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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향기3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여름이면 벼들이 푸르름의 극치를 이루고 푸른색 바람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평야 한 가운데에서 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들녘 끄트머리쯤을 휘감고 있는 갯벌은 철철이 갈숲을 우거지게 키워내고 잿빛 뻘 섞인 강물은 그렇게 유유히 내 유년시절과 함께 흘렀다 .
강둑을 따라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고 나무한그루 찾아보기 힘든 간척지의 그 들녘에서 난 하루도 빠짐없이 아름다운 석양과 갈숲 사이에서 만나 정을 나누곤 했었다.
난 모질게도 외로운 아이였다. 동네라고 몇 안 되는 집, 집집마다 일손이 귀하여 짜박 짜박 걷기시작하면 벌써 손에 무엇인가를 나르곤 해야 했다. 친구들의 손가락엔 반창고가 더덕더덕 붙여지고 학교수업보다 엄마일 돕는 일이 더 중요하곤 하던 시절 틈에서 난 외로웠다.
막내로 태어나 가늘게 늘어진 내 몸뚱아리 덕에 언니 오빠 엄마는 내게 일로부터 자유를 주었었다.
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는 그 동네에서 철저한 외로움 속에 버려짐을 뜻하였다. 같이 소꿉놀이 할 친구가 없어 혼자서 풀 한포기, 흘러가는 강물과 수 없는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저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래에 흥얼거림으로 그 넓은 들판을 헤매이던 내 어린 시절 그 들녘을 난 아직도 그리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계절이 항상 오래 머물러 가던 그 들녘, 겨울이면 강에 가득 부딪치며 흘러가는 집채만한 얼음덩어리들, 그리고 동네 아저씨의 싸이낭이라는 독에 속속 쓰러져 밥상위로 올라가곤 하던 가여운 철새들, 그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 또 그 눈보라만큼이나 매섭던 솔개들의 날갯짓, 그 무섭던 바람을 헤집고 학교를 향해 달리던 그 십리가 넘던 벌판길, 모든 것을 꽁꽁 얼어 붙이던 그 시절 그 겨울 내 들녘.
그리고 봄, 겨우내 얼었던 들판이 서서히 녹아 그 간척지 가득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면 어느 틈에 보릿싹은 폭풍처럼 파란 싹을 밀어내고 금세 어린 아기 키만큼 자란 보리밭은 언제나 우리의 발길을 또 다시 꽁꽁 얼어 붙이고 덜덜 떨며 더 빨리 지나쳐버리고 싶어 눈을 꽉 감고 이를 악물고 뛰다가 어김없이 엎어져버려 더럭 겁에 질려 버리게 하던 그 파아란 보리밭, 허나 우리 들녘에선 그저 그 무섭던 공포의 문둥이의 이야기는 그저 먼 나라의 전설일 뿐, 그러나 우린 그 전설의 힘에 그 들녘에서 보리밭이 사라져 버려주길 얼마나 간절히 기원했었던가?
여름! 엉성한 농수로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갈대, 부들들 틈바구니에서 잡아대던 물고기. 그 흙탕물 첨벙이며 물장구치던 시절. 강 뚝 길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들꽃들의 유혹으로 날이면 날마다 찾던 그 둑길, 그곳에서 난 얼마나 많은 시를 토해내며 노랠 불러냈던가?
언제나 풍성하던 가을들녘. 갈대는 꽃을 피워내 들판을 환상의 나라로 둔갑시키고 강가의 갯벌과 가득 갯가 특유의 풀꽃들은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이렇듯 계절은 하나씩 또 다른 세계를 내게 안겨주며 내 감수성에 불을 질러 대주곤 했었다.
중학교 시절이었나? 학교에서 막 돌아온 내 호기심에 누군가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시위를 당겨주었다.
“강가에 시체하나가 떠밀려 와있데!”
난 당장이라도 달려가야만 했다.
"같이 가보지 않을래?”
“재수 없어! 왜 그런 걸 일부러 보러 가? 미쳤군!”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이상한 눈초리들만 내 뒤로 던져놓곤 아무도 따라나서 주질 않았다. 벌써 석양은 뉘엿거렸고 더 이상 주춤거릴 시간이 없었다.
다리가 뻐근 거릴 만큼 거세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가을걷이를 막 마친 빈 들녘엔 헤성헤성 갈꽃만 흩날리던 그런 가을 막바지 어느 날 이였었다.
바람은 모질게 불어 얼굴을 감쌌고 더 빨리 달릴수록 해도 더 빨리 지평선 너머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강둑에 자전거를 던지다 시피하며 내달렸던 그곳에 호기심 가득한 내 눈길을 가득 매운 것은 물에 한껏 부푼 한 아낙의 시신이었다. 아니 사람 몸이라고 억지를 부리기는 너무한 그저 하나의 커다란 애드벌룬이었다.
그 고무풍선 같은 시신 앞에서 난 삶과 죽음의 미묘함을 느꼈다. 그때 그 어린나이로 부딪치던 죽음이란 묘한 단어! 여덟 살때 하얀 보자기 속에서 만났던 내 아버지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어린 날 의문으로 몰고 갔었다.
“죽음. 죽음, 죽음...................................”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되 뇌이던 내 한 마디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아니 기억했었다기 보다 삼사십년 만에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어릴 적 동창생 입으로부터 터져 나온 그 한마디!.........
“아니 너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니? 너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고 그렇게도 노랠 하더니만.....”
그랬었다! 난 그렇게 죽음을 동경하며 살았었다. 마치 외갓집이라도 찾아가는 듯한 심정으로 죽음을 간절히 염원하곤 했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채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허옇게 보낸 아버지, 그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그 죽음이란 세계 너머를 난 애 터지게 그리워했다.
이렇게 시작된 죽음이라는 단어의 매력은 끝도 없이 날 사로잡았다. 죽음이라는 것과 연관된 분위기, 혹 사건 등 그런 냄새만 풍기는 기미만 보여도 난 만사 재켜 두고 달려들곤 했었다.
내가 태어난 건 아버지 나이 오십하고도 세 살이나 더 되었을 때 일이다.
위로 언니 오빠가 있었으나 나보다 아홉 살이나 위인 바로 위 언니, 그리고 십 년 십 이년 그리고 이십 년 등등 모두 나하고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나이들이여서 자라면서 어린나이부터 난 유독 외로움을 탔다.
엄마는 엄마대로 벌써 할머니였고 집안에서 나와 함께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보니 내게 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낯설기만 했다.
게다가 내 또래 아이들이면 당연하게 다니는 중학교, 언니 오빠가 집안 형편상 갈 수 없었던 관계로 난 언제나 혼자서 교복입고 책가방 들고 다니는 것이 그들 앞에서 죄인이었다.
혼자서 길을 걷다가도, 학교에 다녀오는 중에도 난 언제나 비통하고 서러웠다. 내가 서있는 자리가 어설프기만 했다.
그러는 중에 난 종교에 빠져들었다. 중학교 이학 년 때 일이었다.
학교에선 내놔라하게 공부를 잘 했기에 학교 선생님께서는 내가 당연히 도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주리라 생각을 하셨었다.
그런 선생님의 생각과는 딴판으로 난 다른 쪽으로 온 신경이 쏟아져가고 있었다.
세상의 지독한 불공평을 그 어린나이에 이미 경험하면서 난 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파고들기 위해 종교에 심취되어갔다.
난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아니 나 자신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토록 불평등이 난무하는 데에는 무슨 타당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성경책을 읽고 또 읽어대기 시작하였다.
난 머리가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번 읽은 책은 몽땅 외워버렸으며 학교에 가서는 시험공부가 필요 없었다. 난 그 당시는 왜 친구들이 시험 공부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수업시간에 한 번만 집중해서 듣고 나면 난 중간고사고 기말고사고 그저 척척 답안지를 작성해냈었다.
그런 머리로 난 성경책을 읽어댔다. 왜 신이 창조한 세상에 이토록 고통으로 넘실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었다.
그러나 종교 사회에도 여전히 날 실망시키는 일투성이 뿐이었다.
“만약에 신 이 있다면 난 꼭 그 신을 만나고 말겠다. 이토록 불평등한 세상을 이끌어가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신이 존재한다면 난 내 목숨을 걸고라도 결투를 신청하겠다.”
이토록 피 튀는 선언을 하고 고등학교 일 학년이 되던 해에 그토록 모든 정열을 쏟아 붓던 그 종교로부터 영원한 결별을 선언했다.
그 선언은 절실히 종교적이던 내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선언과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내 가족과는 대화가 완전하게 단절되어버렸다.
사실상 난 그때 이후론 종교 안에서 조금씩 풀어내가던 가족과의 친분을 또다시 팽기쳐버리고 거의 고아처럼 가슴을 닫고 살았다.
그 가녀린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꽁꽁 얼어붙은 살벌함 속에서 치루어졌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 오빠의 결혼과 함께 찾아 온 대학 진학에 대한 포기 강압은 날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미래에 대한 실의와 허무의 늪이 나의 허리토막을 삼켜나갔다.
사방은 어둠뿐 이였다.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난 내내 삶과 죽음에 대해서만 쫓아다녔다. 하여 줄곧 내 그림의 타이틀은,
‘산다는 것1, 2, 3.............’사 오십대 이 땅의 남자들의 삶에 찌든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으며
혹은 ‘창조 - 그 이후1, 2, 3.........’라는 명제 하에 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악귀처럼 변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모습의 일그러진 인간들의 군상들을 그려대기 시작했고,
‘전생’이라는 명제 하에서는 여인들의 얼굴모습을 수십 수 백 개를 그리며 그 모든 모습들 표정들이 내 모습일거라며 전생시리즈에 빠져들었고 그다음엔 ‘여인의 꿈 ’ 시리즈로 여인의 임산부 누드를 그렸다. 일그러진 임산부의 표정 고통스러운 모습에서 여인들, 인간들이 어떻게 꿈을 상실해 가는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등등 항상 그런 식으로 삶과 죽음의 주변에서 서성거렸었다.
그런 내 특별난 행동 중에 하나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가 새벽 두세 시가 되면 가까운 대학 병원의 응급실을 찾는 것이었는데 난 그곳에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허둥대는 인간들의 모습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 느낌을 화폭에 옮기곤 하는 버릇까지 생겼었다.
어느 날은 하얗게 죽어가는 환자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몸부림치는 가족들 틈에 끼어 펑펑 눈물을 쏟기도 하고 어떤 땐 들것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싸늘한 환자 앞에서 현대 의학의 무능을 탓하며 멍하니 넋이 빠져버린 의사 곁에서 그 무력함을 몸소 느낌으로 전해 받곤 하던 기억,
그렇게 돌아와 화판 앞에 서면 온몸을 두들기는 망연한 허무! 비참하고 비참한 내 허무가 날 짓이기 시작했고 어둠이 가시는 새벽녘까지 난 삶에 대한 서러움으로 몸부림치곤 했었다.
그렇게 그려지던 내 그림들, 어떤 땐 그 허무에 두 손 들어 한 아름 일기장과 수많은 그림들을 불길 속에 내 던지기도 수차례, 아! 그런 속에서 펼쳐져가던 내 삶은 모두 죽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 열병은 수도 없이 내 삶의 허물을 벗겨냈다.
이성으로 자유를 갈망한다하며 삶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허망한 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늪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은 빛도 보기 전 그 애리 애리 하던 소녀시절부터 너무도 성급하게 죽음의 마력에 휘말려 들고 있었다.
**명상 속에서 찾은 삶, 삶 속에서 찾은 예술
머리 쪽에서 번쩍하며 무엇인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고 내 몸뚱어리 구석구석 아니 세포하나 하나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강렬한 떨림이였던지....
난 내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고 있는 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런 생각조차도 할 수도 없었다.
명상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난 움직임을 시도해 보았다. 사지가 말을 듣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정신만은 이루 말 할 수없이 맑아져 갔다.
사실 그 순간까지 아니 그 후로 오랜 동안까지도 난 그런 현상들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더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책 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씩 마비에서 풀려나듯 내 발이 떨어져 주었다.
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까지 그 에너지 샤워를 받고 난후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 내 몸은 정신없이 춤을 추어댔다. 그러나 그때까진 춤이라고 하기는 뭐한 일정한 모션이 규칙적으로 계속되어지고 있었다. 내 팔이 나와는 상관없이 한 없이 원을 그리고 또 꼬이고 어떤 힘에 의해서 또 또 그렇게 그 손짓들은 계속되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 동작들이 차츰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며 그려지는 동작들도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내 몸이 춤을 춰!......."
그렇게 시작된 내 춤은 밤이 새는 줄도 몰랐고 어쩌다 틈이 나면 나이 사십을 바라보는 내 굳어진 몸뚱어리가 받아내기 힘든 동작들을 하나하나 일으키며 유연성 체조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요가 동작들이었다.
난 그렇게 그때부터 미처 요가라고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수도 없는 난해한 동작들을 해내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였다. 내 뼈 마디마디는 말할 수 없이 유연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춤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워져 갔다.
그리고 밤. 침대에 누우면 또 춤이 살아난다. 얼마나 신비스러운 기운의 흐름이던지. 그 아름다운 춤은 나 혼자서 감상하기는 정말 너무도 안타까울 지경의 황홀경 그 자체였다.
“탄트라였다! 러브 탄트라!”
티벳 신들이. 인도의 전설에나 나올법한 신들의 춤이었다.
춤의 환상은 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시공을 초월하여 난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데 어떤 동작이 필요하거나 어떤 자세가 필요하면 어김없이 교정 연습에 들어갔다. 난 사람들이 몇 년에 걸쳐 할 수 있는 요가 동작들을 그저 스스럼없이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가슴으로부터는 사랑이 넘쳐흐르고 사람들을 대할라치면 연민과 안쓰러움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날마다 춤을 추었다.
서서히 내 삶에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또 춤을 추었다. 춤 속에서 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공간과 춤만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서서히 명상법들이 하나둘 내 존재 속으로 걸어 들어왔고 내게 필요한 명상법들이 내 몸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삶은 춤처럼 송두리째 명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고 난 지금 춤추듯 삶을 산다.
그렇게도 모질던 깊고 깊은 죽음의 강을 건너 안개처럼 칙칙한 삶의 터널을 지나 이제 난 맑은 햇살아래 서있다.
그렇게 호기심 가득하던 죽음이라는 단어도 이젠 더 이상 날 유혹하지 못한다. 그저 죽음이란 것 또한 삶의 한 부분일 뿐임을 알아버리고 나니 이제 비로소 편안하다.
명상의 힘이다.
우연히 명상을 만나고 명상이란 강 속으로 휘말려들고 그리고 난 그저 그 강물과 함께 흐르고 있다.
요즈음 가장 놀라운 것은 날 둘러싸고 있는 삶의 변형이다.
삶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는 그런 형태의 삶들을 난 주저 없이 그저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가오는 삶의 순간들을 난 그림을 그리듯, 예술작품을 하듯이 온 존재를 던져 산다. 그리고 일어나는 삶들마다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 갈 길은 더 남아있지만 그 여정이 이제는 더 이상 힘겹지 않다.
이제 이렇게 내게 다시 주어진 삶은 더 이상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집착이라는, 욕망이라는 허황된 단어들과는 무관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나 이제 이남은 삶은 내 안에 있는 나를 더 허용하며 살리라.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그저 감사로 살리라. 그저 기다리리라 내안의 꽃이 활짝 필 수 있는 그 날들을...
‘당신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일을 즐겁게 한다면, 그 일을 사랑하면서 한다면, 당신의 행동은 단순한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서 창조적이 될 것이다. 그 일을 통하여 당신 내부에서 무언가 자라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이고 창조적이고 또한 신성한 것이다. 당신은 창조적이 되면 될 수록 더욱 성스럽게 될 것이다.’ 란 오쇼 라즈니쉬의 말을 난 깊게 새기며 온 존재로 춤추듯 살리라.