대부분 다 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예수를 전하지는 않는다. 축구 클럽에서 단 한마디도 복음을 전하지 않지만 신기한 일은 우리 클럽 아이들 가운데 가끔 나에게 와서 “선생님 저 교회에 나가요” “선생님 저 세례 받았어요” 라는 말을 한다는 점이다.
2.3 유소년 축구 클럽에서 얻는 공신력과 사회적 연계망의 확장
종교비자 없는 선교사로 와서 1차적으로는 비자 목적대로 한국어 교사를 하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선교 사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이발산이라는 좁은 도시에서 자칫 사람들의 눈 밖에 나거나 거부당하면 종교적인 일은 물론 그 외의 어떤 활동이나 사역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스럽다 보니 무엇보다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을 두려워 한다는 게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종교비자 없이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현실적 고민이었다.
선교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사회 속에 깊이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공적인 신뢰를 얻는 일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줄여주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돌파의 틈새를 얻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소년 축구 클럽 활동이 우리부부를 현지인 기피증에서 해방시켜주었고 초이발산의 어린이들과 청소년, 청장년층,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게 해주었다.
우리는 몰라도 현지인들이 먼저 알아봐주고 도움을 주기도 했다. 초이발산에서 수도로, 초이발산에서 지역의 각 솜으로, 오가는 중에 혹시 차량 고장이라도 나서 길 옆에 서있으면 지나던 사람들이 “연박샤”라고 부르면서 자기 자녀가 축구클럽에 다닌다고 하거나 한국어 교실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초이발산에서 유소년 축구 클럽 감독으로 일한다고 하면 누구나 신뢰를 보낸다. 그 공신력의 덕분으로 무교회 마을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울 때도 큰 두려움 없이 일을 진행시켰다.그 마을의 행정부 공무원들을 만나더라도 도내 스포츠체육위원회 위상을 업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다가 점진적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일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몽골 시골에서 어느 선교사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 몽골이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선교할 수 있는 틈새와 여지를 부지런히 찾아 선교해야 하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5. 우리의 장기적인 목표
선교사는 누구나 단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단기적인 목표는 초이발산에서 우리가 섬기고 있는 현지인 교회의 공간을 넓히는 일이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면서 조금씩 어린이들, 청소년들, 어른들이 늘고 있다. 교회 공간이 너무 비좁다. 속히 교회 공간을 넓혀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우리의 시급한 목표이다.
중장기적인 목표는 고령화된 교회 지도자들의 바턴을 받아서 사역을 이어갈 다음 세대 지도자를 양육하는 일이다. 현재 은퇴할 나이에 이른 평신도 지도자들을 이어갈 다음세대가 준비되지 못했다. 이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이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중장기적인 목표이다.
또 하나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도내 아직도 교회가 없는 솜이 7개가 남아 있다. 이 7개 솜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장기적인 목표이다. 이를 위해 교회 없는 마을마다 기초 셀이 조직되야 하기 때문에 때때로 교회 전도팀과 함께 솜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기초 셀을 세우는 일이다.
장기적인 목표는 실현 여부를 떠나서 2가지를 놓고 기도중이다.
첫째는 동부지역 3개도(헨티 도, 수흐바타르 도, 더르너드 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헨티 도의 칭기스허트에 동부지역 연합신학교를 세우는 일이다.
이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부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동부지역에 있는 5명의 현지인 목회자들과 함께 비전을 나누고 공유할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몽골 동부지역의5명 모두의 목회자들과 개인적 사귐을 갖고 있다. 이 사귐 역시 한국어 교육을 통해 연결된 관계이다. 우리 부부는 간헐적으로 더르너드 뿐 아니라 헨티 도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여 한국어 교육을 해왔고 그 교회 목회자들과 동부지역 교회 지도자 교육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곤 했다.
놀랍게도 이미 몇 년 전부터 동부 3개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 리더들 약20~25명이 매년 성경 공부를 해 오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그 교육 조직을 좀 더 보완하고 체계화해서 신학 교육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 5명의 목회자들과 꿈을 공유하고 있으니 이 목표도 길은 멀지만 결국 실현 되리라 믿는다.
둘째 장기적인 목표는, 초이발산에 한국어와 스포츠를 전문으로하는 교육 기관을 세우는 일이다. 만일 이 교육 기관이 세워지면 한국의 전문인 선교사들이 초이발산에 더 많이 들어올 수 있다. 물론, 종교비자를 주는 기관은 아니겠지만 전문인 선교사들의 요람이 되어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창의적으로 선교가 확산되리라 본다.
초이발산에 교육기관을 세우는 일을 체육위원장을 통해 조심스럽게 타진해보니 가능성이 있다. 도에서 땅을 제공하고 교사들과 커리큘럼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하고 우리는 건축과 운영을 할 수 있다는 선까지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교육기관은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많은 기도가 필요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본다.
■ 나가는 말
동몽골 특히 초이발산에서의 선교사역은 창의적 선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종교비자를 못받기 때문이다. 종교비자 없이는 직접적으로 복음 전도 사역을 할 수 없다. 실정법상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가 제한되 있는 환경에서 어떻게 선교의 돌파를 이루어 내는가? 라는 내용이 이 아티클의 주제이다.
우리는 전문인 한국어 교사도 아니고 전문인 스포츠 선교사도 아니다. 종교비자가 없는 창의적 접근지대에 들어온 목회자 선교사로서 법에 허용된 틈새를 비집고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려고 지역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한국어와 유소년 축구 클럽이 유효한 수단이라 확신하여 사역에 접목한 것뿐이다. 결코 누구에게 드러내 소개할 정도의 사역이 아니다.아마 창의적 접근 지역의 선교사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틈새를 파고들어 복음의 돌파를 꾀하고 있다고 믿는다.
앞에서 적시한 대로, 한국어 교실과 유소년 축구 클럽을 통한 공신력 확보와 사회적 관계망의 확장이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서 우리를 담대하게 했고 우리가 섬기는 현지인 교회 내에서 가끔 설교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무교회 마을에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몽골의 지방 특히 국경도시에서 종교 비자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배경에 한국어 교실과 유소년 축구 클럽이 있었다.
한국어 교실과 유소년 축구 클럽은 우리 부부의 사회 안전망이 되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교 사역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모든 보호는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을 전제하고) 창의적 선교의 돌파구라고 할 수 있겠다.
끝으로 한 가지 제언한다면,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의 선교는 교육이나 스포츠 음악, 미술등 문화 예술을 통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접근이 매우 유효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